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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어떤 사랑 이야기

by 릴라~ 2020. 6. 14.

 

 

 

D와의 인연은 2001년 겨울,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인니(인도네시아) 여행을 준비하던 나는 정보가 많이 없어 이리저리 검색을 하던 중
한 까페에서 코이카단원으로 인니에 거주하고 있던 분의 글을 읽고 문의 메일을 보냈었다.
원래 나는 2주 정도 자바와 발리를 둘러보려 했는데 그의 권유로
여행 일정을 한 달로 늘리고 칼리만탄과 술라웨시 오지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메일 끝의 이 문장이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님이 만약 현명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정말이지 오지와 밀림, 그리고 자연의 신비와
인간이 이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철학을 배우고 싶다면
위 길을 택하겠습니다.”

한 달의 여정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 감사메일을 보냈다.
이후 몇 달에 한 번 한국과 인니를 오가던 메일은 한 달에 한 번, 며칠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알고보니 서로 동갑이었고 몇 년간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 있는 이 친구와 이백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메일이 오간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우리는 그제서야 휴가차 귀국할 때 한번 만나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각자의 일정이 꼬이고 오해까지 더해지면서 서신 교환마저 중단되었다.
직접 만난 적이 없기에, 한창 바쁘고 다이나믹한 삼십대 초반 시절이었기에,
이 인연은 쉽게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렇게 또 5년이 흘렀다.
내 메일함에 이 친구의 메일이 잔뜩 들어있다는 생각은 그간 전혀 하지 못했다.
여름에 비파싸나라고 불교 명상을 배우던 중 느닷없이 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이었다.
돌아와 지난 메일을 열어보곤 깜짝 놀랐다.
메일 속에 내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젊은 날의 한 순간 한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이야기를 다 써놓았다. 가족 얘기, 학교 얘기, 정치 얘기, 읽은 책과 본 영화, 어릴 때 추억,
여행 계획, 실패한 연애사, 앞날에 대한 불안과 고민거리, 따스한 위로와 격려까지...
한 통 한 통 읽으며 뭉클했다.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는 기분이어서.
그리고 알았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서도 그땐 그것의 가치를,
그것이 정말 드문 일임을 알지 못했다는 걸.

메일을 보냈다.

(...)

올 여름에 비파싸나라고, 불교 명상을 배우는데
이상하게도 너에 대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어.
돌아와 메일함을 열어봤어. 잠시 지나간 시간 속을 걷는데
미안함과 고마움, 왠지 모를 깊은 아픔이 마음을 스치고 가더구나.

네게도 이젠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어쩌면 생각조차 나지 않는 흐릿한 이미지일 터라
이제 와서 미안하단 말이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그냥 나 혼자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내가 그때 왜 그리 예민하고 폭력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안녕, 잘 지냈니?
문득 안부가 궁금해 띄운 이 편지가 행여 네게 결례가 되지 않기를.
네가 꿈꾼 대로 고향에 정착해서 지금쯤 몇 평의 땅을 가꾸고 있을까...
자유인이었으니 어쩌면 다른 나라에 갔을까... 혹시 인니에서 살고 있을까...
결혼해서 튼튼한 사랑을 일궈가고 있을까, 자녀는 있을까...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단다.

네가 이 편지를 반가워할지, 기분 상해 할지, 무덤덤할지 나로선 알 수 없구나.
또한 한메일을 아직 쓰는 지도 모르겠고.
그러므로 네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무척 기쁠 것 같네.
어디에 있든, 몇 줄의 안부를 전해준다면 참 고마울 거야.


답장이 왔다.

여긴 모래바람이 심하게 분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온통 먼지 투성이의 세상.
앞이 보이지 않고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연이틀간 이어지는 모래바람은
이곳 아프간 미군 바그람(Bagram)기지를 휩쓸고 있다.

(...)

 

머나먼 아프간에서 그는 안부를 보내왔다.
우린 다시 메일을 드문드문 주고받았지만 여전히 만나지 않았다.
이 친구의 휴가 기간마다 내겐 바쁜 일이 뻥뻥 터졌지만 실은 만나길 두려워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삼십대 중반을 넘기니 겁이 많아지기도 하고,
주고받은 속깊은 이야기들이 다시 깨어질까봐 두려웠던 것도 같다.
핑계를 대며 서로 언저리만 빙빙 돌다가
서신을 주고받은지 13년째 되던 해에 처음으로 만났다. (이건 무슨 1960년대도 아니고ㅠ)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우리는 하루종일 이야기를 나누었고,
딱 한 달 뒤 D는 또 해외근무를 떠났지만 이번엔 전과 달리 화상통화와 카톡이 있었다.
이상이 매우 지지부진한 사랑 이야기.

아래 사진은 내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에 받은 메일을
몇 년 전에 손으로 다시 써서 D에게 선물한 노트의 일부.
책장 정리하다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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