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의 모든 저작은 그 물음을 향해 있다. 그 화두가 마음에 남아 내가 대학 시절에 제일 좋아한 작가다. 다른 철학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프롬은 술술 잘 읽혔다는 이유도 한 몫 했다. 프랑스 등 대륙쪽 철학자들의 현학 과시가 없고 문장이 간명하다(푸코, 들뢰즈 등은 대학원에서 읽었는데, 학부 수준에서는 혼자 읽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식의 깊이가 얕지 않다. 철학책을 해설서 말고 1차 텍스트로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하는 작가다.
이십 년도 더 지나 노랗게 색이 변한 <소유나 존재냐>를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이 책이 바람직한 사회 혹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마땅하고 아름다운 진술로 읽혔다면, 지금은 우리 사회의 절실한 문제로 다가온다는 점이 달랐다.1970년대에 저자는 이미, 서구의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면서 그 풍요가 가져온 예상치 못한 결과를 이야기한다. 봉건의 사슬을 끊고 과거 과거 귀족이나 누리던 개인적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중류층 이상에게로 확대한 산업시대는 그 혜택 못지 않게 새로운 그림자를 남겼다. 소유가 곧 구원이라는 관점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공산주의건 모두 '물질'의 배분에 대한 차이에 불과하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또한 마르크스의 이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편화된 부르주아'를 이상으로 삼는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면 인간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이다. 다시 말해 모든 체제는 그 체제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물질주의 즉 저자가 비판하는 '소유로서의 삶'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소유 양식은 주변 사물과 자연에 대한 애착을 잃은, 사랑할 줄 모르는 '시장적 성격'을 양산한다. 생활의 목적이 곧 소비인 삶의 양식이다.
이처럼 소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삶의 대척점에 '존재로서의 삶'이 있다. 인간이 충분히 강하고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기쁨에 가득한 삶,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신적인 건강'을 구현하는 삶이다. 스피노자에게 탐욕은 정신적인 질병에 속한다. 저자가 설명하고자 애쓰는 '존재 양식'은 산업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비교하면, 다소 소략하거나 두리뭉실하다는 느낌도 있다. 1970년대 초판이 출판된 지 50년 가까이 되었고 사회, 역사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끝없는 생산과 소비에 바탕을 둔 현 경제체제를 비판하는 저자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오늘날만큼 깊게 와닿는 적은 없는 것 같다. 온갖 물건과 소비에 노출되는 만큼 인간의 내면은 자발성과 활력을 잃고 수동적이 된다. 무언가를 사는 일로 활동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분석은 이 책의 최종적인 결론, '건강한 경제'를 향해 나아간다. 병적인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뒷받침하는 경제. 이는 우리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필요로 한다. 물론 이는 지금 당장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경제 논리에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점령 당한 우리에게 삶에 더 나은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아직 닿지 못한 드넓은 대지가 존재함을 암시해준다. 당장에 체제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삶의 시간을 어디에 쏟고, 어떤 활동에 배분할 것인가. 그것을 찾고 실현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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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안락과 부를 성취하면 그 결과에 의해 누구든 한없이 행복해진다고 믿었다. 무한한 생산, 절대적 자유, 무한한 행복의 삼위일체가 '발전'이라고 하는 신종교의 핵을 이루었고, 새로운 발전이라는 '발전의 도시'가 '하느님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이 새로운 종교가 그 신자들에게 정력과 활력, 희망을 안겨준 것은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산업시대의 놀라운 물질적, 지적인 성취와 함께 '위대한 약속'의 장대함을 생각할 때 비로소 그 좌절이 오늘날 실감나게 발생한다는 충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분명히 이행하지 못한 것이 산업시대이며, 점차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느끼기 때문이다.
(1) 한정 없는 온갖 욕망의 충족은 복리를 가져다 주지 않으며, 행복은 물론 쾌락에 도달하는 길이 아니다.
(2) 우리 모두가 관료제의 기계의 톱니바퀴에 끼는 것이 바로 자기 생활의 독립된 주인이 된다는 꿈이며, 그때부터 감정, 기호, 사고도 정치와 산업 및 그것들에 의해 지배되는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지배하여 조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풍요한 나라에 한해서만 경제의 발전이 이룩되고 있으며, 풍족한 나라와 빈한한 나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뿐이다.
