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때 특별한 호기심이 없어도 꼭 들르는 곳이 있다. 국립박물관이다. 내 배경지식이 충분치 않아 관람이 다소 지루할 때도 많다. 하지만 어떤 박물관에서든 예상치 못한 뜻밖의 발견을 한두 가지는 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규슈박물관에서도 그랬다. 규슈박물관은 후쿠오카 여행 중 다자이후 텐만구에 들렀을 때 보았다.
입장권을 끊고 관람을 시작하려는 찰나 한 일본 아주머니가 한국말로 말을 건다. 흰 머리를 곱게 쓸어 넘긴 단발머리에 오십대는 족히 되어 보였다. 살짝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어 그 연세에도 소녀 같은 분위기를 전해주는 분이었다. 자원봉사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1층을 자기가 안내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우리는 기꺼이 승락했다. 그 분은(이름을 잊었다ㅜㅜ) 한국말에 관심이 있어 10년 정도 혼자 배워왔다고 한다. 일상에서 한국말을 쓸 기회가 많지 않아 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게 되었단다.
우리는 박물관 모형 앞에서 박물관의 건축 방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규슈박물관은 친환경적으로 세심하게 설계된 집이라 건축물로서도 한번쯤 볼 가치가 있었다. 한 20분 정도 한국말로 설명을 들었고, 2층부터는 우리끼리 돌아보았다. 그분과 인사하고 헤어지고 나서야 이메일 주소를 교환할 걸 하는 생각이 났다. 한국말에 관심이 많은 분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규슈박물관의 2층 전시실에는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의 유물을 모아 놓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게 없어서 슥 나가려고 하는 찰나에 친구가 옷소매를 잡아 끈다. 저것 좀 보라고. 건물 2~3층 높이 정도 되는 굉장히 큰 탁본이었다. 알고보니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이었다. 나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이렇게 큰 줄 몰랐기에(국립중앙박물관에도 있다고 하는데 못 보고 놓친 것 같다) 깜짝 놀랐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어떠했는지 이것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탁본은 원래 일본 나가사카 현립 나가시카니시고등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이었다. 국내에 10개 정도밖에 없는 귀한 탁본을 일개 고등학교가 갖고 있었다니 조금 씁슬한 마음도 들었다.
박물관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오키노시마'라는 섬에 관한 내용이다. 오키노시마에서 출토된 유물 몇 점이 박물관 한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곡옥이 붙은 금관과 장신구들은 딱 봐도 친숙했고 신라시대 것임이 표가 났다. 오키노시마는 대마도와 일본 본토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이라 한다. 4세기에서 9세기까지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바쳐져 '신이 머무는 섬'이라고 불리고 지금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란다. 이곳에서 최근 고대 가야와 신라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었고 관련 연구가 진행중이라 한다. 잘은 모르지만, 한반도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였던 규슈인들은 그 길의 초입에 있는 오키노시마를 신성시여겼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도 해보았다. 한일 양국간 고대 문화 교류의 비밀 한 자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오키노시마였다.
2017/4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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