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은 제주 올레만큼 예쁘진 않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절경이 길마다 속속 숨어 있는, 다채롭고 아기자기한 풍광을 지닌 올레길에 비한다면 지리산 둘레길은 다소 밋밋하게 여겨질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이 좋았다. 올레만큼, 아니 올레보다 더 좋기도 했다. 내륙을 지나면서 마을과 마을로 끝모르게 이어져 있는 길은 화려하진 않으나 오래 묵은 술처럼 깊은 맛이 있다. 경치는 여느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우뚝한 지리산이 그곳에 있는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위엄을 부여해주고 있었다.
행정마을에서 1구간의 끝 운봉마을까지는 둑방길과 농로가 번갈아 나왔다. 둑방길 옆으론 내가 흐르는데 손을 댄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편안하다. 길은 수월했지만 걷기는 만만치 않았다. 아침부터 햇살이 강렬했다. 얼마 걷지 않아도 땀이 줄줄 흐르고 준비한 생수병은 금방 바닥이 난다.
다행히 간간이 쉼터가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거나 여행자를 위한 작은 원두막, 혹은 마을 정자나무. 볼 때마다 살 것 같았고 보는 것으로도 마음이 편안했다. 다른 때라면 별 것 아니었을 텐데 이리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걸 보면, 한여름 뙤약볕 아래 걷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싶다.
1구간이 끝나고 2구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나자 애들이 난리가 났다. 달려가 기념 사진을 찍고 갖가지 자세를 취하며 방방 뛴다. 내 마음도 그 애들하고 꼭 같았다.
다시 길을 간다. 한결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처음 둘레길을 시작할 때보다 2구간을 시작할 때 더 행복했다. 한 구간을 다함께 마쳤다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자체로 특별한 건 없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우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면 그건 그 전에 묵묵히 걸어온 시간과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우리 가슴에 차곡차곡 담겨진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
하여 기다림이란 머묾이 아니라 대상에 조금씩 다가가는 행위이다. 이 길에 특별한 게 있다면 그것은 지리산 높은 고개도, 한여름 태양도, 쉼터도 나무 그늘도 아닌, 이 길을 보고 느끼는 우리들의 마음이었다. 그 속엔 길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고, 사랑이 있는 자, 언제든 그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가운데 느낄 수 있었다.
* 걸은 날 : 201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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