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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11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생이기정 바닷길 - 제주올레 12코스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운데 두고 동쪽의 성산, 서쪽의 고산, 남쪽의 서귀포시, 북쪽의 제주시로 구분된다. 올레꾼들이 많이 찾는 길은 7~10코스, 서귀포에서 중문, 송악산까지의 남부 해안이다. 예쁘고 아기자기해서 인기가 많다. 올레 11코스부터는 서부 지역 '고산'에 해당되는데, 앞서 코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일단 이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다. 모슬포항을 벗어나면 식당 하나 찾기가 쉽지 않다. 밭은 끝없이 이어져 있고 풍경도 단조롭다. 그런데 11~12코스 길을 다 걷고 나니 이 일대의 다소 황량한 풍경이 마음에 남았다. 예쁜 남부 해안보다 이쪽이 이상하게 더 마음이 간다고 올레 쉼터지기에게 말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었다. "고산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곳이예요. 제주에서 개발이 가장 덜 된 .. 2010. 1. 16.
산 자를 위한 밭과 죽은 이의 무덤이 함께 - 제주올레 12코스 생태학교를 나서서 12코스로 출발했다. 어깨가 조금 무겁다. 봄가을에는 배낭을 매고 다녀도 별 문제 없었는데 겨울짐은 꽤 무겁다. 생태학교에 그냥 짐을 두고, 거기서 하루 더 묵을 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잔치도 구경하고. 내가 무릉리에 도착한 날은 그곳 무릉리와 그 옆 도원리가 ‘무릉도원’이라는 컨셉으로 정부 지원 무슨 관광 사업에 선정된 날이라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오늘 밤 돼지 두 마리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고기 꼭 먹고 가라고 주위에서 권했는데, 밤새 벌어질 잔치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짐을 챙겨 출발한 것이다. 촌장님 말씀으론 내년 봄에 12코스에 오면 온 동네가 복숭아꽃으로 가들할 거라고 한다.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기예보가 좋지 않았는데, 다행히 날씨는 맑다. .. 2010. 1. 15.
비밀의 숲, 곶자왈 - 제주올레 11코스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어느새 눈으로 바뀐다. 이런 날씨에 걸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올레 11코스 곶자왈 입구, 신평리에 내렸다. 당분간 식당이 없을 것 같아서 곶자왈 입구 편의점에서 라면을 시켰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뒤따라 들어온 한 청년이 자신이 시킨 김밥을 절반 잘라 준다. 사양해도 계속 권해서 감사히 먹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눈보라가 그새 물러나고 햇볕이 환하다. 연말은 대개 조용히 보내는 편인데 올해(아니 작년)엔 왠지 일출을 꼭 보고 싶었다. 애초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마라도였다. 먼 길 운전할 필요 없이 바로 앞에서 한 해의 지는 해와 새로 떠오르는 해를 한꺼번에 맞이할 수 있는 곳. 인파로 붐비지도 않을 테고. 새해까지는 며칠 여유가 있.. 2010. 1. 13.
송악산에 오르며 - 제주올레 10코스 송악산은 화산 폭발로 생긴 104미터의 나즈막한 오름입니다. 높진 않아도 반도처럼 솟아서 동쪽 남쪽 서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동으로는 산방산과 형제섬, 남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송악산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그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저 역시 한참을 머물었답니다. 한 잔 술이 없어도, 바다에 취하고, 바람에 취하고, 해지는 쪽으로 무리지어 핀 야생 들국화에 취하고, 지는 햇살에 취하고, 이 모든 세계 앞에서 말없이 감동하게 되는 곳. 그래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끝이 없습니다. 수만년 전 폭발한 작은 분화구는 지금도 야생의 꿈틀거림을 간직한 채 바다를 향해 의연히 서 있었습니다. ... 그대가 만일 이곳에 온다면, 동서남북 거침없이 불어오는 바람과 이 드넓은 세계 속에서, 절.. 2009. 11. 29.
우리는 '바다'로 간다 - 제주올레 10코스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한 적은 별로 없다. 차를 몰며 가끔 이 길 끝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거나, 갑갑할 때 바다를 떠올린 적은 있지만, 그것은 실체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막연한 이미지에 가까웠다. 가까운 감포나 포항에 회 먹으러 더러 들렀고 부산에도 자주 갔지만, 그 바다가 내게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저 북쪽의 강원도 아야진 해수욕장에서 만난 맑은 물과 백사장이 기억에 남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바다는 상상 속의 풍경 한 컷 정도일 뿐, 독립적인 대상으로 내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롬복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은 황홀했으나, 그것 역시 잠깐의 마주침이었을 뿐, '바다' 그 자체가 내게 어떤 의미를 드러낸 건 아니었다. 바다의 소리에 귀기울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 2009. 11. 4.
