“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너무 애썼구나.”
7~8년만에 나를 본 수녀님의 첫마디였다. 그 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사오년 전. 당시 삶에 지치고 방향감 상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 즈음, 학창 시절 멘토셨던 마리아 수녀님을 뵈었다. 그 분의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았고 그 후로도 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 즈음 나는 내가 잃은 것이 충만한 관계와 사랑과 젊은 감각과 목적 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잃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어둠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신비도 사라졌다. 내 영혼의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닐 것이므로 다만 어둠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수용하는 능력, 신비, 직관, 예술 이런 것들도 함께 멀어진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생활하면서 적극성과 외향성을 지나치게 키워왔던 것이다. 그 때도 솔로 여행을 좋아했지만, 타인의 간섭이나 방해를 피해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였지,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홀로 있는 시간을 오롯이 즐기게 된 것은 근래에 와서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기도 하고, 나 자신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해서기도 하고, 세상에 참여하거나 세상을 바꾸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기도 하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튼 지난 십여년간 바깥 세상에 더 많은 정열을 기울이며 살았다. 외향성을 키울 필요도 물론 어느 정도 있었지만, 내 안의 세계를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다. 안과 밖을 구분하고 그 사이를 응시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삶의 균형이 깨어지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점점 천착하게 된 것 같다.
우리 몸속은 어둠으로 차 있다. 어둠이고 침묵이고 신비다. 그 모든 것에 이성의 칼날을 들이대고 싶지 않다. 앎을 사랑하고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이젠 표현되지 않는 것, 표상할 수 없는 것들이 내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현대 문화에서 우리가 침묵과 고독을 벗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비움의 자리에 우리 존재의 근원이 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갇히는 내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지평으로 우리 존재를 확장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이고 우주적 체험이다. 어둠을 포용할 때 기쁨에 대한 감각이 커진다.
긴 침묵과 새벽의 짙은 어둠을 다시 불러오고 맛보고 싶다. 그것은 생각과 이미지를 애써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깊게 숨쉼으로써, 우리의 몸과 무의식을, 존재의 빛과 어둠을 다 수용하고 느낄 때 가능하다. 자기 세계를 발견하고 가꾸는 것은 이런 것들을 포함한다. 걷기는 언어의 재현과 구속을 넘어선 전체적인 세계와의 만남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훌륭한 명상의 길이다. 명상의 '명'은 어두울 '명'자이다. 어둠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깊이에 잠겨드는 것이 명상이다. 그 때 우리는 아주 작고 예사로운 것들에서도 자연스러운 기쁨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빛깔과 향취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설명할 길 없는 침묵 속에 잠겨서 7코스가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다. 혹시나 해서 가이드북을 펼쳐보니 이미 8코스다. 막 빠져나온 야자수 군락지와 굿당길이 8코스의 시작 무렵이었구나 했다. 드넓은 해안을 걷다가 만나는 인적 드문 그늘진 숲길 속에 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해는 점차 기울어갔고 세상에는 어둠이, 마음 속에는 고요가 깊어졌다.
-> 배릿내오름에서 바라본 서귀포시와 한라산
*걸은 날. 200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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