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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일본

도시샤대학에서 만난 두 개의 비석 / 교토에서 만난 윤동주

by 릴라~ 2018. 5. 26.

교토는 내가 이미지로 아는 일본과 실제 일본이 다르다는 사실을 낱낱이 깨우쳐준 곳입니다. 교토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은 일본이 한반도 도래인이 전한 문명의 씨앗을 그냥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꽃피웠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금각사, 은각사, 청수사, 용안사, 천룡사 등 유명 사찰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어 나는 가는 곳마다 찬탄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이룬 그 모든 문화적 성취보다 내게 더 깊고 뜨거운 감정을 불러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도시샤대학에서 만난 작은 시비였어요. 

고목이 있는 곳은 그 장소가 오래되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도시샤대학 가는 길도 그랬습니다. 일왕의 처소였던 교토고쇼 근처에 있는 도시샤대학 근처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많았습니다. 도시샤대학은 아담한 규모지만 메이지 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학교입니다. 후문에서 시비가 있는 정문 근처까지 가는 동안 붉은 벽돌로 지어진 메이지 시대 건물을 몇 채 보았습니다. 정문 근처에는 미션스쿨이어서 예배당이 있었고 그 옆에 아름드리 고목을 지나자 내가 찾던 시비가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입니다. 

1917년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용정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수학한 윤동주 시인은 1942년 도쿄 릿쿄대(영문과)에 유학을 왔다가 태평양전쟁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이곳 교토 도시샤대학에 편입합니다. 시인이 이 교정을 거닌 시간은 길지 못했습니다. 9개월 후 '재교토 조선인 민족주의 학생 그룹' 사건으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5년 3월, 2년의 형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맙니다. 

교토 거리를 거닐다가 나는 문득 윤동주 시인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아마도 교토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서 시인의 시대와 더 가까운 느낌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별 헤는 밤'은 시인이 일본 유학을 며칠 앞두고 서울에서 쓴 시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얼마나 많은 상념이 몰려왔을까요. 가을밤, 자신의 가슴에 밀려드는 온갖 그리움을 시인은 가을 하늘의 별 속에 펼쳐놓습니다. 북간도에 있는 동무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그리운 어머니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그리고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창씨개명을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그 언젠가를 그려봅니다. 문학을 꿈꾸었으나 시인이 마주한 것은 더이상 우리말조차 못 쓰는 현실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시대에 시인이 호명한 우리말 이름들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동시에 우리 마음을 아프게 수놓습니다.

교토가 아무리 근사하다 한들 왜색 가득한 이곳이 고향의 모든 것을 그토록 정겹게 추억했던 한 청년의 마음을 채워주었을 리 없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일 뿐이지요. 이 남의 나라의 화려한 근대화의 풍경에 홀려 영혼을 판 수많은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의 교토를 보아도 반할 만한 구석이 많은데, 한일간의 격차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당시는 더했겠지요. 오죽하면 여운형이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일본만 가면 친일파가 된다고 만류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고향의 "이 모든 이름들"을 소중히 마음에 담고 있던 시인은 일본의 문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곳과 대비되는 고국의 현실과 그가 헤쳐가야 할 세상을 생각하면서 더 깊은 고뇌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을 때와 교토에서 그를 생각하는 것은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식민지 청년이 느꼈던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 슬픔, 동경, 자기 반성 등 모든 감정이 한층 생생하게 가슴에 파고들면서 시인이 비록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감성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거라고 느꼈습니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던 시인은 황국신민이 될 수 없었지요. 그는 한 인간으로 서 있었고 자기 자신으로 충실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교토에서 만난 그 어떤 위대한 문화유산보다 시인과의 만남이 내게 더 뜻깊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비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보다 좀 더 오래 학교를 다닌 걸로 압니다. 시비에는 '압천'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는데, 압천은 교토를 흐르는 유명한 가모강을 말합니다. 시인은 자주 강변을 걸었나봅니다. "압천 십리벌에 해가 저물" 때마다 젊은 나그네의 시름도 깊어간다는 대목이 마음에 남아, 가모강을 지날 때마다 시인이 생각났습니다. 

교토에 와서, 우리에겐 우리의 역사와 혼을 담은 도시가 과연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라고 마땅히 내어놓을 대답을 당장에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우리에게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 그들이 남긴 시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크나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 2017/2, 2018/5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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