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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개를 보고, 아 내가 그 사건을 까맣게 잊었구나 했다. 이 영화는 2003년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송두율 교수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당시 일부러 기사를 챙겨읽지는 못했고, 뉴스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식을 보면서, 나는 그저, 국가보안법이 또 한 명을 죽이는구나, 그렇게 피상적으로 생각했었다. 송두율 교수가 결국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 사건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성찰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2010년에 본 이 영화는 뒤늦게 내게 그 사건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고, 내게 송두율이라는 한 개인이 어떤 지향으로 삶을 살아왔고, 그가 한국 사회에 돌아와 어떤 내적 고통을 겪었으며, 그 고통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송두율은 누구인가. 그는 철학자였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 두 사회를 모두 포용하는 '경계인'으로 살고자 한 이. 문제는 노동당 가입이다. 영화에서도 이 부분은 속시원히 해명되지 않는다. 그는 통과의례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순진한 건지, 아니면 밝힐 수 없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남쪽은 그에게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하기를 강요했고 그는 결국 그 모든 흐름에 떠밀려 '전향'을 결정한다. (전향에 가장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아주 꼿꼿하고 원칙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주위 진보 진영은 그가 결단하지 않으면 진보가 다 죽는다고, 정치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사과 및 전향을 권유한다. 나중에 그는 당시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전향에도 불구하고 구속되고, 이후에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그룹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을 사색한다. 이후로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고, 9개월의 감금 끝에 무죄 석방되어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반응과 특히 송교수 주변 인물들-비상대책위를 포함한-의 표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은 모두 우리들의 한 모습이었다.
한 개인의 진실이 어떻게 묻히고 사라질 수 있는지, 한 개인의 삶이 언론을 통해 어떻게 왜곡되게 전달될 수 있는지, 송두율이라는 리트머스에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와중에 한 개인이 어떻게 철저하게 무너지는지를 영화는 보여주었다. 언론은 말그대로 개판이었고, 한국 사회에 관용은 없었고, 보수와 진보 각 진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다. 거기에 한 개인의 진실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우리 사회가 어쩜 저렇게 독단적일 수 있는지 영화를 보며 새삼 놀랐다.
송두율이 말한 '경계'는 선이 아닌 면의 개념으로 회색 지대가 아니라, 편이 갈린 양쪽이 서로 '만나는 자리'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넓혀갈 수 있는 자리라고 한다. 2003년 그의 '경계'는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0년 오늘도 여전하다.
세계인이 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먼저 분단의 상처와 간극을 스스로 메우며 치우침 없이 살고자 했던 한 철학자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고, 그의 과거(노동당 입당)와 현재(전향)와의 어긋남 속에 사라져갔다. 남과 북 모두에 속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여건상(유신독재 반대 경력으로 남쪽에 올 수 없었다) 북쪽에 치우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남쪽과도 만나고자 했다는데.... 최인훈의 '광장'의 또다른 변주 같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강고한 벽 앞에서 '간첩 논쟁' 이상도 이하도 아닌, 천박한 이야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가 지식인으로서 합당한 처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송두율 개인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가로새겨진 분단의 상처, 우리 안에 새겨진 레드 컴플렉스를 아주 생생하게 만나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 항상 이 편인지 저 편인지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과 집단주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분단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는데, 이 상처에 흐르는 피를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몽매를 어찌해야 할까.
이해찬 전총리가 말했듯이, 분단의 극복 없이는 사상의 자유, 삶의 자유, 우리 정신의 진정한 자유로움이 있을 수 없다. 분단의 극복 없이는 관용과 다양성을 이해하고 살아내기도 어렵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에서 꽃이 필 날이 오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경계'가 새로운 만남의 자리가 되기를, 그렇게 '경계'의 자리가 점점 넓어져서 모든 대립을 포용하기를, 영화를 보며 소망했다.
법정에서 송교수가 했던 다음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있었다고. 바나나를 따먹으려면 전류가 흐르는 장벽을 넘어가야 하는데, 첫 번째 원숭이가 앗, 뜨거, 하면서 포기하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전류 때문에 바나나를 포기했다고. 다섯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으려 하자 다른 모든 원숭이들이 말렸다고. 그러나 다섯 번째 원숭이는 장벽을 지나 바나나를 먹었다고. 그 때 이미 전류가 끊어졌기 때문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데도 흐른다고 겁먹고 벽을 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 네 마리 원숭이 같다고.
