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로 구분된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코스, 서귀포에서 중문, 송악산까지의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올레 11코스부터는 서부 지역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서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코스 길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예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지역이고 그래서 제주민의 삶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거든요. 알뜨르 비행장에서부터 섯알오름, 모슬봉을 지나는 길 곳곳에 일제 때 전쟁 기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또한 4. 3 항쟁의 흔적 남아 있는 역사의 땅이기도,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 다른 곳엔 많지 않아요. 또 해안이 아닌 제주 내륙의 모습을 만날 수 있고요."
그랬다. 12코스는 다소 지루했지만 그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풍광을 본다기보다는 그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길. 사실 모든 도보여행이 그런 게 아닐까. 처음엔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지만 길을 계속할수록 우리를 사로잡는 건, 이 세상 위에서 씩씩한 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끝없는 들판 사이를 걷다 보면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상념이 끊어지면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가슴에 차오르는 때. 풍경이 남달라서도 아니고, 이 길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냥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 마라토너들이 말하는 러너스 하이가 이와 비슷한 느낌일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짐을 맨 어깨는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다.
오전내 밭과 마을 사이로 요리조리 나 있던 올레길은 신도 도구리길을 시작으로 바닷길에 접어들었다. 거기서부터 수월봉까지가 가장 힘들었다. 새로 산 등산화까지 말썽을 일으킨다. 5년째 신던 등산화가 밑창이 떨어져서 새로 장만했는데, 살짝 안 맞는지 왼쪽 발목이 아파온다. 언제쯤 끝나나 하고 있을 무렵, 큰 선물을 받았다. 당산봉 지나 접어든 생이기정 바닷길, 내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놀라 입을 다물 수 없다.
바닷가 높다란 절벽을 따라가며 보는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종일 걸은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만큼. 풀숲 사잇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겨울이라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강인하고 억센 자세로 언덕을 점령하고 있는 풀들, 제주 곳곳에서 마주치는 이 메마른 풀들이 지닌 생명력은 실로 놀랍다. 바람이 이들을 이처럼 생생하게 만들었겠지.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서쪽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섬, 차귀도는 진정 12코스의 백미였다. 고생 끝이어서 그랬을까? 이 지극히 맑고 깨끗한 바다가 눈물 날 만큼의 감동을 선사한다.
원래 차귀도 일대가 일몰로 유명하다고 한다. 구름이 많아서 일몰은 보지 못했다. 섬에 얽힌 전설도 재미있다. 중국 관리가 제주의 혈맥을 끊고 돌아가는 길에 차귀도 일대에서 풍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섬, 차귀도이다. (그 앞 매바위에도 무슨 전설이 있었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생이기정 바닷길을 지나면 12코스의 종점, 용수 포구에 닿는다. 용수 포구에는 '절부암'이 있었다. 배 타고 나간 남편이 실종되고 시신조차 못 찾자 아내가 목을 메고 죽었는데, 그 자리 바로 앞바다에서 며칠 뒤 남편의 시신이 떠올랐다는 곳. 여행지가 아닌,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바다는 때로 너무 가혹하다.
용수 포구에서 기대치 못한 한 가지 선물을 더 받았다. 김대건 신부 성지다. 김대건 신부가 탔던 배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향하던 중에 잠시 제주에 표류했는데, 그곳이 용수 포구라 한다. 성당과 기념관 건물이 그다지 멋스럽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그의 자취가 이곳 제주에도 있다니 놀라웠다.
시대의 바람이 그를 격랑의 한가운데로 떠밀었다. 마카오에서 북만주에 이르기까지 진리를 찾아 떠났던 먼 길,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물 몇 살의 꽃 같은 나이에 기쁘게, 후회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굳건한 신념 때문이겠지만, 그가 자신의 시간을 그 누구보다 꽉 채워서,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활활 태우며 살았기에 그러했지 않을까. 실컷, 맘껏, 자신의 모든 것, 재능과 노력과 사랑을 다 쓰고 가는 삶, 주어진 모든 것을 펼쳐내는 삶, 그래서 아무 미련도 아쉬움도 없는 삶.
자연이 그러하듯이. 이 바다가 세상 그 무엇보다 푸르고, 이 풀들이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듯이. 그렇게 자기를 이 지상에 아낌없이 풀어놓고 가듯이.
*걸은 날. 2009. 12. 29.
-> 김대건 신부 기념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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