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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다큐

다시 태어나도 우리 / 문창용, 전진 감독 _ 올해 본 최고의 다큐

by 릴라~ 2023. 9. 22.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냥 눈물이 난 경험. 내게 그곳은 히말라야였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많이 보았지만 그 앞에서 그저 떨리고 가슴 벅차고 눈물이 난 경험은 히말라야가 유일하다. 어제 본 <다시 태어나도 우리>가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큐 영화였다. 히말라야가 배경이지만 나를 눈물 짓게 한 건 설산이 아니라 노스승과 어린 제자다. 그들이 나누는 소박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뭉클하고, 영화가 끝날 때는 어느새 펑펑 울고 있었다. 
 
히말라야 설산을 끼고 있는 라다크의 오지 마을 삭티에 노스님과 동자승이 함께 살아간다. 노스님 우르간은  수행자면서 약초 전문가로 전통 의사로 일해왔지만 그 일에 전념하지 못한다. 일 년여를 함께 지내던 동자승 앙뚜가 다섯 살의 나이에 '린포체'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린포체는 전생의 업을 다하기 위해 현생에 태어난 티벳 고승을 말한다. 어린 앙뚜는 자신을 티벳 캄 지역의 고승인 족첸의 환생이라 말하며 그곳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제 상황이 바뀌어 노스님 우르간이 린포체 앙뚜를 모시는 입장이 되었다. 우르간은 아이를 정성껏 돌보며 앙뚜를 돕는 일을 자신의 운명이자 영광이라 여긴다. 씻기고 입히고 가르치고, 학교에 보내고, 우르간의 하루는 앙뚜를 모시는 일로 점점 채워진다. 앙뚜는 키가 작고 체육을 잘 못하지만 우르간의 보살핌에 건강하게 자란다. 법회에선 의젓하지만, 평소엔 천진한 아이 그대로다. 하지만 앙뚜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시련이 계속 다가온다. 
 
린포체로 선포되면, 전생의 제자들이 찾아와서 자신의 사원으로 모시고 가야 하는데, 티벳 캄에서는 감감무소식이다. 너무 먼 길이어서 그런지, 중국, 인도 국경을 넘지 못하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앙뚜가 린포체 교육을 받던 사원에서는 결국 앙뚜를 내보내기로 한다. (영화에서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데, 책에서는 한 사원에서는 한 명의 린포체가 있어야 권력 갈등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란다.) 
 
사원에서 쫒겨난 앙뚜는 의기소침해하고, 마을에선 가짜 린포체라며 사기꾼이라 외치는 이도 생긴다. 열 살이 되면서 전생에 관한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도 앙뚜를 괴롭힌다. 아직 티벳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사춘기 아이가 그런 것처럼 이유없이 화를 내기도 한다. "나는 사원도 없고, 초르텐도 없고, 승려들도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번듯한 사원을 만들 수 있을까요?"
 
앙뚜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우르간은 사원에 있는 옛 제자와 상의하고 앙뚜는 일반 수도승 자격으로 사원 생활을 재개한다. 그러나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우르간의 품으로 돌아온다. 지난 번엔 쫒겨났지만 이번엔 앙뚜의 선택이었다. 돌아온 앙뚜는 훨씬 의젓해졌고 우르간은 언제나 그랬듯이 앙뚜를 지켜준다. 우르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인격을 보여주었다.  "린포체에게는 인내심이 중요해요." "처지는 또 언제 바뀔지 몰라요."
 
린포체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불교 의식을 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고결한 품성을 닦기 위해 체계적인 수련을 받아야 한다. 앙뚜가 커갈수록 우르간의 고민은 깊어가고 그는 결단을 내린다. 티벳 캄에서 아무도 오지 않으니 직접 찾아나서야 한다고. 앙뚜는 동의하고 두 사람은 아주 먼 길을 떠난다. 라다크를 떠나 인도, 티벳 국경인 반대편 시킴까지. 가능하다면 거기서 국경을 넘어 티벳까지. 
 
