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타츠루의 책은 가벼운 에세이라도 항상 뭔가 건질 것이 있다. 일본 사회의 변화 양상, 특히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신작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에서는 저자의 인생관이 어느 시점에서 결정되었는지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소개되어 있어 재미있었다. 그는 사춘기가 접어들자마자 부모와 자신은 뭔가 다르다고 느껴서 바로 집을 얻어서 나왔다고 한다. 물론 몇 달 후 다시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경험은 이후 그의 삶을 좌우한다.
그는 '참고 견디는' 삶을 거부한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들을 계속 참을 때 흔히 말하는, 감정적으로 둔감한, 존재의 외피를 두꺼운 껍질이 둘러싼 것 같은, '꼰대'가 양산된다는 것이다. 사춘기 때 그가 참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이후 그는 부모와 계속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부모 또한 엉망인 자녀를 참지 말라고, 항상 '엉망진창인 자녀'와 '자녀의 나쁜 행동에 둔감한 부모'의 쌍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집에서 내보내고 관계의 선을 딱 그으라고 조언한다. 삶의 문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한 첫번째 선택이 이후의 삶을 지속적으로 좌우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열아홉 때 내 첫번째 선택(진로)이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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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충족되는 선을 낮게 설정해두면, 쉽게 '아, 행복하구나' 하는 기분이 찾아옵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무라카미 하루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것이 결국 행복해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진눈깨비 내리는 겨울날 아침, 따듯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침잠을 자다가 '맞다, 오늘은 수업이 없으니까 더 자도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 어느 누구 못지않은 행복을 느낄 수 있지요. 아주 쉽지 않습니까?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경박하고 바보 취급을 받을 것 같지만,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생존 전략상 이 능력은 확실히 유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보아온 모델은 이와는 반대로 '원하는 것을 아무리 손에 넣어도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 항상 굶주려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p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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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존재는 강하지만, 약합니다.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한 만큼 지칩니다. 무리해서 미리 당겨쓴 에너지는 훗날 반드시 갚아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한 단계 위의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파도 좀처럼 쉬지 못합니다. 지쳐서 멈춰 서기라도 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도, 정신에도 가혹한 일입니다. (중략)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히 아껴야 합니다.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이 '한계를 넘어서게' 하려면 우선 잠재적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p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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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나서' 사람을 죽이는 젊은이나 일시적 향락을 위해 매매춘과 마약에 빠지는 젊은이는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축소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거의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들에게 '가장 이기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란, 순간적인 정욕이나 분노나 증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포함되지만, 그 외의 무수한 요소를 포괄하는 개방적인 시스템을 가리킵니다. 그 시스템을 어떻게 균형 잡힌 방법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p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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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자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남성들이 이미 마스터해서 '성공 모델이라고 해봐야 별로 리얼리티도 없고, 일단 내일 회사는 가야지'하며 절반은 열심히 절반은 대충하는, 미묘한 적당주의 기술을 훈련받은 적이 없습니다. '적당히 하는 것'은 훈련을 받지 않으면 몸으로 익힐 수 없는 사회적 기술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여성들이 사회적 성공이라는 환상을 오히려 믿기 쉬운 것이 아닐까 합니다. (중략)
'실없이 웃으며 수준 높게 일하기 위한' 노하우를 알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가, 같은 사회적 압박을 받으면서 견딜 수 있는 사람과 무너지는 사람의 차이를 낳습니다.
그런데 현재 자기 일로 성공한 여성, 미디어가 성공 모델로 떠받드는 여성들 가운데 젊은 세대에게 '너무 많이 애쓰지는 말고 설렁설렁 갑시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p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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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핑mapping'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매핑'이란 '내가 지도상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특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도 속 어디에 있는가는 '지금, 여기, 나'를 중심으로 삼는 한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당연하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도를 본다'는 것은 일단 '지금, 여기, 나'를 괄호 안에 넣고 그곳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상상하면서 상공에 임시로 설치해둔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니까요.
나를 벗어난 시점에서 상상을 해보는 겁니다. 좌표에서 점점 멀어지다 보면 저 멀리에서 '내가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거대한 풍경을, 도시를, 대륙을 지구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고도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공간적 위치에 관해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공간적 매핑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는 매핑의 원리도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습니다. 내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사회와 공동체라는 그물코 안의 어느 지점에 내가 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어떤 요소들의 복합적인 효과로서 내가 출현했는지, 조건이 어떻게 바뀌면 내가 '사라지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시간적 매핑'입니다. 나의 역사를 꿰뚫어보는 것이지요.
지금의 내 관점과 사고를 절대시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매핑'하는 지적 습관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흔히 '나는 나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는 말을 하지만, 이런 사람은 '머리가 나쁜가보군' 하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나'의 구성 요소는 거의 대부분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나'라는 사람이 긍의 동세대뿐만 아니라 그가 사는 지역에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이 '나님'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나'라는 거만한 태도를 가진 이상 내 관점이 형성된 역사를 알 수 없습니다. 혼자서 팔짱을 끼고 속으로 '그렇지, 그랬었지' 하고 반성해보아도 자신의 역사를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공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내 개성을 안다'는 것은 본래 '소거해가는' 작업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성립된 배경을 '공부'함으로써 특정 세대, 특정 지역집단 전체를 덮고 있는 '대기압'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대기압을 소거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개성'으로 인지할 수 있습니다. pp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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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약한 적과도 공존하는 것"이 '시민'의 조건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약한 적' 말입니다.
