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초반의 집중도에 비해 후반이 흡입력이 약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시대인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근현대사에 관한 다양한 질문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데, 일제 강점기의 중학교 교실에서 시작해 일본 유학, 징용 거부, 해방 정국, 6.25 동란, 빨치산 투쟁의 와중에 주인공들이 자기 시대를 고민하고 시대와 맞서 싸우고 결국 시대의 파고에 휩쓸려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보여주고 있다. 작중 인물 대부분은 실존 인물로 저자의 지인이라고 한다.
저자는 공산당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공산주의를 '분열'의 사상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이 공산당을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죽어간 현실에 대해 비통해하고 있었다. 언론인에서 출발했던 저자의 삶의 행적을 보면 박정희 시절 투옥되기도 하고, 이념 대결 자체에 회의를 느낀 휴머니스트로서 '보수 우익'의 틀에 넣을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그의 분노는 그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던 이들의 '죽음'을 향해 있었고, 그는 그 죽음의 가장 큰 책임이 남로당을 숙청한 김일성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작중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서 주인공의 한 명인 이규에게 십년만 나라를 떠나서 외국에 살다 오라는 조언을 한다. 작가는 이들이 시대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해서 장래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를 장래에 희망했던 것이다.
빨치산과 국군 모두를 포함하여 무려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리산에서 죽어간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경남 하동 출신으로 자신의 가장 똑똑했던 친구들의 죽음과 죄없는 민초들의 무수한 죽음을 직접 목격했던 저자의 비통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는 그 죽음의 가장 큰 책임을 빨치산 투쟁을 장려한 북한에게 있다고 보았다. 북한이 그들을 체제 강화의 도구로 썼다는 점에서 저자가 느낀 애통함에 일면 동의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무능이나 복잡한 국제 정세에 대한 충분한 시각이 소설에 결여되어 있어서 아쉬움도 있었다.
저자는 공산당의 문제를 공산주의 사상 그 자체가 아니라 공산당 내부 조직의 운영 방식의 문제라고 보고 있다. 당의 강령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우선될 때,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한 감시 체제와 숙청이 따라올 수밖에 없고, 이러한 감시와 숙청 없이는 내부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에는 좌익 활동에 투신한 엘리트들, 특히 박태영이 공산당에 헌신했다가 회의를 품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한 시대의 진실에 다가간다는 점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문제 의식에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저자가 이현상과 박헌영의 인격을 지나치게 저열하게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 관점을 열어놓고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 싶었다.
'허망한 정열'. 지리산에서 벌어진 그 무수한 죽음이 지나고 저자가 그 세월을 평가한 말이다. 그 시간이 다 지난 지금 우리는 이념을 위해 싸웠던 그들의 정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저자가 말하듯이 허망한 것일까. 그 젊은이들의 정열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을 그저 역사의 희생자일 뿐이었을까.
대다수 민초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지만, 사회주의에 동조한 많은 이들에게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세우고 싶은 나라에 관한 꿈.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들이 고대하는 나라에 대한 꿈. 생존 빨치산 중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북한의 정당성이 아니라 그들이 애초에 품었던 꿈의 정당성을 주장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그들이 권력 투쟁의 도구로 이용되고 말았을지라도 애초에 그들이 품었던 꿈조차 비루했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일제하 강제 징용을 거부했던 젊은이들이,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는 지금의 북한도 남한도 아닐 것 같다. 김구 선생이 공산당 독재도, 자본의 독재도 둘 다 원치 않는다고 했던 것처럼. 광복 60년. 해방 정국의 이념 논쟁이 그때보다 더욱 유치한 형태로 부활하여 반복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6. 25 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이 체제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하는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 물음이 없다면, 지금껏 이룬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 토론이 시작될 때 우리의 좁은 시야가 넓어지고 막혀 있던 꿈들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을 역사에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결말은 좀 아쉽다. 최인훈의 '광장'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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