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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야기/여행 단상

이름 모를 민초들의 마음이 새겨진 장소, 최제우나무 / 대구 근대골목

by 릴라~ 2019. 9. 14.

 

대구 근대골목에 자리한 종로초등학교에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수령 사백 년이 되는 회화나무, 이 나무의 이름은 '최제우나무'다. 왜 나무에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이름이 붙었을까. 

대구 종로초등학교는 옛 경상감영의 감옥이 있던 자리다. 바로 근처에 1601년 선조 때 세워진 경상감영이 있다. 경상감영은 경주, 안동 등을 옮겨다니다가 선조 때부터 대구에 완전히 정착했다. 종로초등학교의 회화나무 수령이 4백년쯤이니 이 나무도 경상감영이 자리잡을 즈음에 생겨났으리라 여겨진다. 

이 경상감영에 1864년 경주에서 체포된 한 남자가 이송된다. 100일간의 고문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는 그 해 4월 봄날, 혹세무민을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가 참형을 당한 장소는 경상감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미산 언덕, 지금 현대백화점 맞은 편에 있는 관덕정 앞마당이었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이 많이 순교하여 관덕정순교기념관이 세워진 곳인데 최제우 선생도 여기에서 순교하였다. 만으로 갓 마흔을 채우지 못한 나이였다. 

그가 죽었을 때 경상감영 감옥의 회화나무는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수액을 눈물처럼 흘렸다고 전해진다. 전설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구비전승하는 이야기엔 어느 누가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진실이 비석처럼 단단하게 새겨져 있다. 최제우 선생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백성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아무리 애써도 선생을 구할 수 없었다. 그 답답하고 원통한 마음을 풀 길 없어 선생이 고문당하고 죽는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이 나무에 기대어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자 했고 그 기억을 우리에게 물려준 것이다. 2012년 대구시는 이 나무를 공식적으로 '최제우나무'라고 명명했다. 

대구 근대골목엔 뜻깊은 장소와 문화유산이 많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감동과 울림을 주는 곳은 종로초등학교의 이 회화나무 한 그루다. 그 어떤 시대보다 가혹하고 무자비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 선인들의 순정한 마음 한 조각이 온전한 형태로 내게 전달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사백 년을 한 자리에서 버틴 회화나무의 무성한 가지 사이로 하늘을 올려다보노라면 그 시대의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만져질 것만 같다. 

최제우 선생의 머리는 대구읍성 문밖에 사흘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사대문 성벽처럼 대구 도심을 둘러싸고 있던 대구읍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축조되었다가 1906년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박중양의 무단철거로 사라졌다(대구의 관문 영남제일관은 망우당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최제우 선생의 목을 벨 때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렸다고도 전해진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삼남지방에서 일어난다. '동학농민혁명'은 사실 문제가 있는 명칭이다. 당대 민중은 대다수가 농민이었는데 '농민혁명'이란 명칭을 쓰면 혁명의 주체를 요즘과 같은 농민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냥 동학혁명이라 해야 맞다. 얼마나 많은 이가 희생되었는지 집계조차 되지 않는 동학혁명은 우금치전투의 패배와 전봉준 장군의 체포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하늘의 뜻을 이루어내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은 다른 어떤 종교와도 비교되지 않는 혁명적인 주체성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잘은 모르지만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그 정도로 강력한 실천의지라야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최제우나무 근처, 종로초등학교 본관 부근의 다른 화단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문구와 함께 반공시대의 유물인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이 학교가 모교인 전두환 대통령이 1994년 방문했다는 표지석도 있다. 역사적 가치 평가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아, 상반된 것들이 이리저리 혼재된 우리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런 것들은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최제우나무는 다음 백 년을 너끈히 버틸 거라는 걸. 몇 백 년의 풍파를 이겨낸 이 나무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영감과 열망의 장소로 오랫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기를 소망한다. 

@2018

 

 

"사람들은 동학군이 부패한 관료들과 배반한 밀고자에 대항해 우발적으로 봉기한 농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권에의 확고한 충성을 고백하는 그들의 선언으로 판단해 볼 때, 한국 어딘가에 애국심의 맥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농민들 가슴속 뿐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동학군의 봉기는 과격한 충돌이나 쓸데없는 피흘림은 없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한 시도에 자신들을 한정시키고 있었다. 정부의 실정이 더 이상 계속될 수 없고, 부패한 관리들의 참기 어려운 강탈에 대항한, 평범한 농민 봉기보다는 훨씬 큰 규모의 무장항쟁을 벌일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몇몇 외국의 동정은 동학군에게 쏠렸다.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 부르고 싶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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