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읽고 행복했는데, 그 이상의 책을 만났다. 한 예술가가 50여년에 걸친 자신의 작업을 돌아보면서 그간 자신이 겪은 고난과 삶의 철학을 잔잔히 들려주는 책.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그의 생애가 농축되어 있고 그것이 단단한 심지가 되어 빛을 발하고 있다.
사진작가 최민식. 6. 25 전쟁으로부터 시작해 독재와 민주화투쟁, 가난과 고통의 긴 현대사를 통과하면서 그 길 위에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수천 가지 삶의 표정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삶의 '진실'을 생생히 전해주려 했던 작가. 이 책을 읽으면 그의 치열한 휴머니즘에 놀라고 감동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 끊임없이 붙잡히고 고통 받으면서도 끝끝내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던 한 작가의 예술혼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멋진 에세이다.
최민식의 사진에는 언제나 가슴을 저미게 하는 무엇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사진 한 장 한 장은 모두 그 자신이 겪은 시대의 고통과, 그가 전달하고자 던 그 시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진실에 대한 깊은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어떤 현학적인 수사보다 '리얼리즘'의 정수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민초들의 삶에 놓인 슬프고 괴롭고 정감 있고 그리고 빛나던 한 순간을 포착했는데, 삶의 '진실'은 그처럼 말로는 설명할 길 없는,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슬프고도 고귀한 순간 속에 깃들어 있었다. 그가 찍은 가난한 사람들에겐 어떤 '고귀함'이 서려있었고 그것이 내가 그의 사진을 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에게 사진은 삶의 목적이고, 살아가는 이유이며, 그의 생애가 담긴 하나의 '사상'이고, 분노의 외침이자, 세상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렇게 길 위에서 한 생을 보내고 나서 그는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그는 사진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을 찾아갔다. 이제 말년에 이른 작가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사진이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증언이자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것을. 그가 찍은 사진 속에 담겨 있는 영원성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역사적 격변기에 늘 현장에 있었고, 그 현장 속의 수많은 민초들의 얼굴 속에 담긴 고귀한 무엇을 포착했고, 그들의 몸짓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가 평생 추구한 주제, '인간'. 그 '인간'은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시대이고 사회상이고 세계였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한 컷의 사진 속에 장편소설과 맞먹는 장중한 세계관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의 사진 철학에 감동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아버지께 권해 드렸는데, 아버지도 그 자리에서 다 읽고는 깊이 감동하셨다고 한다.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계속 걸었고,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 있었다. 그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찍었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나의 사진은 도미에와 밀레의 그림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두 화가는 나에게 주제를 정해주었고, 그 속에서 숭고함과 영원성을 부여받았기에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아픔처럼 우리를 깊게 하는 것도 없다. 내가 겪은 여러 가지 고통의 경험은 사진 작업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고통을 느꼈기에 사진을 통해 항거하는 데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휴머니즘'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 나로 하여금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게 한 이 시대의 아픈 상황을 나는 무엇보다도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나는 가난하거나 힘이 없어도 인생의 고난 앞에서 굴하지 않는 우리 이웃의 모습을 찍어왔다. 우리의 가난한 이웃의 모습에는 가식이 없고 진실이 가득하다. 나는 그 진실한 모습을 작품화했다. 사진예술의 기본 미학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사실주의'라 말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 접근해야 참다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 사진과 서민들은 밀착되어 있고 그만큼 나의 가슴속을 파고든다. 나는 서민의 삶의 정감을 깊숙이 포착해왔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곧 삶의 보람이었고, 존재 의미의 모든 것이었다. 나의 삶은 사진으로써만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어쩌면 삶은 방법이며 사진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 아직도 사진만큼 매력 있고, 더 하고 싶고, 하다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삶을 자각하면서부터 삶의 의미를 사진에서 찾아왔다. 사진은 일생을 두고 결코 버릴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나의 내면에 이미 주체할 수 없는 감성이 자라고 있었음을 뜻한다.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지만 우리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정말로 기구한 인생을 보면 그것은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한갓 푸념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진의 최종 목적은 사랑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걸 찾기 위해 사진의 숲을 거닐었다. 사진에서뿐 아니라 삶 자체에서도 부단히 신의 존재와 영혼의 존엄성, 진리와 미 그리고 사랑과 기도를 믿으려고 애써 왔다. 그 값진 노력이 결집된 나의 사진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감하게 되어 기쁘다.
결국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삶의 다른 모든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1950년대의 암흑시대를 뚫고 4월혁명이 일어났다. 유신체제의 폭압도 민주주의의 열망을 짓밟지는 못했다. 광주항쟁에서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민주화운동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투쟁이었던가. 세계에서 드물게 민주화운동이 성공한 그 현장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나는 가난이 주는 상처 때문에 많이도 울었다. 가난은 사람의 영혼을 옭아매고 모든 희망을 수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성심을 다한 노력이 가난으로 인해 무망해져 버릴 때 갖는 진한 고통도 느껴보았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부귀와 사치를 탐해본 적이 없다. 부유한 자들의 안락함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다만 내 삶의 목적이자 수단인 사진 창작에 필요한 경비가 없을 땐 큰 아픔을 느꼈다.