강을 따라, 가을을 따라 10월 24일, 금호강변에서... (대구녹색소비자연대의 2009년 마지막 올레길 걷기) 2009. 11. 1.
낯선 곳의 아침 - 제주올레 10코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시간의 다른 차원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다르게 지각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 피부에 닿는 공기의 질감이 다르고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강도가 다르고 차창을 열면 만나는 풍경의 색감이 다르다. 아침 밥맛이 다르고 식후에 마시는 차맛의 깊이가 다르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단 일박일지라도,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돌아오는 일정이 주지 못하는 시간의 깊이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모든 아침은 그래서 '세상의 첫 아침'이다. 이 아침의 신성한 기운이 좋아서 가끔 누구도 이 공간에 들여놓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에 누구와 여행할 때도 문득 스쳐가는 생각에 나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상대방이 알면 섭섭하겠지만 이 아침을 홀로 만끽하.. 2009. 7. 7.
박수기정 넘는 길 - 제주올레 9코스 제주 올레길의 매력은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 그 길 사이사이에서 만나는 산과 오름과 계곡,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바람, 파도, 바위, 갈대, 들꽃, 뭍 생명들이다. 지리산과 같은 장중함은 없지만, 화산섬이라 그런지 작은 섬 안에 다채로운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빈 해변이 이토록 아름답구나 하고 느낀 곳이 제주이다. 자연 그대로의 길이 아주 길지는 않다. 이 길이 30분만 계속되면 좋겠다 싶지만 야생적인 해변이나 숲길은 때로는 5분, 10분만에 끝이 난다. 그리고 인가와 사람들이 만든 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것은 올레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원시적인 자연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만나는 길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처음 걷기를 시작하는 분들에게.. 2009. 6. 10.
바람과 함께, 파도와 함께 - 제주올레 8코스 다시 존모살을 찾은 날은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도 세차게 일렁거렸다. 모래 카펫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들었다. 해안으로는 파도가 쉼없이 밀려오고, 물결이 솟았다가 허물어지고, 구름이 움직이고, 햇살이 비치고, 바람이 춤을 추고, 지구가 한 바퀴 돌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들이 움직이고... 내 몸속에도 파도가 밀려오고, 바람이 불고, 별들이 속삭이고.. 지구가 돌고... *걸은 날. 2009. 4. 25. 2009. 6. 6.
다시 봄이 우리 곁에 - 금호강에서 12세기에 살았던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하느님을 ‘녹색의 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푸르름에 매혹되었고 세상을 푸르게 하는 그 힘이야말로 모든 선의 모범이라고 여겼지요. 중세의 교조적인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혁명적인 영성입니다. 4월 첫째 주, 봄햇살, 봄기운으로 가득한 금호강변을 걸으며 푸르름을 깊이 사랑하고 푸르름이 곧 신이라고 말했던 힐데가르트를 떠올렸습니다. 울창한 여름도 좋지만 새봄에 막 피어난 꽃과 연둣빛 잎사귀들, 대지를 점령해가는 푸릇푸릇한 기운, 이들이 뿜어내는 생동감은 특별합니다. 천지만물에서 신이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Original blessing이지요. 내 가슴에서도, 그대 가슴에서도, 새로운 봄이 시작되기를. 2009. 4. 14.
도심 속 작은 자연, 금호강변을 걷다 대구 녹색소비자연대에서 찾은 걷기 좋은 길, 금호강변을 걷다. 2~3시간 동안 강을 따라 걸으면서 이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그래도 살아있는 ‘작은 자연’을 만났다. 도시는 자연과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이다. 가로수가 늘어서 있고 꽃이 피어나고 공원과 호수가 있지만 그 모두는 인공적인 세계 속에 갇혀서 저마다 따로따로 서 있을 뿐 이 도시에 자연은 없다. 자연은 하나의 전체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이는 세계, 인간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작동하는 세계.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새가 날아들고 그 옆으로는 갈대와 풀이 무성하고 이 모두가 서로 어울려 계절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것, 하나의 완전한 세계, 그것이 자연이다. 이 자연이 금호강을 따라서 애처로울 정도로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조.. 2009.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