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나서 미사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학기말 업무로 바빠 퇴근 시간 넘겨까지 일한 탓이다. 그럼에도 몇몇 말들이 귓전을 스치면서 잠을 깨웠다. '인류의 애인, 예수'라는 말이 그러했다. 인류의 애인, 예수...
갈리리 변방 출신 촌놈. 가난한 목수의 아들.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름. 요즘으로 치면 마리아는 미혼모가 될 뻔함. 세리, 창녀 등 하층민들과 주로 어울려 다님. 제자들도 시원찮아서 생전에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없었으며 죽은 후 누가 왕 자리를 차지할까 싸우기도 함. 몇몇 여자들이 그를 지극히 사랑한 것으로 보임. 그리스도교는 지식인 바오로(바울)의 힘으로 세워졌다고 볼 수 있음. 예루살렘에 간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음. 이상한 무리를 끌고 다니며 율법에 반하는 소리를 한다며 찍힘. 예수의 주변에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힘있는 권력자가 하나도 없었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당함. 사후 그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하나둘 생김....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전도여행을 시작함. 생전에 예수는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고도 함. 그리고 독특한 짦은 생애와 함께 당시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뛰어난 메시지를 남김. '산상수훈'이 대표적임.
이런 삶, 이런 가르침이 인류의 가장 뛰어난 자질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이러한 삶과 가르침이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이것이야말로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세태를 생각해본다면.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은 문명 사회에도 어전히 동물적 법칙을 따르며(서열 매기기 등), 개인이 제도와 조직을 이길 수 없는 구조가 점점 강고해지고 있으며, 자본이 국가조차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시대, 다수의 사람들이 자본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지 이미 오래되었고, 세계 각국의 대의민주주의 역시 위기를 맞고 있으며, 환경, 기아 문제는 해결책이 안 보이는 이런 시대에, 예수의 가르침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의 가르침은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한 세례자 요한의 뒤를 잇는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는 요한의 회개보다 기쁨이 더 강조된다. 기뻐하여라,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 그 나라는 저기, 저 세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 있으므로 기뻐하여라. 산상수훈은 줄곧 '기뻐하여라'라고 시작된다. (한영 번역 모두 '행복하다- Happy are those who...'로 시작되는데 '기뻐하여라'가 더 좋은 것 같다. 복음 자체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므로. 그리스역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1. 기뻐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2. 기뻐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3. 기뻐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4. 기뻐하여라,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5. 기뻐하여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6. 기뻐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7. 기뻐하여라,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8. 기뻐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 나라가 지금, 여기에 있게 하는 길이 산상수훈에서는 여덟 가지로 제시된다. 불교의 팔정도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것은 1) 빈 마음, 2) 세상의 슬픔을 아는 마음, 3) 부드럽고 관대한 마음, 4) 옳은 일에 목말라 하는 마음, 6) 진리를 보는 맑고 깨끗한 마음, 5) 약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실천, 7) 평화를 위한 실천, 8)정의를 위한 실천, 여덟 가지이다. 그 첫 대목이 비어 있는(가난한)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이며, 중간에 있는 것이 온유하고 깨끗하고 진리를 목말라 하는 마음이며, 마지막에 있는 것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실천이다.
요즘 기독교는 '기뻐하여라/행복하여라'만 하고, 그 뒤에 있는 것들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기뻐하여라'만 할 때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마약이 된다. 불교나 기타 명상도 마찬가지. 내적 평화만을 추구하고 세상과의 연결을 놓칠 때 갈 길을 잃고 만다. 요즘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도.
산상수훈은 여덟 가지의 실천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실천이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기쁨이 있는 아름다운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진복팔단,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이라고도 불린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거친 삶의 조건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여덟 가지 길. 과연 가능할까.
사람들은 역사에서 희망을 발견한다고 하지만, 역사에서 그보다 더 큰 절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선의를 가지고 뛰어들었던 사람들의 노고의 열매는 대부분 엉뚱한 이들에게 돌아갔으며, 권력은 언제나 이익을 탐하는 자들에게 쉽게 주어졌다. 그들이 그것을 끈질기게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고 개인의 삶은 짧고 한정되어 있는지라 자기 삶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역사의 편을 들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 싸움의 과정에서 개인이 상처입고 부서져버리기 때문이다.그 개인의 삶을 망가뜨려가면서 얻은 결과가 초라할 때, 그렇게 얻은 것이 얼마나 가치를 지니는지 의심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가 구조적/제도적 악이며 이는 개인이 바꾸기도 어렵고 바꾸기 위해서는 개인의 희생이 따른다. 그런데 지금처럼 개인의 생존과 자유가 가장 큰 욕망이 되고 있는 시대에 그것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벙법이 아니고 또 권할 방법도 아니다. 지금은 희생의 가치가 무시되는 시대이고, 그것이 기독교가 그토록 천박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의 희생이므로. 또한 희생의 의미가 오해되어 변질되고 타락한 사랑에 대한 변호로 쓰일 때 그 길은 아름답지 않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지배하는 길이므로.
몇몇 철학자들은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구조 속에서 작은 해방구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구조도 의외로 허술하며, 작은 구멍에 의해 댐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아니, 댐이 무너지건 말건 뜻이 맞는 이들끼리 신나게 놀 수 있는 삶의 자리를 만들라고. 세상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가 통하는 해방구들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삶의 역량을 키워나가라고. 그렇게 시작해보라고.
박홍규 선생은 '절제의 사회(일리히)' 해제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가장 철없는 소리를 했던 예수와 붓다는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이해 가지 않는다고 썼다. 예수와 붓다의 가르침은 지난 이천년간 실현되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영영 그러할 것이라고. 이분들의 가르침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가치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 도착할 수 없으므로 끝없이 갈 수 있는 길, 끝없이 가고 싶은 길로 존재하는 건지도 모른다. 산상수훈은 도착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길을 걷는 도중에 참 행복할 것이라고, 그 길 자체가, 길을 만드는 것 자체가 하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길 위에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도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걸으면서 기뻐할 수 있다면 이미 도착한 것이라고.
내가 일백 퍼센트 그리스도교도인 적은 없었구나 했다. 방향 전환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것은 삶의 기쁨/행복의 조건을 꼼꼼하고 냉철하게 성찰하는 데서 시작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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