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도보여행13

한 해 마지막 날, 서귀포엔 눈발이 날리고 - 제주올레 6코스 마라도를 떠나 서귀포로 넘어오니 날씨가 한결 따뜻했다. 서귀포와 고산 지역은 체감 온도가 5도는 난다고 들었다. 그래서 서귀포 사람들이 느릿느릿하단다. 이 작은 섬에서도 이런 기질적 차이가 있다는 게 재미있다. 제주에서 가장 온화한 기후를 자랑하는 서귀포는 그래서 눈 구경하기도 어렵다. 밤에 한라산에 갈 예정이라 낮에 올레 6코스길을 쉬엄쉬엄 걷기로 했다. 6코스 시작점 쇠소깍으로 가지 않고 그냥 숙소가 있는 보목리에서 출발했다. 바닷길, 겨울인데도 꽃이 만발한 마을길, 아름드리 숲길을 지났다. 올레길에는 코스마다 길동무가 있다. 1코스는 성산일출봉, 7코스는 범섬, 10코스는 형제섬을 내내 바라보며 길을 간다. 몇 시간 동안 함께 걷다보면 진짜 친구가 된 기분이다. 6코스의 길동무는 섶섬, 문섬, 그리.. 2010. 2. 7.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닷길 - 제주올레 12코스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로 구분된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코스, 서귀포에서 중문, 송악산까지의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올레 11코스부터는 서부 지역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서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코스 길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예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 2010. 1. 16.
산 자를 위한 밭과 죽은 이의 무덤이 함께 - 제주올레 12코스 생태학교를 나서서 12코스로 출발했다. 어깨가 조금 무겁다. 봄가을에는 배낭을 매고 다녀도 별 문제 없었는데 겨울짐은 꽤 무겁다. 생태학교에 그냥 짐을 두고, 거기서 하루 더 묵을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잔치도 구경하고. 내가 무릉리에 도착한 날은 그곳 무릉리와 그 옆 도원리가 ‘무릉도원’이라는 컨셉으로 정부 지원 무슨 관광 사업에 선정된 날이라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오늘 밤 돼지 두 마리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고기 꼭 먹고 가라고 주위에서 권했는데, 밤새 벌어질 잔치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다. 촌장님 말씀으론 내년 봄에 12코스에 오면 온 동네가 복숭아꽃으로 가들할 거라고 한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기예보가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날씨는 맑다. .. 2010. 1. 15.
비밀의 숲, 곶자왈 - 제주올레 11코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새 눈으로 바뀐다. 이런 날씨에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레 11코스 곶자왈 입구, 신평리에 내렸다. 당분간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 곶자왈 입구 편의점에서 라면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청년이 자신이 시킨 김밥을 절반 잘라 준다. 사양해도 계속 권해서 감사히 먹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눈보라가 그새 물러나고 햇볕이 환하다. 연말은 대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올해(아니 작년)엔 왠지 일출을 꼭 보고 싶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마라도였다. 먼 길 운전할 필요 없이 바로 앞에서 한 해의 지는 해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곳. 인파로 붐비지도 않을 테고. 새해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 2010. 1. 13.
역사를 초월한 진리는 없다 - 제주올레 11코스, 정난주 마리아묘에서 모슬봉을 내려와 길은 다시 마을과 마을, 밭과 밭 사이로 한참을 이어진다. 그 길 끝에 정난주 마리아묘가 나타났다. 십년 전쯤 제주 성지순례 때 와본 적이 있다. 그땐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몇 시간걸은 끝에 지친 다리로 도착하니, 글귀 하나 하나가 마음에 스며든다. 그 몇 시간의 걸음이 내 귀를 열어준 것 같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그래서 순례가 필요한 걸까.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의 아내다. 그녀의 어머니는 신앙의 선조 이벽의 누이였고 정약용 형제들이 그녀의 숙부였다. 신유박해 때 남편 황사영이 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황사영 백서의 내용이 과연 정당한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1801년 정 마리아는 두 살 난 어린 아들과 함께 귀양길에 오른다. 그녀는 제주도에, 아.. 2010. 1. 8.
섯알오름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늘 - 제주올레 11코스 세월이 흘러도, 시간이 지나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폭력의 흔적이다. 그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은 홀로코스트, 대학살. 수십만을 죽음으로 몰고간 킬링필드, 나찌의 육백만 유태인 학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죽게 한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다만 조직의 명령에 아무 생각 없이 복종했을 뿐. 제주올레 11코스는 제주민의 삶과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들판 사이를 두 시간쯤 정처없이 걷다가 만난 양민 학살의 현장 '섯알오름'은 충격이었다. 4. 3 항쟁의 비극도 알고 있고 이승만 정권 때의 보도연맹 사건 등을 알고 있었지만,.. 2010. 1. 8.
