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돌개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런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 자연 속을 걸을 때 나는 그런 관계에 가장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소로우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뭐 철학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딩에 불과한지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홀로 걷는 시간을 삶에서 빼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종일 걷고 싶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람과 늘상 부대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더욱 필요한 것.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주체성을 훼손하고 우리는 그들의 시선에 의해 조각난 세계를 체험하게 되므로.
독서와 운동이 그 불균형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 주지만, 독서는 정신에 그리고 운동은 몸에 좀 더 초점이 있다. 이에 비해 걷기는 그야말로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몸을 통한 감각적인 접촉과 세계에 대한 사색이 함께 일어나는, 가장 인간다우면서도 자연스러운 활동인 것 같다.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서 그 먼 거리를 주파한 기억이 유전자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갈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두 발로 걷기 시작하는 순간 피부와 살이 생생하게 깨어나고 정신은 더욱 명료해진다. 이 세계의 빛이 우리 존재를 비추면서 우리 내면도 함께 깨어나는 것이다.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을 몸과 마음 전체로 또렷이 자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이다.
함께 걷는 것도 좋지만 홀로 걷는 것도 한없이 감미롭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으냐고 물으면 둘 다 저마다의 매력이 있기에 답하기 어렵지만, 가장 깊은 충만감을 선사하는 것은 역시 후자인 것 같다. 아니, 그것은 길마다 다 다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제주올레가 홀로 걷기에 참으로 좋은 길이라는 사실이다.
그 길에 있는 것은 타자의 부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이다. 무언가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가슴 가득 느낄 수 있는 시간. 자신의 고유성이 빛나게 살아있으면서도 길 위의 모든 것들과 생생하게 교감할 수 있는 시간. 그대도 나도 자유롭고, 어떤 희생도 봉사도 요구되지 않으며, 모든 필요와 기대와 희망을 넘어서 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존재를 축하할 수 있는 그런 시간.
춤추는 바람과 햇살과 파도를 만끽하면서 바닷길을 따라 몇 시간을 걷노라면 존재의 복원력이 절로 작동한다. 지나친 자의식은 진정이 되고 쓰렸던 마음도 평온을 되찾고 가슴에선 다시 노래가 피어난다. 꽃길, 바닷길, 갈대길, 하늘길 사이를 뒹굴며 우리는 알게 된다. 이 세계를 느끼는 것, 그 자체가 무한한 행복이고 오르가즘이라는 것을.
* 걸은 날 : 2009.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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