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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기록/포항, 경주, 경북

빌뱅이언덕 아래, 권정생 선생의 오두막

by 릴라~ 2022. 4. 22.

이오덕 작은문학관을 나와서 옆마을 댓골로 향했습니다. 권정생 선생의 소설 ‘몽실언니'의 배경 마을입니다.

청송 현서면은 이오덕 선생의 고향인 줄만 알았는데 권정생 선생의 외가도 있었다 해요. 그래서 권정생 선생이 어릴 때 잠깐 살다가기도 했다고. 권정생, 이오덕, 이 두 분은 작품으로 만나 평생 우정을 이어갔는데 실은 일찌감치 인연이 닿아 있었던 거지요.

지금 댓골엔 청송의 명물 사과밭이 가득합니다. 몽실언니와 관련된 흔적은 없지만 댓골 풍경을 보고나니 그냥 돌아가기 섭섭했어요. 내친 김에 권정생 생가까지 보기로 합니다. 청송 현서면에서 권정생 선생이 살았던 안동 일직면 조탑리까지는 한 시간 걸렸습니다.

조탑리에 도착해서야 알았습니다. 이 마을에서 왜 위대한 문학이 탄생했는지... 조탑리는 예사로운 땅이 아니었어요.

지명에서도 엿볼 수 있듯 조탑리엔 통일신라시대 전탑이 있습니다. 복원 공사 중이라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위용은 짐작 가능했어요. 안동 임청각 옆에서 국보로 지정된 법흥사지 7층전탑을 본 일이 있거든요. 전탑은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합니다. 현존하는 게 5기 뿐인데 그 중 3기가 안동에 있지요. 법흥사지 7층전탑을 처음 봤을 때 그 웅장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대단해요. 조탑리 5층전탑도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천 년 전에 전탑을 세운 땅.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텨온 탑. 이야기가 탄생하기에 제격인 곳이었어요. 전탑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권정생 선생이 종지기 노릇을 했던 일직교회가 있고, 교회 옆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가면 선생이 살았던 낡은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납니다.

말 그대로 오두막이에요. 흙벽에 슬레이트가 붙은 초라한 집, 사람 한 명 누울 만한 작은 방 한 칸. 방문이 잠겨 있어 창호지 뚫린 구멍 사이로 방을 엿봤어요. 이 방 호롱불 아래서 ‘몽실언니’가 쓰여졌지요. 선생이 일직교회 문간방에 살 때 연재를 시작해서 이 오두막에 이사 와서 끝마친 작품입니다.

집 뒤편으론 빌뱅이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몇 걸음이면 꼭대기에 닿는 나즈막한 언덕인데 올라가니 예상 외로 시야가 훤합니다. 주변 들판과 마을이 드넓게 펼쳐지고, 그 사이로 천 년을 버틴 탑이 우뚝 서 있습니다(지금은 가림막으로 안 보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신비롭게 교차하는 풍경이었어요.

선생께서 이 풍경 속에서 시대의 아픔과 민족의 아픔을 오래, 깊이 바라보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이 자기 삶을 옥죄인 고독과 병마와 싸우면서 홀몸으로 세상을 품어 안은 곳이 여기구나.. 이 야트막한 언덕에서 온세상을 느끼고 온 세상을 껴안으셨구나..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해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지병으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삶. 특히 십대에 겪은 6.25는 선생의 내면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조탑리에 오니 짐작이 갑니다. 조탑리는 안동 시내보다 한참 남쪽이라 군위와 칠곡이 가깝습니다. 칠곡은 다부통전투를 포함하여 6.25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죠. 당시 선생은 조탑리에서 대구까지 피난을 갔다 돌아왔으니 전쟁의 참상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혹한 세상에 하고픈 말을 '몽실언니'에 담아낸 것이겠지요.

'몽실언니’는 아동문학의 테두리에 한정할 수 없는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 ‘태백산맥' 못지 않은 걸작이라 생각합니다(몽실이란 캐릭터는 태백산맥의 등장인물보다 제게 더 울림이 컸어요). 하지만 이오덕 작은문학관도 그렇고, 권정생 선생 전시관도 그렇고 이 두 분에게 할애된 공간은 지나치게 소박한 편입니다.

생가에서 차로 10분 떨어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은 폐교를 개조한 곳이라 건물은 크지만 권정생 전시관은 작습니다. 작품 하나마다 방 한 칸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다른 문학관에 비해 두 분 작가의 공간이 협소한 이유는 아마도 아동문학을 조금 낮게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린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건 어쩌면 가장 위대한 일일 수도 있는데...

교회의 종을 치며 자기 삶의 한을 담담하게 쓸어내리고, 빌뱅이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 세상 모든 어린이들이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던 작가. 담담하고 위대한 삶과 글.

조탑리 5층전탑 복원 공사는 2026년에 마무리된다고 합니다. 빌뱅이 언덕에서 권정생 선생이 바라보셨던 풍경을 보러 그때 다시 와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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