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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일본 '16~'18

지은원에서 청수사까지 / 교토 낙동 지역

by 릴라~ 2018. 5. 18.

도시 여행의 즐거움은 오래되고 개성이 있는 거리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빌딩숲은 한 번 보고 와~ 하면 끝이지만, 사람이 걸어가면서 눈을 맞출 수 있는 아기자기한 골목길은 우리 감성에 더 지속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교토가 바로 그런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교토에서 처음 걸은 곳은 지은원에서 청수사까지 '낙동' 지역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동산'의 산자락을 따라서 사찰과 마을이 자리잡은 동네였습니다. 마치 서울의 평창동이나 부암동처럼 산을 끼고 마을이 있어 새 소리가 들리고, 숲길을 산책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지은원은 '삼문'의 어마어마한 규모에서부터 놀랐습니다. 이처럼 웅장한 규모의 절집 대문이 우리 나라에는 없어서 놀라움이 컸습니다. 이렇게 큰 삼문을 가진 사찰이 교토에는 지은원을 비롯해서 세 곳이라고 합니다. 단층이 대부분인 우리 사찰과 달리 일본에는 복층 구조가 꽤 많았는데 삼문도 2층짜리 대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대웅전에 해당하는 본당인 어영당도 지은원에서 유명한 곳인데 수리 중이어서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고려 불화가 소장된 곳이라 합니다. 

지은원은 마루야마 공원과 붙어 있고 산자락을 따라 이름 모를 신사와 절이 계속 이어집니다. 별 멋은 없는 아주 큰 부처를 모신 신사도 있었는데 태평양전쟁 전사자를 봉양한 곳이었습니다. 신사를 지나 다시 언덕길로 접어들자 료젠 역사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를 기념하는 곳이라 한번 보기로 했습니다. 일본어로만 적혀 있고 영어로 된 안내문이 없어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사무라이들의 칼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칼이 료마를 암살한 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료마와 서너 명의 동료의 흉상이 있어 이 젊은이들이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지요. 우리로 치면 독립운동가들인 셈입니다. 서로 오랜 적이었던 영주들 사이를 중재하여 권력을 일왕에게 양도하는 '대정봉환'을 성사시켰으니 생각해보면 일본사에서는 대단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료마는 반대파에 의해 교토의 한 거리에서 암살됩니다. 

료젠 뮤지엄 뒷편에는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하여 에도 막부 말기 일본 지사들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일본에게나 영웅이지 일본의 성공이 우리에게는 식민지로 이어졌으므로 입장료를 내고 참배할 이유는 없어서 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글에선가 사카모토 료마가 꿈꾼 나라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방향이 전부 옳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일본도 조선과 똑같이 외세 앞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이었고 통일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 갈등을 정리하고 봉합하여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웃나라의 이 시기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바 료타료의 '료마가 간다'를 읽고 싶은데 워낙 길어서 아직 못 읽었네요. 

료젠 뮤지엄을 지나니 유명한 전통상가, 산넨 자카 거리가 나타났습니다. 그간 한적했던 길이 끝나고 길마다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청수사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상가 거리도 멋이 있지만 청수사 또한 명성이 아깝지 않은 명찰이었습니다. 가람 배치가 어느 정도 정형화된 우리 절과 달리 일본의 절은 절마다 많이 다른 느낌입니다. 청수사는 절벽에 높이 약 12미터의 거대한 나무 구조물을 설치하여 '청수의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교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건축물의 크기도 놀랍지만 그런 커다란 건물이 중압감을 주지 않고 장쾌한 맛을 내는 것이 일본 건축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청수의 무대를 지나 산길을 한 바퀴 도는 산책로도 좋았습니다.

지은원과 청수사는 단일 유적으로도 훌륭한 곳이지만 지은원에서 청수사까지 이어지는 언덕길이 더 좋았습니다. 반나절을 걸으며 일본 건축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보존하는 태도를 함께 느꼈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1962년, 중요 문화재뿐 아니라 그 주변의 보통 집들을 함께 보존하는 문화재법을 통과시킵니다. 각각의 문화재만 아니라 그 일대가 전부 보존될 때 그 문화재가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교토 또한 각각의 유적 뿐 아니라 시가지 전체가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 아시아의 다른 도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경주, 서울 북촌, 전주 한옥마을 등 많은 곳이 생각났고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었나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 길에서 만났던 한 남자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 하급무사이자 낭인이며 상인이었던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일본이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청년 료마가 꿈꾼 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지금의 일본은 그가 꿈꾼 나라에 근접했을까요. 그 대답을 알 수는 없었지만 교토를 걸으면서 나는 이 나라가 아시아 민중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전쟁을 벌이며 길을 에둘러 왔다 하더라도, 자신의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기반을 갖추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일본의 미래는 역설적이게도 과거사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본이라면, 과거사 연구에 개방적 태도를 가지고 주변국들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아시아의 리더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입니다. 독일이 과거사를 청산하고 유럽의 리더로 등장한 것처럼. 모든 걸 갖추고 있으면서도 독일의 길을 걷지 못하는 것이 지금 일본의 한계입니다. 



2017/2, 2018/5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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