배낭을 맨 두 사람이 라다크 산골 마을을 떠나 도시 인파 속을 걸어가는 장면은 마치 영화 같다. 바라나시에서 앙뚜는 묻는다. "왜 별이 산에 붙어 있어요?" "별이 아니라 등불 같은데요." 그들은 버스를 타고, 차를 얻어타고, 아주 많이 걸어서 결국 시킴까지 간다. 3000킬로의 긴 여정 끝에 시킴에 도착한다. 
 
"스승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린포체를 돕는 것이 저의 삶이랍니다."
"스승님과 함께라면 항상 좋았어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모셔야겠네요."
 
시킴에 도착해서 그들은 알게 된다. 국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우르간은 앙뚜에게 어떻게든 티벳 땅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앙뚜와 함께 티벳 땅이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로 올라가는데, 마침 때는 겨울이었다. 힘겹게 설산을 올라갔지만 마침 불어닥친 안개와 눈보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르간은 좌절하지 않는다. 흐느끼는 앙뚜에게 소라나팔을 불어보라고 말한다. 캄의 제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앙뚜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팔을 불지만 곧 다시 흐느낀다. 
 
"아무것도 볼 수 가 없네요. 아무 것도... 저한테 왜 이런 시련이 계속될까요?"
 
우르간은 담담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제 생각에 오늘 내리는 눈은 아주 길한 것입니다. 언젠가 린포체께서 어른이 되면 이곳에 혼자 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때를 대비해 길을 열어둔 것입니다." 
 
"린포체의 간절한 마음이 제자들에게 전달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언젠가 다시 오면 기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앙투는 다시 소리나팔을 분다. 그리고 영화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린포체들의 교육기관으로 유명한 시킴의 사원, 우르간은 라다크로 돌아가고 앙뚜는 이곳에서 교육을 받기로 되어 있다. 린포체로 정해졌지만 린포체가 아닌 힘든 시간과 운명을 견뎌온 앙뚜는 7년의 긴 시간을 지켜준 스승과 헤어져야 한다. 
 
헤어짐의 막막함이 덮치는 시간, 두 사람이 눈이 없는 풀밭에서 깔깔거리며 눈싸움 놀이를 하는 장면은 두 사람이 보내온 모든 다정한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순간이 찾아온다. 
 
"15년 후에는 제가 공부를 다 마쳤겠죠?"
"저는 늙어서 아이처럼 되어 있을 텐데요."
"스승님은 제가 모실 겁니다."
"모신다고요?"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네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스승 우르간은 자신이 학식이 높지 않기 때문에 앙뚜가 더 훌륭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줄곧 생각하지만, 오직 앙뚜의 앞날을 위해 만남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받아들이는 우르간의 모습을 보면 그보다 더 훌륭한 스승이 있을까를 되묻게 한다. 
 
앙뚜의 여정이 성장통을 앓는 모든 이의 이야기를 은유한다는 점은 이 영화의 또다른 백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앙뚜가 진짜 린포체인가 아닌가는 더이상 중요하디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힘겹게 찾아가는 앙뚜의 여정은 단지 환생하는 린포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길을 찾는 모든 젊은이들의 이야기이기에. 앙뚜가 주위의 냉소를 극복하고 3천 킬로의 먼 여정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우르간 덕분이었다. 언젠가는 혼자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우르간이 되어줄 것이다.
 
2017년 개봉되어 유수의 영화제 수상에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인데 이제사 보았다. 우르간의 깊은 눈길과 앙뚜의 순수한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는데, 그들의 얼굴 너머로 배경처럼 깔린 히말라야 설산의 풍경은 덤이다. 다큐를 보는 내내 장엄한 설산이 함께 한다. 라다크와 티벳은 소싯적에 여행 계획을 세웠다가 사정이 있어 여행을 취소한 곳인데, 몇 년 안에 가봐야겠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동행’임을 깨닫게 하는 영화. 사람과의 동행이든 신과의 동행이든. 너와 함께라면 항상 좋았어. 삶의 끝에 나도 그 말을 건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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