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해외여행 기록/뉴질랜드, 기타

[뉴질랜드] 때로는 불편함 속에 여행의 참맛이 있다 - 밀포드 트렉(Milford Trek) 2

by 릴라~ 2005. 3. 11.
때로는 불편함 속에 여행의 참맛이 있다
[뉴질랜드 밀포드 트렉 2] 데이지꽃이 가득 핀 맥키논 패스
▲ 맥키논 패스에서 본 '마운트 쿡 릴리'

우리가 여행한 곳 중에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곳은 어떤 곳일까. 자연이 아름다운 곳일까, 역사의 흔적이 서린 곳일까. 아니면 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는 곳일까.


어떤 장소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는 매우 주관적이고 복잡하다. 우리를 무한한 세계로 이끄는 광대한 풍경은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비록 평범한 곳이라 해도 좋은 인연이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우리는 그곳을 매우 아름답게 기억하게 된다.

굉장히 멋진 풍경이라 해도 한번 본 것으로 족한 곳이 있다. 반면에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도 마치 고향처럼 두고두고 그리운 곳들도 있다.

둘째 날의 트레킹이 끝나고, 길 위에서 참으로 멋진 시간을 보낸 하루였지만, 숙소에 돌아온 이후의 휴식은 길에서와 같이 달콤하지는 않았다. 한 오스트레일리아 보이가 고작 묻는다는 것이 한국의 빈곤이 요즘 어떠냐는 것이었다. 그는 남한과 북한을 헛갈리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무튼 썩 반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대학생이면서 신문 국제면도 안 보냐며 속으로 마뜩찮게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서 굶주림과 같은 절대 빈곤은 이미 사라졌으며, 다만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는 것이 무척 중요한 과제라고 대답했다. 실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진의 문제가 더 심각할 거라고 쏘아붙여줄까도 했지만 내 영어는 그런 순간적인 반응까지 처리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생각만으로 그쳤다.

그는 중년층 이상이 대부분인 우리 그룹에서 몇 안 되는 젊은이였지만 한국을 저개발국가 취급하는 바람에 나는 그와 더 이야기할 흥미를 잃었다. 이어서 다른 호주 사람들이 속속 소파에 앉았고, 세금과 의료보험에 대해서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기대가 지나쳤던가 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훈훈하고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갈 줄 알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가 사는 곳 이상으로 조금도 뻗어가지 못했다. 나는 사람 냄새가 좀 그리워졌다. 풍부한 화젯거리와 유연한 태도,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여행자들이.

곧이어 한 쪽에서는 카드놀이가 시작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와인 잔을 기울이며 쉴 새 없이 수다를 쏟아내었다. 조용히 쉬는 법이라곤 없었다. 그들에게 트레킹은 새롭고 유쾌한 경험의 하나일 뿐일까. 다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사람들이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 그들에게는 결여되어 보였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자연을 음미하는 태도로 본다면 동양이 서양보다 훨씬 우월하지 않을는지. 우리는 자연 속에 우리 존재를 담글 줄 알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숱한 아름다움이 폼폴로나 문 밖에서 끝나버려서 아쉬운 마음이었다.

트레킹 셋째 날. 내 기도가 무색하게 잔뜩 흐리다. 폼폴로나 롯지에서 퀸틴 롯지까지 15km를 걷는 날, 안개비가 살짝 날리는 가운데 트레킹을 시작했다. 전날은 완만한 트랙이었지만, 오늘 걸을 맥키논 패스(Mackinnon Pass)는 본격적인 등산 코스라서 반가웠다.

오전 내내 지그재그의 오르막길이 연속되었다. 숨이 차서 괴로울 때면 내 돈 주고 왜 이 고생을 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길이 험할수록 산행을 마쳤을 때의 뿌듯함과 보람도 더욱 커짐을 알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고생을 감내하게 된다.

조금 힘들게 숲을 통과하자 고지대의 초원이 나타났는데 프랙티스 힐이라 부르는 언덕은 마운틴 데이지를 비롯해서 수많은 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언덕의 정상까지 마지막 오르막길을 오르는 동안 안개에 휩싸여 새하얀 꽃길 사이를 걸었다. 날씨가 맑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꽃길에서

1154m 정상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1888년에 이 루트를 처음 개척한 맥키논과 미첼의 기념탑이 있다. 바람 불고 차가운 날씨 속, 가이드들이 제공하는 따뜻한 스프가 다소간 몸을 녹여 주었다. 안개로 전망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순간 구름이 살짝 흩어지면서 저 아래로 우리가 묵었던 폼폴로나가 살짝 드러났다.


정상에서 또 '키아(Kea)'를 만났다. 뭐 먹을 게 없나 싶어서 내 배낭 위에서 얼쩡거리더니 가이드의 종이컵을 쏜살같이 낚아채어 훨훨 날아가 버렸다. 키아는 무척 영리한 새다. 간밤에 나는 얘 때문에 잠을 설쳤다. 내 방문을 열려고 계속 시끄럽게 굴었기 때문이다.

가장 웃긴 해프닝은 오늘 아침에 벌어졌다. 키아가 밖에서 몇 번 떨그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세상에나 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숙소의 방문은 모두 밖에서 잡아당기게 되어 있으며 잠금쇠가 바깥쪽에 있어서 안에서는 문을 잠글 수 없다.

나는 큰 소리로 다른 사람을 불러서 밖으로 나왔다. 키아는 내 방 앞 난간 위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내 생각에는 키아가 문을 열려고 부리로 손잡이를 계속 건드리다 보니 어쩌다가 그 옆의 잠금쇠가 살짝 밀려들어가서 문이 잠긴 것 같다.


