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한 적은 별로 없다. 차를 몰며 가끔 이 길 끝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거나, 갑갑할 때 바다를 떠올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실체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막연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가까운 감포나 포항에 회 먹으러 더러 들렀고 부산에도 자주 갔지만, 그 바다가 내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저 북쪽의 강원도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만난 맑은 물과 백사장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바다는 상상 속의 풍경 한 컷 정도일 뿐, 독립적인 대상으로 내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롬복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은 황홀했으나, 그것 역시 잠깐의 마주침이었을 뿐, '바다' 그 자체가 내게 어떤 의미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바다의 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주로 산이었다. 개인적 경험의 두께 때문이리라. 어릴적 신비함을 느꼈던 지리산, 그 이후 만난 네팔 히말라야, 이런 체험들이 쌓이고 쌓여 산에 대한 특별한 그리움과 애정을 형성한 것이다.
제주 올레길을 몇 차례 걷고 나서, 문득문득 바다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나를 매혹시킨 건 바다와 섬이 만나 이루어진 독특한 실루엣. 현무암, 퇴적암, 선인장, 억새밭, 오름, 야자수, 원시림....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졌고, 바다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다. 온몸에 감기며 스며들던 바람과 흰 물거품으로 솟아오르던 파도가 있었다. 바다는 그렇게 내 감성을 할퀴고 내 의식에 흔적을 새겨갔다.
이후로 누군가 '바다'라고 하면 제주의 그 바다가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뛰어가서 그 빛깔과 소리와 소금기 섞인 공기를 맛보고 싶어졌다. 걷기여행이 준 선물, 그것은 세계가 우리 앞에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 앞에 자신의 존재를 다르게 드러내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주말 비행기표 구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인데, 추석 연휴 때 마침 티켓 한 장을 구했고, 다음 날 바로 제주로 날아갔다. 4월에 걸었던 올레 10코스 사계리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다섯 달만에 다시 만나는 제주의 바다였다.
-> 사계리
-> 11코스를 걸을 때까지 내내 나를 따라다닌 형제섬
* 걸은 날. 2009. 10. 4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