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신대학교 졸업식 기조연설
더불어 가는 실천지성을 위하여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결코 길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저의 지나온 삶의 시간 속에서 가장 흥분되고, 가장 젊은 로맨스가 피어오르고, 가장 이상을 향한 도약의 발디딤이 세차게 나의 몸을 격분시키는 이 순간, 나의 의식 속에는 수유리 산 129번지 솔밭사이로, “임마누엘”이라는 이색적 문자아래 펼쳐진 한신동산의 노오란 금잔디밭의 노스탈자가 아롱집니다. 그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계셨던 할아버지가, 우리나라 항일민족정신의 큰 요람이었던 북간도 용정 명동학교의 정맥을 이으신 문재린 목사님이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학우들과 오손도손 청춘을 찬미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지요.
7번 뻐스를 타고 수유리 입구 정거장에서 내려 기다랗게 뻗친 좁은 미루나무길을 걸어 들어오다 보면 화계사를 돌아내려오는 맑간 시냇물이 나오고, 그 시냇물을 건너면 임마누엘 동산이 보였지요. 1967년 1월 7일, 나는 내 생애 처음 아주 멋쩍게 그곳을 들어섰습니다. 좀 두근거리기도 했지요. 입학원서를 사려구요. 그 임마누엘 하얀 2층 건물입구에서 훤칠한 키에 두터운 흰 동정이 도드라뵈는 까만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주 인자한 분을 만났어요. 정말 환한 광채가 도는 아름다운, 해맑은 얼굴이었습니다.
“입학하러 왔습니다. 원서는 어디서 사나요?”
그 분은 나를 1층 교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훗날 그토록 격렬하게 온 몸을 불살라 행동으로 이 땅의 민주화에 헌신하신 문익환 목사님이시라는 사실을 저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큐우슈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일제의 인체실험대상이 되어 꽃다운 28세의 나이로 순국한, 명동학교 동창생 윤동주의 별 헤는 밤들이 문 목사님의 아스라한 동경, 이 땅의 의로움에로의 소명이 되었을까요? 몇년 전 백양사에서 지선스님을 뵈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연대앞 사거리에서 최루탄이 계속 터지는 자옥한 최루연기 속에서 지독한 스님수행생활을 거친 본인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자리를 뜨려는데, 문 목사님은 태연히 서 계시며 빙그레 웃으시더랍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은총이 쏟아지는 것 같소.” 저는 문 목사님께 구약학개론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때 “공동번역”에 열중하고 계셨는데, 정말 하루하루가 환희에 넘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소녀 같은 마음과 얼굴을 하신 이우정 선생님으로부터 희랍어라는 문자를 처음 접했고, 신약학개론을 배웠습니다. 그때의 체험을 여기 다 말할 수 없겠지만, 저의 삶이 추구한 모든 가치의 저변을 형성해준 것은 한신대 귀뚜라미 우는 동산에서 밤늦게까지 속삭였던 정의와 초월의 담론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진실이 영원한 엘랑비탈이 되어 나를 비상飛翔케 했습니다.
아무리 나의 영혼이 대붕이 되어 구만리 장천을 소요逍遙해도 항상 나를 이 땅으로 끌어내리는 낭만은 하나님의 진노로써 독재정권의 불의와 대결하며 민중신학을 탄생시키고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의 개방성을 견지해나간 임마누엘 동산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약관의 나이에 제가 홀로 한신대에 입학하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그리고 또 왜 한신대를 떠나야만 했는지, 사실 이러한 삶의 굴곡은 저 자신조차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질 못합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짐을 꾸려 어깨에 메고 기나긴 미루나무길을 다시 걸어나올 때 저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소리를 저는 지금도 매우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나의 더 큰 뜻이 네가 걷고 있는 이 길에 있으리라!”
