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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영화, 드라마

레미제라블 | 두 번째 관람 — 바리케이드 너머의 희망

by 릴라~ 2013. 1. 14.

 

 

 

 

 

다시 본 레미제라블. 음악과 노랫말이 훨씬 잘 들려서 좋았다. 처음 볼 땐 자막을 따라가느라 소리에 충분히 귀기울이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휴 잭맨과 러셀 크로우의 노래가 조금 아쉽긴 했다. 허나 그들의 연기력이 노래의 한계를 충분히 커버해주었다. 서사도 좀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 볼 때는 장발장의 삶의 행로에 눈길이 갔다면, 이번엔 코제트와 마리우스, 그리고 청년들의 항쟁이 서사의 중심축으로 다가왔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반부는 빵 한 조각을 훔치고 탈옥을 거듭 시도하다가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가석방 된 장발장의 이야기이며, 후반부는 마리우스와 청년 세대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이 두 부분은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장발장과 팡틴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비참한 처지는 인물의 생동감과 구체성을 확보하면서 뒤이어 등장할 혁명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 1789년 우리는 왕을 죽였지만 삶은 여전히 힘들다는 노래와 함께 등장하는 청년들의 변화에의 요구는 장발장 세대의 민중의 삶을 배경으로 더욱 튼튼한 울림을 내고 있다. 라마르크 장군의 장례식을 계기로 청년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영화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희구하는 '휴머니즘'을 참정권의 요구를 통해 강력하게 표출하고 있다.

 

코제트를 향한 마리우스의 애타는 사랑이 없었다면 왕정에 항거한 청년들의 투쟁은 그 뜨거운 빛을 조금은 잃었을 것 같다. 사랑과 혁명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마리우스는 그와 동료들의 투쟁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임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고 있다. 그들을 일어서게 한 힘은 그들의 순수한 젊음과 그 젊음으로부터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사랑이었기에. 그리고 잡초 같은 생명력을 지닌 귀여운 꼬마 가브로쉬의 존재는 관객들에게 젊은이들의 입장에 한층 공감하도록 이끌어준다. (코제트가 좀 약한 게 아쉽다. 오히려 에포닌의 감정이 더 잘 살아났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아리따운 외모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좀 경직되어 있는 게 흠.)

 

장발장은 그 자신의 동기에서가 아니라 코제트가 사랑하는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지킨다. 그가 혁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녀들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서 총을 들고 나섰다는 점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항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몰래 바리케이드로 잠입한 자베르는 구시대와 구질서의 옹호자로서 변화하는 질서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단지 장발장의 관용이 아니라 자유, 평등, 형제애로 대표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아마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서 고통 받았을 것이다. 자베르는 결코 악인이 아니었으나 시대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구체제에 대한 그의 철저한 신념은 그래서 애처롭다. 장발장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그가 인간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기에, 그는 시민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미리암 주교는 그 어떤 체제 하에서든 변함없이, 보편적인 인류애를 구현하는 인물을 상징하며, 테나르디에 부부는 어떤 세상이 오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탕 벌 궁리를 하는 속물의 전형으로 그려져 있다.

 

시민들이 침묵하고 방조하는 가운데 바리케이드의 젊은이들은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어갔다. 청년들의 시신이, 그들의 몸이 죽 늘어서 있던 장면은 일순간 내게 광주를 연상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연이은 혁명으로 이어졌듯이 광주의 불꽃 또한 꺼지지 않고 87년 항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아직까지 5. 18의 정신은 우리 사회에서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주류의 역사로 충분히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만일 항쟁이 서울에서 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역사를 더 크게 바꿀 수 있는 힘이 되었을까. 지방 중소도시에서 일어났던 항쟁, 이는 다시 말해 광주 시민들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들이었던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엔딩은 새로운 내일에 대한 희망의 외침으로 끝이 난다. 장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와 마리우스의 품에서 죽는다. 마리우스가 말했듯이 목숨을 던져 타인을 구하고자 한 그는 죄수가 아니라 성인(saint)이었다. 장발장이 남긴 사랑의 유산은 이 두 젊은이에게로 이어진다. 장발장이 미리암 주교에게서 '신의 얼굴'을 보고 평생 그 뜻을 이어가고자 했다면 마리우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바친 인물이었다. 이 두 세대의 삶과 두 종류의 사랑을 연결하는 점이 <레미제라블>의 큰 장점이다.

 

그리고 들리는 민중의 노래. 파리의 거대한 바리케이드에 올라선 무수한 시민들의 자유의 외침. 그 시민들의 얼굴 하나하나 속에 죽어갔던 청년들이 환하게 살아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은 역사의 진보를 쉽게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가슴에 19세기 프랑스가 꿈꾸었던 희망의 생생한 이미지를 선물하고 있다. 바리케이드 너머에 당신이 소망하는 세상이 있다고. 민중의 노래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으로 시작한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그 노래를 들려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로부터 150년도 더 지난 2013년, 다가올 날들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미래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사실 뿐. 역사는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지만, 아니 어쩌면 무의미한 반복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반복하고 싶은 것은 <레미제라블>이 보여주는 내일에 대한 이미지이리라. <레미제라블>이 보여주는 사랑의 이미지, 혁명의 이미지, 구원의 이미지인 것이다.

 

 

 

* 뮤지컬 레미제라블(10주년 기념 공연)의 엔딩(Do you hear the people sing), 그리고 청년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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