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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소설, 시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 성장소설이라기엔 무언가 아쉬운

by 릴라~ 2016. 9. 26.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한 번 봐야지 하는 생각에 일부러 시간 내어 읽은 책. 이게 대체 언제적 소설인데 좀 심한 뒷북이긴 하다. 좋아서 읽은 작품이 아닌데다 두께감까지 있어서 중도에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다 읽느라 조금 힘들었다. 역시 하루키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결론.

 

감각적인 문체, 세밀한 장면 묘사, 그리고 줄곧 느껴지는 어떤 공허감... 이 공허감의 정체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상실의 시대>는 누구나 통과의례처럼 겪는 청춘의 방황을 테마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네 명의 청춘들, 기즈키, 나오코, 와타나베, 미도리 모두 현실을 겉도는 느낌이었다.

 

한 젊음이 처음 세상과 맞부딪혔을 때, 그들은 좌절하거나 그것을 뚫고 넘어서거나 실패하고 자기 안에 침잠하거나 한다. 그런데 이 하루키의 인물들에게는 그들이 맞서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이란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현실의 언저리를 맴돌면서 다양한 종류의 내적인 독백들을 털어놓을 뿐이다. 인물들이 맞서고 있는 현실이란 것이 없고, 그들의 조각난 내면의 풍경들로 채워진 소설.

 

마치 현실과 환상이 제멋대로 뒤섞인 덜 자란 아이들의 내면 같다고나 할까. 내면이 아이인 사람이 겉만 훌쩍 자란 것 같은 그런 느낌의 말들이, 인물들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이들이 하는 말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 같다.

 

이들의 독백이 우리 안에 있는 한 미숙한 아이를 건드리는 면이 있고 그것이 이 소설이 주는 매력적인 지점으로 보였다. 우리 안에 하루키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다. 그 하루키적 자아의 방황과 몸부림을 정직하게 묘사한 소설이다. 하지만 성장 소설이라 부르기엔 뭔가 아쉽다. 

 

가즈키와 나오코의 죽음(이들의 죽음도 이해가지 않는 면이 있지만)으로부터 주인공 와타나베는 무엇을 배운 것일까. 소설의 말미에서 그는 미도리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지만, 미도리가 그의 구원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자신이 어디쯤 와 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미도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부터 불러야 하지 않을까.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전체 이야기와 별 상관 없는, 레이코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 때로 피아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치는 것이라고 말하던 장면. 그게 생각난다. 요즘 내가 피아노를 다시 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몇 장면을 마음에 확실히 각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하루키 문장의 힘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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