'강한 적'과는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공존합니다. 공존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약한 적'은 마음만 먹으면 박해할 수도, 배제할 수도, 절멸시킬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그 '약한 적'의 입장을 대표하고 시민사회의 이익을 고민할 수 있는 인간, 그런 사람을 '시민'이라고 부른다고 오르테가는 말했던 겁니다. 그것이 '공'의 올바른 개념입니다. p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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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행동은 재능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경박한' 행동입니다. '경박하다'는 것은 심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절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의 '생존 전략'이 내보내는 위험신호에 주변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는 불쾌한 감정을 말합니다.
예컨대 누군가의 장례식에 아주 화려한 복장으로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장례식이든 결혼식이든 '나는 나'이므로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이 성실한 삶의 방식이고 '나다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략)
진짜 어른은 다른 사람의 눈길을 끌지 않고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갑니다. 누구에게도 불안하거나 불쾌한 인상을 남기지 않지요. '누가 왔는지 모르는 장소'에서는 어떤 화살이나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눈에 띄는' 일은 삼가는 것입니다. "내가 말이야" 하면서 거드름만 피우는 사람이 남기는 불쾌한 존재감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p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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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작가적 직감에 따라 '디센트한 것'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최우선의 디펜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에절은 '살아가기 위한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의바른 행동은 '패배적 태도'이며, 방약무인하고 무례의 끝을 보여주는 행동이 '승리자의 특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중략)
왜 그런 착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사람은 모든 상황에서 '진심으로 대한다'는 원칙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건 상대방에게 아첨을 하거나 비굴해지라는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완벽히 틀린 생각입니다. 예의범절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에 있습니다. 권력을 소유한 사람, 결정권을 가진 사람, 내 쪽에 강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자신의 '민낯'을 내보여서는 안 됩니다. 이게 예의의 기본입니다. (중략)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타인으로부터 '예의바른 대접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교차되는' 느낌이 듭니다. '교차되거나' '제쳐지거나' '건너뛰어지는' 느낌이지요. 그런 대접을 받으면 그 이상 '깊이 파고들' 수가 없습니다. 이쪽에서 공격적이 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습니다. (중략)
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나다움'이나 '성실한 자기표현'과 같은 얕은 환상에 휘둘리게 되는 것일까요? pp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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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적 기준에 비춰본다면 핵가족은 '불완전한 시스템'입니다. 본래 친족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필요한 요소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살인 사건의 대부분은 가정 내에서 일어납니다. 유아 학대도 거의 친부모가 저지릅니다. 그만큼 현재의 핵가족은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셸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가정이 살기 힘든 공간이 되어버린 시기는 근대 핵가족 이후라고 합니다. pp229
이제는 집이 폐쇄적이 되어가고 학교도 닫힌 공간이 되면서 어디를 가든 비좁아졌습니다. 초등학교 등에서 집단 따돌림이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는 학교가 비좁기 때문입니다. 교실이 '공용' 공간이 아니라 공기가 흙탕물처럼 고여 있는, 농밀한 '사적' 공간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자기 집에 있을 때와 똑같이 거침없는 말투를 쓰고, 사생활에서도 똑같은 매너로 행동합니다. 공사를 구분하여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제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편이 '환기가 잘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pp236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이란 모두가 노골적으로 에고를 드러내고 속마음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가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욕망을 자제하며 내면을 감추고 가정 안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구성원이 '가정 밖에서 맺는 가족 외의 인간관계' 속 활동을 지지하는 곳이 올바른 '치유'의 장으로서의 가정입니다.
내가 '자립하라'고 대학생들에게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든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생활이 멋있다든가 하는 얄팍한 교훈을 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립할 수 있는 사람,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따뜻한 가정, 친숙함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이 곁에 있을 때의 온기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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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거품경제 시절 앞뒤 따지지 않고 대출을 받거나 티파니 매장 앞에서 줄을 서는 '타자지향적인' 사람, 즉 '옆 사람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싶은' 타입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사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는 사회, 그리고 원하는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자본주의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pp257
예전에 미국 중서부의 고등학교에서 검은 우비를 입은 고등학생이 교실에서 산탄총을 난사해 교사와 급우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바스켓볼 다이어리'에 등장하는 꿈속 장면을 흉내낸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범인은 영화를 보고 '자신이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발견했습니다. 이렇듯 타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본 후에야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을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총을 난사해서 급우들을 학살할 정도로 '유니크'한 이 소년은 디카프리오의 흉내를 내는 것밖에 '자신의 유니크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그 정도까지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생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사할 '타인'의 모델을 정해놓고 '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의 흉내는 내지 않기'로 구속하지 않으면 어느새 인간 사회는 '서로 판박이'가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모순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사는 편이 낫다고 봅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습을 다양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은 자유롭지 않은 편이 낫다'고도 생각합니다. 무심코 자유롭게 놓아주면 모두 똑같아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까다로운 이야기지만, 핵심은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pp26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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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 우치다 타츠루 ㅡ 자기 안의 타자와 공생하는 능력이 이웃 사랑으로 이
## 인간의 적성이나 능력이나 소명은 노동하는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실재하는 객관적인 소산'을 이 세상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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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우치다 타츠루 ㅡ 배움은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는 과정이다
배우려고도 일하려고도 하지 않는 일본의 니트 족(70만으로 추산한다고 한다)을 중심으로 그들을 양산하게 된 사회/경제/문화적 배경을 사회학적 측면에서 섬세하게 파헤친 책이다. 학업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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