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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역사, 인물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 백승종 ㅡ 동학사상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

by 릴라~ 2019. 10. 14.

동학 사상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 구어체로 알기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서술되었다. 우선 동학이라는 종교/사상이 태동하게 된 배경으로서 조선사회(지배층과 농민)에 대한 주류와는 다른, 그러나 근거가 있는 매우 설득력 있는 분석과 주장이 인상적이다. 저자가 중세 이후 유럽 농촌사회를 관심 있게 연구해온 학자이기에 가질 수 있는 관점이다. 그 중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은 마을 두레에 기반한 농민 조직, 그리고 평민지식인의 새로운 등장이었다. 그들이 어떤 철학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는지,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의 삶과 각각 조금씩 차이 나는 주장을 이 책은 섬세하게 다룬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서방 열강과 일본이 온통 뒤흔들고 있던 난세에 그들이 품은 포부와 그들이 열어가고자 한 세상의 모습에 마음 깊이 감동했다. 저자가 쓴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 최근 주목하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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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는 '존귀함'을 찾아 나서는 정신적 여행입니다. 우리의 여행을 위해 제가 만든 지도의 첫 번째는요, 인간이 지극히 존귀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사상적 계보를 알아보는 작업입니다. 최제우는 어느 날 갑자기 지극히 우연히도 인간이 존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가 명시적으로 존귀함을 선포하게 된 데는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종의 계보학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알고 보면, 중요한 모든 생각에는 그 나름의 계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내면에 감추어진 생각의 계보를 더듬어봐야 할 것입니다. (...)
세 번째로는, 역사적 맥락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가령 최제우가 인간의 존귀함을 강조한 배경이 조선 사회라고 하는 한반도의 내적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뤄보고 싶어요. 제 생각에는 말이지요. 동학의 등장에는 세계사적 흐름이 작용했다고 봅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맥락을 빠뜨리면 최제우의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말로, '서구의 충격'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야 동학의 등장에 대한 입체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18~19세기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엄청난 시련을 주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도전이었던 서구의 충격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다섯 번째는 '개벽'이란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천지창조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낡은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가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서두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 강의의 중심은 '관계의 질적 전환'인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질적 전환은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입니다. 그 점을 뚜렷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개벽'이라는 개념이지요. p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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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 관한 우리 공부의 서막은 여기까지입니다. 역사적으로 보아, 비밀결사운동의 시작은 대단히 미약했으나 결국에는 동학이라는 총체적 대안을 구성하게 되었으니 실로 쾌거라 할 만합니다.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고, 벼슬 한 번 한 적도 없고, 평생 배불리 밥을 먹은 것이 몇 번이나 되었는지를 손가락으로 헤아려야 할 정도로 가난한 평민지식인들이 결국에는 시대의 문제를 풀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가령 호의호식하던 세종 때 집현전 학사 같은 분들이 이런 사상적 결실을 냈다면 우리가 크게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들은 대궐에 소장된 귀한 책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편안히 학문에 종사했으니까요. 그러나 날마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 살던 평민지식인들, 물로 밥을 대신해서 채우고 살던 사람들이 동학이라는 사상적 열매를 맺었다는 점이 신통한 일이지요.