저는 그 뒤로 모든 종교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철저한 인문주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인문주의는 최소한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나, 공리주의적 요구나, 실천이성적 요청이나, 개인의 체험적 울타리 속에 가두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비주의가 말하는 무無적인 모호한 개방성 속에 하나님을 방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절대적 타자의 떨림의 신비를 감득하면서 존재의의를 발견하는 엄숙주의를 견지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인간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인간을 하나님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저는 전적인 타자the Wholly Other를 오직 내 몸 안에서 발견해왔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절대적으로 타자화하면서 나를 순화시키고 나의 주체를 심화시키는 신독愼獨의 탐색의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천국은 결코 드러나고 나타난데 있지 않았습니다. 항상 은밀하고 미세한데 있었습니다. 은밀한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지인知人은 곧 지천知天입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만물에 대하여 경외감을 느끼고 조화로운 교섭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외로운 신독의 여정을 의아스럽게 바라보는 많은 자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하는 모교 한신대학교는 저에게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형식상 명예졸업장이기는 하지만 저로서는 입학한지 44년만에 받는 소중한 진짜 졸업장입니다. 저는 실상 44년 동안 한신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동안 한국신학대학도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의 주요분야를 포섭하는 훌륭한 종합대학인 한신대학교로 성장하였습니다. 한시도 저는 임마누엘동산에서 꾸었던 청춘의 꿈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무수하게 많은 졸업논문을 썼습니다. 단언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결코 “길 잃은 양”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저는 금의환향을 하지도 않습니다. 저에게는 어설픈 타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의 외로운 인문학의 여정을 포섭하기로 결단한 한신대학교의 채수일 총장님, 그리고 신학대학원 강성영 원장님 이하 한신대학교의 모든 교수님, 그리고 이 결단을 환영해준 한신대학교 학생회 여러분, 그리고 대학생 동학여러분, 그리고 교단 일선에서 수고하시는 목회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는 봄학기부터 저의 청춘의 꿈이 담겼던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중용의 신학”이라는 전공과목 한 강좌를 가르칩니다. 어려서 천안 씨알 농장을 왔다갔다 하곤 했던 저를 그토록 귀여워 해주시던 함석헌 선생께서 '노자'를 강의하시던 바로 그곳에서, 저는 철학적으로 가장 진보된 유교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중용'을 강의합니다. 그런데 수강계획표를 컴퓨타에 작성해 올리자마자 16명의 학생이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30명 제한인데 16명이 수강을 신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리 기다려도 한 명도 더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서 가장 적은 학생이 수강하는 강의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가장 많은 학생이 듣는 행복한 강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보다도 네 사람이나 많은 학생이 자발적인 결단에 의하여 제 과목을 신청했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기독교가 아직도 건강한 개방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겸손한 자세로 임할 것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진리를 전할 것입니다. 파송시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전대도, 배낭도, 신발도, 지팡이도, 속옷도 없는 가난하고 벗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전할 것입니다. 저는 타인의 내면적 신앙의 형태에 관한 충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교정되어나가기만을 희망할 뿐입니다. 단지 제가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목회적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강한 상식입니다. 제가 교육자로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종교인이기에 앞서, 그들을 매력적인 인간으로 성장시켜 주는 일입니다.
근세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적 근간을 마련한 죤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교회에는 진짜교회가 있고 가짜교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와 가짜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의 해답은 매우 명료합니다. 관용을 할 줄 아는 교회만이 진짜교회이고, 관용을 할 줄 모르는 교회는 가짜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의 말씀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에클레시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율법적 가혹함이 아닌 관용이요, 이방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신봉하는 에클레시아의 사람들이 관용을 모르고, 독선과 배타와 증오와 분열과 훼방과 시기만을 일삼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저 도올의 말이 아니라 서구 근세사상을 형성해간 모든 기독교사상가들의 호소입니다. 로크의 관용론이 의회와 정치권력을 분리시켰고, 명예혁명을 성립시켰고, 권리장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격발시켰고 미국의 헌법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교회는 명예혁명 이전의 수준도 안되는 조잡한 배타론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한신대학교는 지금으로부터 71년전 조선의 신자가 조선의 교회사역의 주체主體가 되어야지, 서양선교사 사역의 객체客體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민족주체주의적 자각 위에서 설립된 조선신학교로부터 출발한 대학大學, 즉 큰 배움의 터전입니다. 조선신학교 개원의 이념적 지주였던 장공 김재준 목사님께 저는 제 인생처음으로 “동양사”강의를 들었습니다. 저의 동양학적 탐색이 김재준 선생님의 강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참 기묘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죠. 저는 장공선생님께서 민주화투쟁으로 카나다에 망명하고 계실 동안에도 몇번 찾아뵈었습니다. 귀국하시기 전 제가 미대륙에서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저에게 '관자管子' 「권수權修」편에 나오는 구절을 매우 정갈하고 아름다운 서도 붓글씨로 써 주셨습니다.
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
일년을 잘 살기 위해서는 곡식을 심는 것이 상책이고, 십년을 잘 살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는 것이 상책이고, 종신토록 잘 살기 위해서는 꼭 사람을 심으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죠. 돌이켜보면, 그 때는 왜 선생님께서 저에게 이런 글귀를 써 주시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결국 한신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리라는 것을 예언하셨던 것 같습니다. 놀라운 형안입니다. 곡식은 하나를 심으면 하나를 얻지만, 나무는 하나를 심어 열을 얻고, 사람은 하나를 심어 백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저도 말씀드립니다. 과장함이 없이 첫 수강자 열여섯 명을 모두, 한 명당 백만 명을 건강한 관용의 시민으로 계도할 수 있는 목회자로서, 이 조선의 땅에 심겠습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더불어가는 한신대학교의 실천지성이여! 당신은 무엇과 더불어 가고 있습니까? 나 도올은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 민족의 미래와 더불어가야 합니다. 종교가 하나의 민족을 위하여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 교회가 처한 민족의 현실을 외면하고 글로발라이제이션이나 네오리버랄리즘을 운운하는 것은 위선이요 무지요 타락이요 부패입니다. 글로발라이제이션의 보편주의를 말하면서 제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고, 제 민족의 타민족에게로의 종속을 정당화 시키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재차 불러일으키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신앙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까? 현 남북간의 긴장조성의 현실태는 우리 민족이 일으킨 일도 아니요, 민중의 바램도 아닙니다. 남・북한의 소수 정치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이기적 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조작해낸 불행한 정치산물일 뿐입니다. 그 산물에 대해 강대국들은 박수를 보내고 있지요. 불행하게도 한국의 보수기독교는 남북화해의 최대걸림돌 노릇을 하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시대에도 예수를 비방하는 자들이 끄떡하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정의로운 생각을 하는 자들을 향해 끄떡하면 “빨갱이”라고 외치는 것과 똑같지요. 그런데 나대는 “빨갱이 응징주의자”들의 대부분이 대형기독교교회의 목사・장로・권사・집사 인듯한 인상을 주고있는 것 또한 무시못할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善待하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우리가 북한사람들이 어떠한 바보스러운 짓을 한다 해도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선대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용정신을 가지고 있지 아니 하다면 어찌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이까?
