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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세 여자(1~2) | 조선희 ㅡ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여성 혁명가들

by 릴라~ 2019. 3. 4.

 

이 책에 나오는 남자들은 거의 다 아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 곁에 있었던 여인들의 존재를. 단지 혁명가의 아내 혹은 내조자가 아니라 그 서슬 퍼런 시대에 혁명을 꿈꾸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거침없이 뛰어들었던 씩씩한 여인들의 존재를.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댕기머리를 싹둑 잘랐던 그들의 첫 번째 선택은 이후 그들의 삶을 역사의 가장 험하고 거친 굴곡 속으로 데리고 간다. 상해,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에 이르는 여정까지는 그런가보다 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그분들의 여정이 조선의용군이 싸운 타이항산(태항산) 일대와 스탈린 치하 카자흐스탄 유형지에 이를 때에는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두 권의 소설을 가끔씩 멈추고 심호흡을 하며 읽었다.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시작해 해방정국의 혼란과 6.25를 거쳐 세 여인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던 허정숙이 세상을 뜬 1990년대까지, 한국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통과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백 년의 시간을 한 번에 쫓아가기란 만만치 않았다. 세 여인의 삶에 그 모든 역사가 다 얽혀 있었고, 그 역사의 무게와 그것이 개인에게 안긴 비극의 마디마디마다 나는 가끔 멈추어야 했다. 그분들은 우연히 비극 속에 내던져진 게 아니었다. 그들이 직접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기에 맞닥뜨려야 했던 길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 세 분들의 삶의 마지막을 확인하고 나니 뭔가 가슴이 헛헛한 기분도 든다. 그들에 비해 지금 우리의 삶의 관심사와 고민은 얼마나 비루하고 또 비루한가,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년은 삶을 보는 연륜이 생겨야 할 나이인데 '부동산'과 '사교육'과 '세금'이 이렇게 모든 화제를 집어삼켜도 괜찮은 것일까. 만약 고민의 수준과 깊이로 삶을 평가한다면 그들은 저 높은 곳에 있고 우리는 저 낮은 곳에 있었다. 그들이 비극 속에서도 숭고했던 반면 우리는 안락 속에서도 비천했다. 

 

세 여성 지사들에게 느낀 또 한 가지는 '통전성'이다. 그들에겐 사랑과 혁명이 별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선택한, 위험한 인물들과의 사랑과 새로운 세상에의 열정은 동일한 인격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태도였다. 사랑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듯 그들은 온몸을 던져 사랑을 살고 거친 시대를 살고 좌절한 혁명을 살았다. 반면에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 지사들은 좀 다르다. 사랑을 미지의 타자에게 건너간다는 의미의 존재론적 태도로 볼 때,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혁명 또한 사랑의 다른 이름 즉 자신을 타인에게 '주는' 행위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 내부에서 믿는 어떤 것, 자신이 고수하는 틀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가까웠고 그것이 온갖 파벌 싸움을 낳는다. 

 

해방공간에서 박헌영은 자신의 신념 혹은 야망 때문에 유형지의 주세죽을 외면했지만, 반대의 경우였다면 주세죽은 결코 박헌영을 외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들에게는 사랑과 혁명은 모두 익숙한 자기를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삶으로 건너가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락했던 삶을 떠나 그 '미지의 길'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졌고 그로 인해 역사의 가장 그늘진 골짜기에 놓여졌다. 누군가는 그 길 도중에 쓰러졌고 누군가는 끝까지 걸어갔지만 자신이 택한 사랑/혁명/역사를 따라 걷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한결 같았다. 이 소설은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라 고려공산당 계열 독립운동에 초점이 있지만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힐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그들의 삶이 전하는 '통전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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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주인 공 세 여자를 비롯해 이름 석 자로 나오는 사람은 모두 실존인물이다. 등장인물들에 관해 역사기록을 기본으로 했고 그 사이사이를 상상력으로 메웠다. 역사기록에 반하는 상상력은 자제했고 '소설'이 '역사'를 배신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소설은 세 여자와 그들 남자들의 인생과 함께 10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다뤘다. 나는 1955년 주체사상이 나오고 1956년 연안파가 숙청되는 것으로 한국의 공산주의는 종료됐다고 보았다.


세 여자는 20대를 함께 보낸 후 유라시아 대륙의 다른 장소로 흩어졌지만 늘 우리 근대사의 극명한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가령, 주세죽이 스탈린 치하에서 한인 강제이주의 참담한 현장에 던져졌을 때 허정숙은 연안에서 모택동에게 혁명전략을 배우고 있었고 고명자는 경성에서 친일잡지의 기자 노릇을 했다. 해방공간에 허정숙과 고명자는 38선의 북쪽과 남쪽에 있었고, 허정숙은 김일성의 측근이었고, 고명자는 여운형 옆에 있었다. p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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