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부터 경산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지역 스토리텔링 부분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총 11분을 인터뷰해서 글로 옮기는 작업인데 내가 쓴 글이라 기록으로 남겨둔다.
“수고한다” 한 마디에 힘이 나지요, 유00 씨
중장비 기사로 출발한 삶
남성상회, 학원사, 금곡식당, 동방식육식당, 백부자집…. 유00 씨의 기억 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이다. 역전주유소 맞은편엔 대청탕이 있었고 삼천리자전거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였다. 사과밭도 눈앞에 아른거리고, 철둑 건너 동네와 아랫동네 아이들 사이에 전쟁놀이를 한 일도 생각난다. 경산역에 담이 없던 시절, 뛰어가서 증기기관차를 공짜로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린 적도 있다. 거기서 집까지 하염없이 걸어왔다.
용성에서 태어나 다섯 살 무렵부터 경산에 살았던 유00 씨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공부가 길이 아닌 것 같아서 공납금을 받아서 대구로 훌쩍 떠났다. 직장생활을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우산공장에 갔던 첫 번째 대구행은 며칠만에 끝나고 돌아와서 엄청 혼났다고 한다. 17살 때쯤 다시 대구로 나가서 중부경찰서 부근의 인쇄소에서 일했다. 차비가 5원인가 9원인가 하던 시절이었다. 밤 12시에 일이 마치면 차가 없어서 숙소가 있는 봉덕동까지 걸어오곤 했다.
인쇄일은 할 만했지만 고향이 그리워 경산에 돌아온 유00 씨는 농사일을 거들다가 지인을 통해 불도저 일을 배웠다. 그리고 경기도 평택에서 좀 더 들어간 곳에서 근무했는데 처음 일을 배우는 몇 년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평택 시절,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생겼던 서울 영등포에 놀러간 일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유00 씨는 중장비 일을 하면서 전국 곳곳의 산업 현장을 누볐다. 광양제철소 공사를 할 때 광양만 뻘에 모래를 부어 땅을 다지던 일이며, 주민들 인심이 좋았던 충청도 청천면 제방공사는 지금도 생생하다. 충청도 양반이란 말이 생각날 만큼 기사들에게 대접이 좋았고 처음으로 칠면조 고기를 먹어본 동네였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에 데모가 많을 때, 대구 검단동 한일합섬에 일이 있어 갔다가 경북대학교 앞에 탱크가 늘어선 모습을 보고 충격 받았던 기억도 있다.
유00 씨는 체구가 크지 않은 편이다. 커다란 불도저가 움직이는데 운전하는 사람은 안 보인다며 동네 사람들이 일하는 걸 구경하러 온 적도 있다. 처음 일을 배울 때는 만만치 않았지만 중장비 일은 수입이 괜찮았다. 보통 사람 월급이 몇 만 원 하던 시절에 유00 씨는 이삼십 만원을 받았다. 이 일을 그만두면서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하신다.
안 해본 일이 없던 시절
유00 씨는 결혼하면서 중장비 일을 그만두었다. 아내 분은 경주 산내가 고향이었는데, 임신한 아내를 혼자 두고 전국으로 일을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고정된 일이 없다보니 유진호 씨는 안 해 본 고생이 없다. 농장에서 소똥, 돼지똥 치우는 일도 해봤고, 중국집 배달도 하고, 아이스께끼도 팔고, 도저히 안 되어 만화 가게를 차린 적도 있다. 이사도 수십 번 했는데, 연탄가스로 죽을 뻔한 일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 걸 이상히 여긴 이웃이 문을 열어서 다행히 위험을 넘겼다. 다시 중장비 일을 할까 생각할 때는 이미 포크레인이 대세여서 불도저는 인기가 없었다 한다.
뭘 할까 고민하던 차에 유00 씨는 문득 자신이 운전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길로 면허증을 따서 82년부터 택시기사를 하셨고, 살림살이는 그때부터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는 2007년 무렵이었다. 개인택시 공고를 보고 자격 요건을 채우기 위해 경산 지역 만 오천 명의 서명을 받아 서류를 제출했다가 떨어졌다. 만 오천 명 서명이 어디 쉬운가. 지역에서 오래 봉사하며 신임이 두터워 가능한 일이었다. 유00 씨는 그때가 고비였다고 회상하신다. 이후 무사고 경력으로 결국 개인택시 면허를 따셨다.
유00 씨가 보기에 역전마을은 크게 발전이 안 된 편이다. 인심은 과거가 더 좋았다고 한다. 세배하러 옆집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며 밥을 얻어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제일 편한 시절이라며 빙긋 웃으신다. 5년 전에 역전마을 빌라로 이사하셨고, 아들도 결혼시켰고, 그간 몰던 택시도 작년에 파셨다. 그렇게 현업에서 은퇴한 뒤에도 유00 씨가 놓지 않는 일이 있다. 바로 봉사다.
봉사는 끝까지 아름답게
유00 씨가 봉사를 시작한 건 1978년이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봉사를 하다가 1993년 자율방법대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봉사활동에 나섰다. 교통정리 자원봉사도 많이 하셨는데, 대학가에 데모가 많던 시절, 영남대 앞에서 수신호 교통봉사를 하거나 마라톤대회 등에서 경찰서 소속으로 봉사하셨다. 눈비 올 때는 교통방송 통신원으로도 활동하셨다.
경산 지역 곳곳에 유00 씨의 발걸음이 미치다보니 받은 상도 많다. 교통부 표창, 국무총리상, 시민상 등 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고향에서 봉사하는 건 남다른 보람이 있다고 유00 씨는 말씀하신다. 안면 있는 분들이 지나가며 건네는 “수고한다” 한 마디에 그렇게 힘이 나셨다고 한다.
사동초등학교 네거리 등굣길 교통봉사도 십 년 정도 하셨다. 오가는 아이들과도 친해져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중학생의 사정을 알고 지인의 장학회에 추천한 일도 있다. 그 학생은 스승의 날에 찾아와 빼빼로를 건넸을 때 마음이 참 훈훈했다고 하신다. 최근엔 자폐가 있는 청년의 집을 정리했다. 쓰레기로 가득한 집을 함께 활동하는 회원들이 깨끗이 청소했다고 한다. 유00 씨는 열악한 처지에 있거나 연로하신 분들을 방문할 때 특히 보람이 있다고 하신다. 운동을 잘하고 또 좋아하다보니 농아인 중학생 축구 감독도 몇 년 하셨다.
유00 씨의 봉사 철학은 간결하다. 봉사는 생각과 몸이 일치해야 하고, 끝까지 책임감을 갖고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요즘은 아내에게 봉사하는 것도 소중한 일과가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부부가 함께 팔공산을 돌고 백숙 드시고 오는 길이었다. 유00 씨는 아내가 허락하면,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꿈이다. 못이나 제방도 만들어주고 토목 쪽으로 도움을 주고 싶으시단다. 중장비 자격증이 유효기간이 있어서 새로 따려고 공부도 틈틈이 하는데 필기시험이 만만치 않다며 씩 웃으신다.
이렇게 성심으로 봉사하는 특별한 계기 같은 게 있냐고 여쭤보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 사회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사회에 고마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신다.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장의 혜택을 한껏 누린 분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분들 중에서 유00 씨 같은 생각을 하는 분은 잘 만나지 못했다. 유00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분이야말로 ‘위대한 평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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