오늘날 한국의 정치가 마치 독실한 기독교인들의 정치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결국 한국기독교의 최대의 자멸함수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제 외침은 예레미아의 비통한 애가보다 더 비통하게 메아리칠 것 입니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그 멸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한신대학교는 글로발라이제이션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글로컬서번트십glocal servantship을 말합니다. 한민족의 로칼리티locality를 통하여 전 우주적 유니버살리티universality에 도달할 수 있는 인문학의 인재를 배양하는 것을 대학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대학大學은 소학小學이 아닙니다. 작은 배움이 아니라 큰 배움의 터전입니다. 대학은 결코 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성품적 인간을 양산하는 인재수급공장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의 유수대학들은 모두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efficacy이라는 하나의 원칙에 따라 대학을 상업화시키고, 학부제를 만들고, 신자유주의의 터전으로 만들고, 진정한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의 인문정신을 추방시켜버렸습니다.사도 바울은 외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제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 오직 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너를 변화시켜라!”
한신대학교는 오늘날 한국에 만연하고 있는 대학의 풍조에 반드시 역행逆行해야 합니다. 학부제를 거부하고, 어학의 기초훈련을 강화하고, 선택과목보다는 필수과목을 중시하고, 자유보다는 자율의 덕성을,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윤리를, 그리고 이성을 포괄하는 심미적 감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기품과 품격의 학풍을 만들어야 합니다.
대학의 궁극적 목표는 기성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기성의 사회를 끊임없이 개혁해나갈 수 있는 혁명적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은 오로지 자기변혁과 사회변혁을 통해서만 자기화・생동화 될 수 있습니다.
엊그제 채수일 총장님을 뵈웠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우리 대학교만이라도 A・B・C・D라는 식의 학점을 없앴으면 좋겠어요. 그 대신 그것을 진실한 교수님의 기술description로 바꾸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울 수 있겠지만, 잘 정착되기만 한다면 결국 한신대학교의 특수성을 전세계인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대학에서부터 등급적인 인간이해를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나 위대한 발상입니까? 한신대학교는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기나긴 고난과 핍박의 시련을 통하여 다져진 상호이해와 협력의 전통이 강한 곳이라는 사실을 저는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수유리 한신동산의 본관건물을 올라가는 계단 옆에 장공선생님의 매우 힘찬 글씨가 목각으로 걸려 있습니다.慕義如飢渴그런데 제가 아는 바로 이것은 중국고전에서 따온 문구는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 6절의 말씀의 옛 한역 성서문구에서 따오신 말씀 같은데 그것을 그냥 한학자인 저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정의로움을 사모하기를 굶주린 듯, 목마른 듯 하라”라는 말씀이 됩니다. 아마도 장공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전하시고 싶어하신 것은 이러한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기를…”이라고 말씀하지도 아니 하셨고, “하나님의 정의를 사모하기를…”이라고 말씀하지도 아니 하셨습니다. 오직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사모하기를 굶주린 듯, 목마른 듯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도 종말론적 함의를 뜻한다기보다는, 결국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따라 행동하는 정의로운 개인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석가들은 의견을 모읍니다. 개인의 정의로움과 사회의 정의로움이 일치될 때 비로소 천국의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뜻이지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결국 법정용어로서 하나님의 죄지은 인간에 대한 관용과 용서의 판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결국 사회정의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사회정의야말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입니다.
더불어가는 한신의 실천지성 여러분! 정의로운 인간이 됩시다! 좌니 우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따위의 천박한 개념을 초월하여 이 세계를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기릅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실력을 배양해야만 합니다. 사회에서도 성공하는 큰 인물이 되시기를 본 졸업식의 강연자로서 오늘 저와 같이 학위모를 쓰는 학우 여러분의 앞날과 건강을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의 성공이 인류의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그것이 기장교단의 내실로 이어져 한국기독교를 개혁하는 동력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아! 힘차게 노래부릅시다!2011년 2월 17일 11시, 한신대학교 채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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