그것도 말이지요. "너를 죽여야 내가 산다, 어떡해서든 내가 돈을 벌어야지 살지" 하는 식의 통속적인 생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값진 일이었다고 봅니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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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최시형의 생각은 한층 더 발전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밥을 먹는 걸 가지고 '이천식천'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우리는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있습니다." 주체는 우리들인데요, 우리도 하늘이지마는 우리가 먹는 밥도 하늘이라는 말이지요. 하필 밥만 하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도 하늘, 우리의 옷도 하늘, 우리의 호미도 낫도 다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은 무엇입니까? 굳이 사람만 하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만물이 하늘이라는 것이지요. 18세기 성리학자들이 시작한 인물성동이론이 최시형에 이르러 확실한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리학자들은 기껏해야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동학의 위대한 스승 해월 최시형은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모두 하늘로 여겼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평등론'인 셈이지만 스케일이 전혀 다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저는 제2강의 서두에서 동학의 '평등'은 서양 근대의 유산인 인간평등의 사상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계몽사상이 유행하던 17~18세기 서양의 지식인들은 기껏해야 신분의 평등에 주목했습니다. 19세기가 되면 남녀평등으로 확대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조한 평등은 인종차별의 늪에 빠졌습니다. 서구사회의 평등은 식민지 백성에게 확대 적용되지도 못했고, 특히 흑인에 대한 그들의 편견과 차별은 지금까지도 온전히 극복되지 못한 역사적 난제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서양 근대에 등장한 평등의 개념을 덮어놓고 예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협소한 평등이었습니다. 점차 그 범주가 확대되었다 해도 아직도 인간 세상에 국한된 것이지요. 그에 비하여 최시형의 하늘은 신분의 차별, 남녀의 차별, 나이의 차별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 나아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차별을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이 더없이 지극히 존귀하다는 사상이 등장했다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는 동학의 가르침은 관계의 질적 변화를 바탕으로 한 자주적 근대화라고 봅니다.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만물의 관계를 정의롭게 바꾸려 했다는 점에서 최시형이 도달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은 수도 없이 강조할 만큼 중요합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바꾸어서 말하면 최시형은 '생태적 전환'을 주창한 사상적 선구자라고 평가할 만합니다. p8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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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동학운동은 이중, 삼중의 의미에서, 즉 다중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한 '문화투쟁'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첫째, 서구의 충격으로 존망의 위기에 빠진 동아시아 각국의 자구적인 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거지요.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동학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또 다른 측면도 있어요. 차별과 착취라고 하는 내적인 문제, 이것은 조선사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지요. 이런 문제는 19세기 동아시아 사회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이자 서구 사회를 포함하여 전 지구적인 문제였어요. 인류의 역사상에는 항상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어요. 지금도 그런 문제가 남아 있고요. 이런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하기 위한 동아시아의 해답이 바로 동학운동이었어요. 저는 이를 '동아시아의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동학은 동아시아 문화에 공통적인 종교, 철학적 기반 위에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화가 한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유교와 불교와 도교는 한국의 문화이기도 했으나, 동아시아 일반의 보편문화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문화에서 스스로 찾아낸 해결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의미라고 하겠어요.
세 번째로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만, 서구의 근대는 제국주의적 근대였다고 하겠는데요, 그에 비해서 동아시아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은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는 근대화였다는 점입니다.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동학은 탈인간 중심이었다고 말해도 좋겠어요. 동학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점은 최시형이 설파한 '삼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요. 요컨대 동학은 생태 중심의 사고였어요. 지극히 존귀한 인간도 지구상의 다른 모든 존재와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들도 착취의 대상은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동학은 인류 문제의 생태적 해결을 촉구했다고 보고 싶어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은 대단히 특별한 사상이었어요. 저는 그 점을 한 마디로,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절실한 노력이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실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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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의 전쟁은 1895년 4월 17일 전승국인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마무리되었지요. 청나라는 일본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어요. 그들은 전쟁배상금으로 2억 냥이나 되는 은을 물어야 했지요. 천문학적인 거액이었어요. 그 무렵 일본의 3년치 예산에 해당했거든요. 그런 거금을 청나라가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청나라는 서구 열강에게 거액을 빌려서 일본에게 주었습니다. 일본은 신이 났겠지요. 그들은 그 돈으로 더욱 우수한 무기를 확보했어요.
청일전쟁 덕분에 일본의 위상은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았어요. 그 바람에 일본의 지도층은 한층 더 심한 전쟁광이 되었어요. "전쟁이란 게 이렇게 신나는 거구나. 상대를 마구 쫓아가서 마음껏 유린하고 이런 거액까지 뜯을 수 있으니까, 전쟁은 참 재미난 것이다." 일본의 정치가와 군인들은 쾌재를 불렀던 것입니다.
