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heshe.tistory.com
해외여행 기록/탄자니아

킬리만자로, '하얗게 빛나는 산' 언저리에서

by 릴라~ 2019. 7. 13.

중년이 되며 문득 나이 들었음을 실감할 때가 있다. 대개 체력 문제다. 킬리만자로를 보며 삼십대였다면 산에 오르지 않고는 못 배겼을텐데, 지금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다니!!! 정상 등반에는 최소 5일이 필요하고 6일 정도면 더 좋다. 일정상 그만한 시간도 없었지만, 시간이 있었더라도 등반은 못했을 것 같다. 네팔 안나푸르나 4천미터에서 고소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5천미터 이상 오르는 건 이제 엄두가 안 난다. 게다가 킬리만자로는 화산이다. 화산은 정상까지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이래저래 자신이 없어서 바라보는 걸로 만족. 물론 만족은 되지 않으나 만족하기로. 킬리만자로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은 모시였다. 한적한 마을이다. 숙소를 킬리만자로산이 조망되는 우후루 호텔로 정했다.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인데 외국인은 두 배 비싸게 받지만 트윈룸에 50불이라 그리 부담스런 가격은 아니었다. 우기라 낮에는 산에 구름이 걸려 정상을 보지 못했다. 저녁에 호텔에 들어서니 앞서가던 D가 소리쳐 부른다. 킬리만자로가 보인다고. 마침 구름이 걷혀 산 정상까지 또렷이 보였다. 

 

킬리만자로에 대한 내 로망은 아주 오래 전 안치환 콘서트에서 시작되었다. 가수 안치환이 킬리만자로에 오른 경험을 이야기하며 노래 하나를 불렀고 관중들이 다같이 따라 불렀다.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이맘 브레 프사나" 짧아서 지금도 기억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꼭대기란 뜻이란다.

 

스와힐리어로 킬리만자로는 '하얗게 빛나는 산'이란 뜻이다. 매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빛나는 꼭대기를 볼 수 없다. 지구온난화로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80퍼센트나 사라졌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만나는 만년설 봉우리는 그 자체로 장관인데, 다 녹고 지금은 산 정상 부근에 조금 보였다. 케냐 쪽에서는 좀 더 많이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예전엔 등반 마지막 구간이 빙하였는데, 지금은 사막지대를 통과해야 한단다. 킬리만자로 등반의 하일라이트가 많이 줄어든 셈이다. 

 

등산을 하지 않으면 킬리만자로에서 할 것이 사실 별로 없다. 여기 온천이 있다지만 그건 별로 취미 없고. 마사이마을도 세렝게티에서 보았고. 우리는 네 곳을 방문했다. 처음엔 마테루니 투어. 킬리만자로 산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마테루니에 가서 폭포를 보고 그 지역에서 나는 커피를 마시는 투어. 나는 나름 괜찮았다. 빅토리아 폭포를 보고 온 사람들은 마테루니 폭포를 보고 감흥이 없었다지만, 나는 폭포로 가는 산책길도 좋았고 폭포도 기대 이상이었다. 이 인근에서는 가장 큰 폭포다. 

 

폭포에 다녀오고 나면 마을 청년들이 직접 노래를 불러주면서 커피콩을 빻아 바로 커피를 볶아서 시음하게 해준다. 아라비카 커피는 해발 천 미터 이상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탄자니아에서 가장 좋은 커피는 킬리만자로 인근에서 나온다. 커피 맛은 평범했다. 드립커피라면 맛을 음미했을 텐데, 터키식으로 끓여서 내는 커피라 향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릴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어는 재밌고 즐거웠다. 마을 청년들이 활기찬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좋았고, 커피콩이 한 잔의 커피가 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유익했다. 무식하게도 나는 커피콩이 열매인 줄 알았는데 씨앗이었다. 그것도 그냥 씨앗이 아니라 씨앗을 건조시켜 씨앗의 겉껍질을 한 번 더 벗겨낸 것이 커피콩이었다. 커피 마시면 콜레스테롤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는데 일리 있다 싶었다. 모든 씨앗에는 단백질 성분인 핵산이 들어 있는데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그 씨앗을 하나도 아니고 수십 개를 갈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른 체형인데도 콜레스테롤이 좀 높아서, 커피를 끊어야하나 생각했다. 

 

두 번째 방문한 곳은 킬리만자로 마웬지 루트 등산로 입구. 뭐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전망이 보이는 곳도 아니고.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모시에 있는 숲. 트레킹할 곳을 검색하다 알게 되었다. Rau forest reserve. 투어 사무실 Rau forest reserve and eco cultural tourism center 사무실도 있는데, 구글 검색한 장소와 달라서 못 찾았다. 사무실은 숲 산책을 마치고 검색 장소 바로 근처에서 발견, 2층에 있어서 못 봤던 것 같다. 한 시간 정도밖에 못 걸었지만 이 숲에서 킬리만자로 등산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등산로는 동네사람들이 반대편에서 오가는 길이기도 해서 마을 사람도 마주친다. 동네 숲인데도 하늘 높이 치솟은 아름드리 나무가 이어지고, 여기서만 사는 원숭이도 간간이 보인다. 지도를 보니 숲 바로 옆에 논밭이 있는 걸로 봐서 원래는 숲이 더 넓었는데 조금씩 개간된 것 같았다. 산도 소중하지만, 사실 마을 바로 곁에 있는 이런 숲이 사람들에겐 참 소중한 공간이다. 아직 그 중요성을 모르고 그냥 내버려둔 느낌이 들어서 안타까웠다. 

 

개도국이 대체로 그렇다. 정말 소중한 자원을 많이 갖고 있지만 지역민은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여기 모시만 해도 킬리만자로산에 대한 제대로 된 박물관 하나 없다. 그리고 선진국은 원조를 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지적 컨텐츠는 잘 제공하지 않는다. 지적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님을 모시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건 단지 돈이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모시에 있는 옛 기차역.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고 빈 철로만 있지만 마을에서 거기가 킬리만자로가 가장 잘 조망된다고 해서 들렀다. 누가봐도 낡아빠진, 허름한 역사를 지나니 철로가 나왔고, 킬리만자로가 보였다. 산이 잘 보이는 장소가 맞았다. 선로가 넓다보니 확 트인 벌판에서 산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쪽에는 간이상점이 있는데 그 앞에서는 한 무리의 서양 관광객들이 맥주를 마시고 경치를 음미한다. 이런 풍경을 보면 가끔씩 속이 뒤집힌다. 마치 옛식민지를 활보하듯, 거만한 자세로 그 장소를 즐기는 서양인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마치 그들이 이곳의 주인인 양! 

 

해질녘 기차역에서 붉은 빛이 감도는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가만히 작별 인사를 했다. 여기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젊어서 여행할 땐 떠날 때마다 여기 다시 와야지 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가 되면 다른 곳이 더 흥미를 끌었고, 두 번 이상 방문한 곳이 가까운 일본이나 발리 말고는 잘 없다. 이제 나는 안다. 어떤 곳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의식하면 마주치는 풍경이 한결 사랑스러우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든다. 

 

잠보, 킬리만자로!!!

 

 

 

*2019년 4월 여행

 

 

300x25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