존재는 가슴으로 말한다 - 제주올레 8코스  자연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는다. 그것을 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흘려보내고 또 새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비도 바람도 한겨울 추위도 자연의 피부에 흔적을 남길 뿐, 자연은 고통을 자기 안에 쌓아두지 않는다. 그들 존재의 중심은 언제나 변함없는 생명력일 뿐... 그들에게도 기억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피부에 쌓이는 주름일 뿐... 우리의 모든 경험도 우리 피부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피부에 켜켜이 지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발레리는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닐까. 피부야말로 가장 깊은 것이다... 라고. 피부 아래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오직 있는 것은 그 모든 지층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슴이다. 하늘만큼 넓은 가슴, 빈 가슴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 가슴은 언제나 .. 2009. 6. 8.
세계와 나 - 제주올레 8코스 제주올레 8코스, 주상절리 직전의 빈 해변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다. 이 바닷가의 바위들은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여기 있었으리라. 그 숱한 바람과 파도 끝에 이렇게 부드럽고 둥글어졌다. 속은 단단하면서도 겉은 둥글다. 세계와 나의 관계. 나 역시 이 바윗돌의 하나. 이들보다 더 짧은 생을 살아가는 모래알 하나이다. 이름없는 모래알...... 나는 내가 이 세계 속의 작은 모래알이라는 것에 만족한다. 모래알은 세계를 그 안에 품고 있고 바다의 향취와 느낌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5. 10.
어둠, 침묵, 신비에 잠겨드는 길 - 제주올레 8코스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너무 애썼구나.” 7~8년만에 나를 본 수녀님의 첫마디였다. 그 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사오년 전. 당시 삶에 지치고 방향감 상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낼 즈음, 학창 시절 멘토셨던 마리아 수녀님을 뵈었다. 그 분의 이 한 마디가 마음에 남았고 그 후로도 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 즈음 나는 내가 잃은 것이 충만한 관계와 사랑과 젊은 감각과 목적 의식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잃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것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어둠이 사라졌고 그와 함께 신비도 사라졌다. 내 영혼의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닐 것이므로 다만 어둠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둠이 사라지면서 수용하는 능력, 신비, 직관, 예술 이런 것들도 함께.. 2009. 5. 10.
홀로 걷는 즐거움 - 제주올레 7코스 -> 외돌개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온전히 열리고 우리 자신이 되는 그런 만남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나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관계. 자연 속을 걸을 때 나는 그런 관계에 가장 근접하게 되는 것 같다. 소로우는 하루 4시간 이상 걷지 않고는 삶을 삶답게 유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뭐 철학자도 아니고 평범한 직딩에 불과한지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홀로 걷는 시간을 삶에서 빼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종일 걷고 싶다. 그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형태이고 사람과 늘상 부대끼는 일을 하는 사람에겐 더욱 필요한 것.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 2009. 5. 2.
그대 마음 잿빛일 때는 - 제주올레 7코스 제주 올레 7코스는 외돌개의 청색 물빛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 앞에서 마음이 꽃잎처럼 스르르 열리고 평온해지고 깊어지고 한결 부드러워지고 그러면서도 존재의 중심이 굳건해지는.. 그것이 자연이 지닌 힘 우리 영혼도 여기서는 푸름이 된다. 걸은 날. 2009. 3. 21. 2009. 4. 27.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포의 절경 - 제주올레 1코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걸어서 만나는 세상에 중독되고 나면 차나 기차 등 탈 것에 앉아서 스쳐가며 바라본 그 어떤 풍경도 우리 마음에 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두 발로 걸을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일부가 되고, 우리 역시 그 세계의 일부가 된다. 두 발로 걷는 순간, 다리와 팔과 눈과 귀와 피부가 활동하기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입자들이 살 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피상적이던 우리의 존재감이 커지고 우리는 이 세계 안에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세계를 느끼기를 원한다. 2월 15일, 제주 올레 1코스를 걸었다. 제주 여행은 세 번째지만 그 속살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대지와 바다를.. 2009. 2. 23.
제주걷기여행 - 서명숙 제주걷기여행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서명숙 (북하우스, 2008년) 상세보기 제주에 만들어진 200km 도보여행길 23년간의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걸은 여자, 오랜 직장 생활과 도시 생활 끝에 만신창이가 된 몸은 걸으면서 걷기가 가져다주는 느림과 평화로움,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에 의해 치유된다. 돌아와서 그녀는 제주에 도보여행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제주는 그녀가 오래 전에 떠나왔던 고향. 산티아고길을 걷는 내내 그녀는 고향 제주의 풍광을 마음속에 떠올렸다고 한다. 1구간부터 만들기 시작한 길은 이제 11구간 200km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저자와 동료들의 꿈은 제주를 관통하는 800km의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책에는 7구간까지 설명되어 있다. 제주가 여전히 간직.. 2008.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