청나라도 이런 수모를 겪었는데, 그 일본 앞에 조선은 도대체 어떤 꼴이었을까요? "고종과 민비를 지켜줄 세력은 없다. 우리가 곧 한반도를 접수해야 되겠다." 이렇게 함부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서울에서 난리 아닌 난리가 났어요. 국난의 위기를 실감한 대원군이 전봉준에게 편지를 썼다지요. "동학농민군 말고는 이 나라를 일본의 침략에서 구할 사람이 없다. 동학농민군이 와야만 일본군과 대적을 하든 말든,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루바삐 서울로 올라와서 나라를 구해주요." 이런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과거 전봉준은 대원군의 문객 노릇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서로 구면이었던 거지요. 나중에 전봉준이 체포되었을 때, 일본인들은 전봉준에게 대원군과의 관계를 자세히 밝히라고 요구했어요. 그러나 존봉준은 결정적인 증거를 거부했어요. 그는 마지막까지도 대원군을 보호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전봉준이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봉준은 서울로 올가가기를 결정했지요. 구국의 일념을 가진 이였으니까요. 그럼 서울에 올라가면 일본군을 이길 전망이 있었을까요? 이길 확률은 희박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로 가야했습니다. 왜요? 그것이 '보국안민'을 위한 길이었으니까요. 그냥 앉아서 죽느니 차라리 서서 싸우다 죽어야 보국안민이지요.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주인이지요.
전봉준의 심정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물었겠지요. "그럼 언제 갈까요?" "우선 짓던 농사일을 대강 끝내놓고 올라가자!" 그래서 그해 음력 9월이 되자 그들은 움직였어요. 전봉준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아요. (...)
전봉준이 일본군과 싸워서 이길 가능성을 믿고 먼 길을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길 가능성이 실낱같았으나 그는 시대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비극적 상황이 다가옴을 예감하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했다고 봅니다.
그때 만약 제가 전라도 어느 고을의 농부였으면 전봉준의 부름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봉준 형님, 잘 알겠는데요. 제 어머니의 연세가 많아서 제가 집을 비우지 못합니다. 이번에는 빼주십시오. 내년에나 함께할게요."
그러나 우리의 동학농민군은 저와는 다른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 미룬 채 운명의 부름에 응했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정확한 숫자는 어디서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요. 족히 만 명이 넘었다고 짐작됩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 되고 말 것인데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섰다는 사실이 참으로 장하지 않습니까? p14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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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고종의 무분별한 개방정책이었어요. 조정에서는 개화정책을 표방하며 외국과 조약을 맺어 통상을 확대하려 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한 정책이요, 도리어 너무 늦었다는 아쉬움이 있지요. 서양 여러 나라와 서로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이 생산하는 품질 좋고 값싼 물건을 조선이 수입하고, 조선이 만든 좋은 물건을 그들에게 팔 수 있다면 잘된 일이지요. 게다가 서로 친선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지내면서 상대국의 문화를 배워 생활의 질적 수준을 높이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요, 이게 겉만 그럴 듯했어요. 아무런 실속이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어요. 서구 열강과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팔 문건이 많았어요. 거기서 값싸고 품질 좋은 물건이 마구 들어오면 조선의 농민들은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망하는 거였지요. 우리가 내다 팔 물건은 없는데 사 올 물건만 많았으니까요. 게다가 고종은 개화정책을 추진한다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출이 늘어나게 되어 자금이 많이 부족했어요. 누군가 조정의 금고를 채워놓아야 했어요.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해야 되는 상황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백성의 대다수는 농민이었으니까, 죽어나는 것은 농민이었어요. 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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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언제부터 소농이 조선 사회에서 발언권을 가졌던가요? 늘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18세기부터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소농이 중심으로 떠올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가 있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당연히 증거가 있어요. 18세기부터는 소농들의 조직이었던 '동중'이 마을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마을의 책임자가 '동중'이나 '하계'에서 나왔어요. 그들이 마을을 이끄는 조직이 되었다고요. 소농들의 조직을 통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세금을 납부한다든가, 공동으로 치안을 유지한다든가, 공동으로 공적인 노동을 한다든가, 공동으로 국가폭력에 대항한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공부한 바로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까지 100년 동안 그런 변화가 집중적으로 일어났어요. 그런 점에서 그 시기야말로 역사적 전환기였다고 선언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때 소농이 이 나라의 정치를 장악하지는 못했지요. 중앙권력은 여전히 양반들의 수중에 있었단 말이지요. 하지만 시골 사회에서, 특히 삶의 터전에서는 소농의 목소리가 커졌어요. 소농은 자기들끼리 모여 요샛말로 민주적인 방식으로 우두머리를 뽑았어요. 그들은 자기들의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꾼을 선출했고요. 그들은 서로서로 상의하고 토론하며 농사의 계획을 만들었고, 일과 책임을 분배했다는 겁니다. 서로 도와가면서 살 궁리를 함께 한 것이지요.