영화 소개를 보고, 아 내가 그 사건을 까맣게 잊었구나 했다. 이 영화는 2003년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송두율 교수를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당시 일부러 기사를 챙겨읽지는 못했고, 뉴스에서 간간이 들리는 소식을 보면서, 나는 그저, 국가보안법이 또 한 명을 죽이는구나, 그렇게 피상적으로 생각했었다. 송두율 교수가 결국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 사회가 너무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 그 사건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성찰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2010년에 본 이 영화는 뒤늦게 내게 그 사건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고, 내게 송두율이라는 한 개인이 어떤 지향으로 삶을 살아왔고, 그가 한국 사회에 돌아와 어떤 내적 고통을 겪었으며, 그 고통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송두율은 누구인가. 그는 철학자였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 두 사회를 모두 포용하는 '경계인'으로 살고자 한 이. 문제는 노동당 가입이다. 영화에서도 이 부분은 속시원히 해명되지 않는다. 그는 통과의례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순진한 건지, 아니면 밝힐 수 없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남쪽은 그에게 어느 한 체제를 선택하기를 강요했고 그는 결국 그 모든 흐름에 떠밀려 '전향'을 결정한다. (전향에 가장 끝까지 반대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다. 아주 꼿꼿하고 원칙적인 분이었다. 그러나 주위 진보 진영은 그가 결단하지 않으면 진보가 다 죽는다고, 정치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사과 및 전향을 권유한다. 나중에 그는 당시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나 전향에도 불구하고 구속되고, 이후에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그룹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을 사색한다. 이후로 그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했고, 9개월의 감금 끝에 무죄 석방되어 다시 독일로 돌아간다. 영화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반응과 특히 송교수 주변 인물들-비상대책위를 포함한-의 표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은 모두 우리들의 한 모습이었다.
한 개인의 진실이 어떻게 묻히고 사라질 수 있는지, 한 개인의 삶이 언론을 통해 어떻게 왜곡되게 전달될 수 있는지, 송두율이라는 리트머스에 한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와중에 한 개인이 어떻게 철저하게 무너지는지를 영화는 보여주었다. 언론은 말그대로 개판이었고, 한국 사회에 관용은 없었고, 보수와 진보 각 진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였다. 거기에 한 개인의 진실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 우리 사회가 어쩜 저렇게 독단적일 수 있는지 영화를 보며 새삼 놀랐다.
송두율이 말한 '경계'는 선이 아닌 면의 개념으로 회색 지대가 아니라, 편이 갈린 양쪽이 서로 '만나는 자리'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넓혀갈 수 있는 자리라고 한다. 2003년 그의 '경계'는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010년 오늘도 여전하다.
세계인이 되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먼저 분단의 상처와 간극을 스스로 메우며 치우침 없이 살고자 했던 한 철학자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고, 그의 과거(노동당 입당)와 현재(전향)와의 어긋남 속에 사라져갔다. 남과 북 모두에 속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여건상(유신독재 반대 경력으로 남쪽에 올 수 없었다) 북쪽에 치우친 적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간격을 메우기 위해 남쪽과도 만나고자 했다는데.... 최인훈의 '광장'의 또다른 변주 같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한국 사회의 강고한 벽 앞에서 '간첩 논쟁' 이상도 이하도 아닌, 천박한 이야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그가 지식인으로서 합당한 처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송두율 개인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가로새겨진 분단의 상처, 우리 안에 새겨진 레드 컴플렉스를 아주 생생하게 만나게 해준 좋은 영화였다. 항상 이 편인지 저 편인지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과 집단주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분단의 상처는 끝나지 않았는데, 이 상처에 흐르는 피를 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몽매를 어찌해야 할까.
이해찬 전총리가 말했듯이, 분단의 극복 없이는 사상의 자유, 삶의 자유, 우리 정신의 진정한 자유로움이 있을 수 없다. 분단의 극복 없이는 관용과 다양성을 이해하고 살아내기도 어렵다. 남과 북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에서 꽃이 필 날이 오기를, 이 세상의 모든 '경계'가 새로운 만남의 자리가 되기를, 그렇게 '경계'의 자리가 점점 넓어져서 모든 대립을 포용하기를, 영화를 보며 소망했다.
법정에서 송교수가 했던 다음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다섯 마리의 원숭이가 있었다고. 바나나를 따먹으려면 전류가 흐르는 장벽을 넘어가야 하는데, 첫 번째 원숭이가 앗, 뜨거, 하면서 포기하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전류 때문에 바나나를 포기했다고. 다섯 번째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으려 하자 다른 모든 원숭이들이 말렸다고. 그러나 다섯 번째 원숭이는 장벽을 지나 바나나를 먹었다고. 그 때 이미 전류가 끊어졌기 때문에. 전류가 흐르지 않는데도 흐른다고 겁먹고 벽을 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 네 마리 원숭이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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