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빠리는 천국이다. 볼거리들이 도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빠리 거리를 하루 종일 누비면서 하나씩 차례로 들를 수 있다.
빠리에서 보낸 나흘은 <그림>과 만나는 시간이었다.박물관을 순례하느라 에펠탑에도, 베르사이유에도 가지 못했다.에펠탑은 멀리서 본 것으로 만족하고 말았다.
루브르에서는 중세를, 오르쎄에서는 근대를, 퐁피두에서는 현대를 만날 수 있다.루브르 박물관은 그 중 가장 지루한 곳이었다.미술에 문외한인 내게 중세 인물화들은 별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그러나 모나리자와 니케(나이키)를 본 것으로도 충분히 들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루브르다.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보안 때문에 유리 너머로 보아야 했지만그 살아있는 듯한 표정, 묘한 눈길과 마주치면 정말 걸작이란 생각이 든다.하늘로 날아갈 듯한 웅장한 조각, 여신 니케는 최고였다. 목은 없었지만 섬세하게 조각된 그 힘찬 날개가 뿜어내는 기상에 반했다.박물관 건물 속에 갇혀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다.푸른 하늘 아래 그리스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 있어야 제격일 것 같았다.
오르쎄 박물관에서는 인상파, 신인상파의 수많은 작품들을 만나서 너무나 행복했다.고흐의 그림은 역시 멋졌다. 고흐의 별밤과 밤하늘에 빛나는 오베르의 교회에서는 눈을 뗄 수 없었다.아를르의 태양, 세상 모든 빛살을 다 담아내려 한 열정적인 붓놀림이 그림 속에서 살아 춤추고 있었다.마네, 모네, 세잔의 그림도 좋았다. 고갱의 그림은.... 글쎄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그럴까. 타히티의 원시 야성을 그려낸 그의 그림에선 별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내가 오르쎄를 통해서 새로 좋아하게 된 사람은 모네다.순간에서 영원으로~!!!순간 순간 달라지는 빛,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그 순간의 광채에서 영원의 빛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그림이었다.뚤루즈 로트렉의 그림도 괜찮았다.
퐁피두 센터. 세 곳의 대형박물관 중에서 내가 가장 반한 곳이다.현대 작가들은 내가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었지만,나는 그 강렬한 색채와 추상에 매혹되어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눈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빠리에서 만난 개인 박물관도 빼놓을 수 없다.피카소 박물관에서는 그의 독특한 겹침과 선명한 색상에 매료되었다.그리고 운좋게도 몽마르뜨르 가는 길에 우연히 간판을 보고 발견한 박물관도 있다.지하에 자리잡은 살바도르 달리 박물관.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적혀 있는 그의 어록도 재미있었다.'무엇이 초현실주의인가?' '바로 나 자신''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조화(harmony)'달리의 그림과 조형 예술 중에서 눈길을 끈 건 사람의 몸을 서랍장으로 처리한 작품들이다.인간의 몸을 물질화하고 있는 현실이 잘 전달되는 작품이었다.
로댕 박물관, 그의 유명작이 다 있다.생각하는 사람, 지옥문 같은 작품들에서 나는 그다지 감흥을 얻지 못했다.뭐랄까, 로댕의 작품을 보고 나는 그가 이중인격자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정말 뛰어난 기교, 그러나 깊이가 부족하게 느껴졌다.그렇지만 그의 에로틱한 조각들은 분명 눈길을 끌었다.특히 '마주보는 두 손', 그저 손을 그렸을 뿐인데, 거기서 두 연인의 대화, 그들이 보낸 시간이 느껴진다.'키스'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 작품을 보며 그 순간 키스하고 싶어 미칠 뻔 했으니.로댕은 두 연인간의 순간의 소통, 서로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길과 몸으로 교감하는 정열을 잘 묘사했다.그런데 로댕이 그려낸 그 관능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약간의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이 나눈 사랑의 파국을 내가 알고 있어서일까.
해질 녘, 콩코르 광장을 거닐며 바라본 오벨리스크, 퐁패두센터에서 내려다본 빠리 전경,노틀담 성당에서 드린 미사와 파이프 오르간 소리,세느강을 따라 걸으며 만난 작은 다리들, 퐁네프...그리고 낡고 눅눅한 냄새가 났던, 벽에 그림이 많았던 빠리의 지하철...곳곳에서 이젤을 펼쳐 들고 그림을 그리던 학생들...저녁이면 거리에 넘쳐나던 쓰레기... 그것조차 빠리의 일부로 보였었다...아, 바게뜨의 맛도 빠트릴 수 없다. 식사 때마다 마셨던 포도주도...
그러나 빠리의 아름다움은 너무 인공적인 것이어서 그 며칠이 지나자 빠리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산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빠리에 가서 그 그림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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