바로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소농들이 생업에 함께 종사하는 사람끼리 '두레'라는 조직을 분야마다 조직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옳아요. 모든 작업에 저마다 두레가 있었어요. 심지어 소농의 아내와 딸들이 종사하는 길쌈에서도 '길쌈두레'가 있었을 정도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소규모 협동조합이 매우 활발했다는 말씀입니다. p16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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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조직이 투쟁의 주체로 고도화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운동이었지요. 19세기 후반, 거의 해마다 전국 어디선가 되풀이되었던 항쟁과 민란과 서요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동학농민운동은 그처럼 일시에 대규모로 일어날 수 없었어요. 적어도 30년 이상 전국의 농민조직들은 동중과 두레의 기치 아래 국가를 상대로 투쟁 역량을 연마했어요. 전국 어디서나 탐관오리를 쫓아낸 승리의 경험을 쌓았어요. 관헌의 체포와 고문과 형벌을 견디며 투쟁 조직으로서의 체질을 강화했던 것이죠. 쓰라린 경험이 한 세대 동안 축적되었기 때문에 소농들은 권력과의 투쟁에 익숙해진 것이지요.
30년 동안 국가권력과 싸워보니 소농은 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과거보다는 훨씬 더 지역적으로 넓은 연대를 구축할 역량을 키웠어요. 과거보다는 훨씬 강력하게 투쟁할 수 있는 배짱과 의지를 가지게 되었어요. 하루아침에 선량이 농민이 낫을 들고 관아로 몰려가서 지방관을 축출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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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평등사상은 기독교회와 대립하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서 나왔어요. 그들은 모호한 태도로 '천부인권설'을 폈어요. 교회의 가르침과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가령 로마 교황청은 루소라든가 몽테스키외나 볼테르의 사상이 담긴 저술을 금서로 지정해 탄압했고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 때도 민중은 교회와 귀족의 특권에 맞서 싸운 것입니다. 19~20세기에 서구에서 인권사상이 보편화되자 기독교회가 그런 주의주장을 수용한 것이지, 거꾸로 계몽사상가들이 교회의 평등주의를 수용한 것이 아니었어요. 이 점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동학의 철저한 평등 관념은 서학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동학의 평등은 인간 중심까지도 청산한 거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고요. 동학의 이와 같은 사상적 업적은 실로 찬란하기까지 했어요. 동학은 관계의 질적 전환을 꾀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근대를 선사할 수도 있는 탁월한 존재였어요.
그들이 바랐던 후천개벽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났더니 기적처럼 황금이 사방에 널려 있고, 요리를 안 해도 음식이 넘쳐나는 그런 만화 같은 풍경을 그린 세상이 아니었어요. 누구보다도 성실한 인간, 우주 자연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여기는 인간으로 가득한 세상이 개벽된 세상이지요. 누구나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함으로써 일상의 풍경이 새로워진 세상입니다. 동학이 추구했던 것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니었어요. 각성된 개인에 의해 새로워진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중한지요. p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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