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33분의 면모를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어 국어 선생으로서 매우 부끄러웠고, 이 책을 펴낸 저자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2014년 출간된 책인데, 저자는 근대사 전공으로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를 주로 연구하는 분이다. 그간 나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이윤재, 한징 두 분이 옥사하신 것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책에서 소략하게나마 33분이 그 시대를 어떻게 헤쳐갔는지를 알게 되어 가슴이 찡했다.
이 분들 중에서 저자의 노력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 국가유공자에 선정된 분도 있고, 아직도 오르지 못한 분도 있었다. 특히 감옥에서 옥사한 이윤재 선생의 경우 대구 출신으로 묘소가 달성군 다사읍에 방치도어 있다가 저자의 노력으로 2013년 묘소가 대전국립현충원에 이장되었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대부분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1970년대 세상을 떴지만 조선어학회 회원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석린 선생은 1999년까지 생존하셨는데, 대학 다닐 때도 전혀 몰랐다니, 우리 언론이 이 부분에 대해 너무 조명을 안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타인의 것을 베끼기에 골몰하면서 정작 우리 공동체가 가진 소중한 자산을 너무 돌보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두 분을 제외하고 모두 변절하였는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뜨거운 신념 때문이었는지, 다수의 친일 글을 남겨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가 한 명이며(이석린),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 협력하여 비판 받는 이가 한 명(이은상)이었다. 오히려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도 줄곧 옥살이를 한 분이 계셨다(서민호). 2대 간사장 신명균 선생은 1940년 창씨개명을 앞두고 자결하였다(그래서 1942년 구속된 33인은 아니다). 학회 회원 중 몇 명은 6. 25 때 강제납북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수장이라 할 이극로 선생처럼 민족주의자였으나 여운형 선생 암살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북으로 넘어간 분도 있었다. 식민지 시대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연구하고 살리기 위해 애쓴 연구자들, 기부금을 후원한 이들 등 수많은 분들의 노력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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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먼 길을 돌아 2013년 9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서거하신지 70주년이 지나 제자리를 잡았다. (...) 일제강점기인 1933년 경신학교 교원 시절에, 이윤재 선생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고 말한 글이 묘비의 전면에 새겨져 있었다. 필자는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뻔 하였다. p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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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는 우리 국민이 문자생활에서 국한문을 혼용해서는 안 되고 한글 전용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66년경에 그는 텔레비전 공개 토론에서 "한글 전용 사용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한글이 있으므로 한국은 세계에서 10대 강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21세기 초 노무현 정권 때 한국은 10대 강국이 되었다. p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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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사건 당사자들의 회고하는 글에 의거하였다. 최현배는 이 사건을 일제가 죄명을 지어놓고 거기에다 맞도록 죄상을 꾸며대는 것이었다. 사실에 없는 것을 토하게 하려고 고문을 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이희승은 이 사건은 일제의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이루어졌고, 허구의 범법사건이엇다.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치안유지법 제1조로 얽어매는 것이었다라고 기술하였다. 정인승은 이 사건을 정태진의 자백서와 일치되도록 억지 조작하여 탄압한 사건으로 기술하였다.
회고록에 바탕을 둔 연구는 이 사건을 일제의 조작과 날조 때문에 조선어학회 인사들이 탄압받은 사건으로만 인식하게 하였다. 동시에 일제의 잔학상과 조선어학회 회원의 수난상만 부각시켰다. 그러다보니 이 사건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사건을 일으킨 일제의 의도나 조선어학회를 주도해간 이극로에 대해 분석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일제의 최종 판결문에 대해 심도 있게 검토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일제의 판결문과 학회의 대표자인 이극로가 남긴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일제의 재판부는 1945년 8월 13일에 이극로 등이 조선독립을 열망하고 극히 농후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자이고, 조선어학회의 어문운동이 10여 년간 극히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기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가장 많이 고뭉르 당한 이극로는 일제가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고 기술하지 않고, 조선말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 때문에 이 사건을 일으켜 탄압할 수밖에 업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자신들이 전개한 한글 운동이 '조선 독립운동의 근본'이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윤재도 청년들에게 ㅎ아상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 운동이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한글운동은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해방 뒤 김병제도 이 사건으로 일제로부터 조선어학회가 탄압을 받게 된 것은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영웅적으로 민족적 반항 운동을 해온 증좌라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일제의 조선어학회 어문운동 인식과 이극로의 한글운동 인식이 상당히 일치하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에 대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려고 하는 민족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판단하고 있었고, 조선어학회도 민족주의자들의 집단체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운동을 통해 우리 말글을 연구, 정리, 보존하고,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어학회가 일본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집요하게 조선어학회의 언어투쟁에 대해 분석하였고, 가혹한 탄압과 처벌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어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pp277-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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