내가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의 남루와 고통의 실상을 증언함으로써 위정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그들의 직무유기를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땅에 빈자가 존재하는 한 나의 증언은 멈출 수가 없으며, 그들을 배제한 내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과 세계의 정체성을 공통적으로 포괄한다. 그것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역사적 과정 속에서 전개되는 생활질서 전체를 말한다. ... 나는 50여 년간 현실을 사진에 재현한다는 신조로 일관해 왔다. 예술적 가치보다는 민중사의 기록으로서의 가치만을 주목하려 했다. 진실의 기록은 역사의 큰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사진은 다양하고 깊은 의미를 지녀야 가치가 있다. 평범하고 일상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휴머니즘적 통찰과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은 소박한 사람들의 깊숙한 내부에 숨겨져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사는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르게 보고, 역사의 흐름을 올바로 파악하면서 인간 존재의 이면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다. 인생의 밑바닥을 묘사한 것은 단순한 절망 때문이 아니다. 거기서 참다운 빛을 붙잡는 출발점으로 삼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진실에 접근하려면 가난이나 추악, 죽음과 불안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 그것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며 곧 그것이 참다운 예술에의 길이기도 하다.
인간적 관심과 삶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나의 사진 작업을 통해 일관된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통해 좀더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보려는 신념으로 사진을 해왔다. 나의 영원한 테마인 '인간'은 그 자체가 부분이기도 하지만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사회사이자 인간사이다. 어떻게 내 의무를 다하면서 그들을 위해 사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앞으로 보다 의미 깊은 감동적인 내용을 추구해 나갈 것이며, 가난한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나는 사진가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의 이미지를 새로이 발견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만나는 대상들에 너무 익숙해서 그 용도와 가치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에는 수많은 진실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사진 속에 인간의 고통을 담아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그것을 직면하게 하고자 했다. 그 고통은 동정심이 아니라 인간이 누려야 하는 삶의 존엄성을 일깨워주는 아픔이다.
나는 지난 50여 년간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 돈이 되는 사진을 찍으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떤 것도 항시 그런 질문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두운 시대에 나에게 주어진 최대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즉 무엇이 휴머니즘이며, 무엇이 진정 인간을 위한 정의인가를 깨닫기 위해 고민했다. 나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진은 사회적이며, 따라서 현실을 철두철미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만이 지닌 정신적 가치와 풍부함을 발견했으며, 그들을 통하여 물질적 번영에만 의존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민초라 불리는 이름 없는 이들이야말로 역사적 생명력의 원천이 아닐까?
언제나 중심을 이루는 주제는 '사랑'이며, 몸부림을 영상으로 정착시킨 도전의 기록이자, 민중의 거친 숨소리이다. 인간을 떠나서 사진이 성립될 수 없듯이 휴머니즘을 제쳐 놓고 내 사진을 말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한 주제만을 집요하게 파고든 나의 사진 인생 50년은 고단한 이웃의 삶을 감싸 안고 인간 내면과 시대의 무늬까지 아로새기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으로 채워진 시간이었다. 이제 나는 내 사진이 목적을 갖게 되었음을 확실히 인식한다.
내가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진의 외길을 걸어올 수 있는 바보 같은 신념이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 그 혹독한 탄압을 받을 때조차도 나는 오히려 예술에 대한 오기로 자신을 다그쳤다. 예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았을지도 모른다.
예술의 주체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대를 가장 예민한 촉수를 가지고 가장 멀리, 가장 깊이, 가장 널리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해 어렵고 외롭게 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그 고통을 찬란한 예술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남기고 떠나간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작품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혼이 어려 있다.
예술이 무엇이며, 예술이 인간의 삶과 어떠한 관계에 있고 또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반영하는지 규명하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예술의 미, 즉 정서가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인간다움'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사진집 '인간'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이 사진 속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의 순간은 바로 우리의 순간이다. 이 사진집에 단긴 사람들의 삶의 순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소박한 꿈과 함께 나는 이 사진집에 높은 이상을 걸었다.
사진가는 작은 상자를 들여다보며 셔터를 누름으로써 이 세상을 의미있게 만든다. 그들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또 앞으로 알게 될 모든 것들, 즉 우리의 가장 심오한 지식, 일상의 가장 귀중한 순간들, 사랑의 가치, 고통의 대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등에 대한 성찰이다.
나는 인간 삶의 고통을 기록하는 사진가의 길을 걸어왔다. 내가 만났던 이들의 빈곤을 결코 잊지 못한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고통을 잊을 수가 없다.
인생은 그냥 왔다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천을 통해서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바닥이 넓다 한들 이 세상만큼 넓으랴. 사진이 쏟아진다 한들 우리 삶을 모두 다 담아내랴. 사진 앞에 삶이 있다. 다만, 사진가는 사진으로 온전한 삶을 살아내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한 장의 사진이 더욱 절실해진다.
한 시대를 기록하는 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될수록 우리는 그 일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공통의 실체를 통해서 사회가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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