▲ 호기심 많은 새, 키아

▲ 하산하는 길

내려가는 길은 가볍고 편안했다. 날이 점차 개기 시작했기 때문에 클린턴 캐년의 모습을 조망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바위 절벽과 잔설, 폭포들을 감상하며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는 다시 깊은 우림 지대를 통과했는데 돌마다 나무마다 온통 이끼를 덧입고 있는 정글은 신천지 같았다. 양치류의 식물과 푸른 이끼가 무성한 길에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조차 젊고 싱싱한 채로 존재했다. 계곡 물 소리가 우리 가는 길을 따라왔으며 크고 작은 폭포도 계속 만났다. 목이 마르면 아무 데서나 물을 떠서 마셨다.


▲ 이끼를 덧입은 나무들


▲ 폭포는 계속되고

약 여섯 시간에 걸쳐 맥키논 패스를 통과한 후 퀸틴 롯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의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날씨도 한층 따스해졌다.


▲ 퀸틴 롯지

▲ 퀸틴 롯지에서 바라본 풍경

잠시 쉰 뒤 서덜랜드 폭포(Sutherland Falls)를 보러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퀸틴 롯지에서 왕복 한 시간이 걸렸다. 높이 580m의 서덜랜드 폭포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폭포로 세계에서는 다섯 번째로 크다고 한다.


가까이 도착하니 물보라가 엄청나다. 우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면 온 몸이 흠뻑 젖었을 것이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 때문에 옷으로 카메라를 감싸고는 간신히 사진을 찍었다. 바로 앞에서는 3분의 1정도만 카메라에 들어온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 번 더 찍었다.


▲ 서덜랜드 폭포, 가까이에서는 전체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다시 퀸틴 롯지에 돌아오니 하루 종일 걸은 탓으로 무척 노곤했다. 소파에 발을 뻗고 말없이 쉬는데 롯지의 전망이 상당히 좋았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유리창 너머로 주변을 둘러친 산들이 바라다 보인다. 해는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밤 열 시가 되면 산은 완전히 어둠 속에 잠기리라.


정말 쾌적한 여행이었다. 종일 걸은 끝에 뜨거운 샤워와 훌륭한 요리와 편안한 거처가 기다리고 있으니. 내 몸은 이 안락함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무언가 결핍된 것 같은 느낌, 2프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시간이 갈수록 더해왔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산 속에서도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이 안락함이 오히려 내가 트랙에 온전히 몰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때로 불편함은 우리에게 생생한 자극을 준다.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하고 우리 정신을 깨어 있게 한다.

가이디드 워크(Guided walk) 대신 인디펜던트 워크(indipendent walk)로 이곳에 왔다면 어땠을까. 밤의 한기와 불편한 잠자리, 직접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하는 수고 등과 부대껴야 하지만, 그만큼 이 숲과 자연의 호흡을 폐부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숲의 리듬과 함께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내 경험도 더욱 생생해지고 몇 배나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일부러 고생을 감수하고서 캠핑이나 트레킹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며칠이라는 제한된 시간이지만 문명이 주는 안락함에서 조금 비껴나 보는 것.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 봄으로써 편안함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우리 생명력을 갉아먹지는 않는지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갖가지 물건들로부터 해방되어 꼭 필요한 몇 가지만 가지고 지내는 시간은 언제나 내게 소박한 가운데 평온한 기쁨이 있음을 깨우쳐 주었다. 삶의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씻겨 나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담담한 평화와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새로운 활기다. 그 맑은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 그 감각을 일상 속에 불러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산을 찾고 또 여행을 한다.

고급스러운 숙소에서 나는 더 간소하고 소박한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약간의 불편함 속에서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을 더 잘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편하지만 더 큰 자유를 가지고 맘껏 숲속을 헤집고 다니고 싶었다. 그렇게 산 속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깊어갔다.

관련
기사
-2005년 1월 7일부터 11일까지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 트렉'을 걸었습니다.

<밀포드 트렉을 걷는 방법>

1. 인디펜던트 워크(indipendent walk) : 약 일 년 전에 신청해야 합니다. 론리 플래닛의 설명에 따르면, 산장에서 사흘밤을 보낼 수 있는 'Great walks' 패스가 105달러이며, 티아나우에서 밀포드 트렉 입구까지의 버스(15) 및 페리(45~55), 트렉이 끝난 지점에서 밀포드 사운드까지의 페리(26), 밀포드 사운드에서 티아나우까지의 버스(38) 요금이 총 125달러입니다. 'Great walks counter'를 통해 예약할 수 있습니다. (03-249-8514, greatwalksbooking@doc.govt.nz)

2. 가이디드 워크(Guided walk) : 퀸즈타운에서 출발합니다. 나흘의 트레킹과 닷새째 되는 날의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를 포함하는 일정입니다. 교통과 숙식 등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4인실의 경우 성수기 요금이 1750달러이며, 더블룸은 더 비쌉니다. 우리 나라 여러 여행사에서 단체 모객을 하고 있으며, 개별 출발도 가능합니다(히말라야 여행사). 여러 명이 참가할 경우 적어도 두세 달 전에 신청해야 원하는 날짜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뉴질랜드 가이디드 워크 웹사이트는 www. ultimatehikes.co.nz입니다.

*위의 가격은 모두 뉴질랜드 달러입니다.
2005-03-11 09:20
ⓒ OhmyNews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