(4) 온갖 기술의 발전은 생태학적인 위험과 핵전쟁의 위험을 유발시켰으며, 이 중 어느 하나가 아니면 모든 문명, 아니면 모든 생명을 단절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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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에 대한 열정은 분명히 계급 투쟁을 계속하게 만들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자신들의 체제가 계급을 폐지시켰기 때문에 그 투쟁을 끝냈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즉, 그들의 체제는 생활의 목적을 한없이 계속되는 소비의 원리에 두기 때문이다.
모두가 더 많이 갖고자 하는 한 계급이 형성되며, 계급이 형성되는 한 투쟁은 계속된다. 또한 지구촌 전체를 보게 되면 나라 사이의 전쟁을 유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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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설명은 이 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이기심 때문에 지도자로 하여금 사회적인 책임보다 개인적인 성공에 더 비중을 두도록 만든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지도자나 경영자들이 개인적인 이익은 있어 보이되 사회에는 해롭고 위험한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이미 충격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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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성장을 이룩하는 정도만큼 우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강하고, 합리적이며, 기쁨에 넘치게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진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그만큼 우리는 부자유하고, 약하며, 비합리적이 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억압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내가 아는 한 스피노자는 정신면의 건강과 질병은 각각 바른 삶의 방식과 그릇된 삶의 방식의 결과를 규명한 최초의 근대 사상가이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건강이란, 그것을 끝까지 분석해보면 결국 바른 삶의 방식의 발현이며 정신적인 질병은 인간 본성의 요구에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탐욕스러운' 사람이 돈과 재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야심적인 사람이 명성만을 생각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들을 정신이상자로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불쾌한 인물쯤으로 생각할 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탐욕이나 야심 등은 정신 이상의 한 형태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스피노자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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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모든 비판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이상이 근거로 하는 개념은 "인간의 자발적 능동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마비되므로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의 능동성을 회복하는 것에 의해서 완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거대한 부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떠한 투쟁도 하지 않는다. 행동하고 소유하고 투쟁하는 것은 현실의 살아있는 인간이다. 마치 개체로서의 인간처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역사'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사란,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마르크스와 엥겔스, 신성한 가족)
최근에 살았던 현대인 중에는 현대의 수동적인 특성을 알베르트 슈바이처만큼 마음에 사무치게 감지한 사람이 없다. 그는 문명의 쇠퇴와 회복에 관한 연구에서 현대의 '인간'을 부자유스럽고 불완전하며, 집중력이 없고, 병적으로 종속적이며 '완전히 수동적'인 존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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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일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써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유 양식을 감소시키고 존재 양식을 증대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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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자기 자신에게 타인에게도 아무런 깊은 애착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깊은 의미에서의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 및 그들 자신에 대한 그들의 관계가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핵무기에 의한 파국이나 생태학적 파국의 위험을 나타내는 모든 자료를 알면서 어째서 그런 위험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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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사상을 어떻게 특징짓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적어도 간단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사상은 소련의 공산주의와 서양의 혁신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만인을 위해 부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 물질주의"로 완전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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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분야가 인간의 발달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사회의 모델은 존재 지향의 소외되지 않은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인간이 비인간적 빈곤 속에서 살지 않게 되고(이것은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의 중요한 문제이다), 또 산업적 세계의 부유한 사람들처럼 생산의 끊임없는 성장을 요구하고 나아가서는 소비의 증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고유의 법칙에 의해서 소비인이 되도록 강요받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유로와지고 병적인 소비에 의해 산업을 육성시키는 행위를 중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즉, "인간을 병들게 함으로써 비로소 건강한 경제가 가능해지는 현재의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과제는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건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취해야 할 중요한 조치는 생산이 '건전한 소비'를 위한 방향을 지향하도록 하는 일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생산"이라는 전통적인 공식은 그 '사용'이 어떤 종류의 '사용'을 가리키는지(건전한 사용과 병적인 사용의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를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불충분하다. 여기에서 "어떤 욕구가 건전한 욕구이며, 어떤 욕구가 병적인 욕구인지를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하는 매우 어려운 실제적인 의문이 생겨난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국가가 최상의 것이라고 결정하는 것을 시민에게 소비하라고 강요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설령 그것이 실제로 최상의 것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소비를 억제시키는 관료주의적 통제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소비에 굶주리게 만들 것이다. 건전한 소비는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형태와 생활방법을 바꾸기를 원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습관화되어있는 것보다 매력적인 소비 유형을 제공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이것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니며 법령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교육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정부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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