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에서 1950년까지,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이 땅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지금까지 건국에 대한 논쟁은 주로 이승만에 대한 찬반으로 갈렸을 뿐, 대한민국 국가 건설 과정을 상세한 근거 자료를 동원해 되짚어보는 책은 잘 보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객관적 사료를 동원해서 대한민국이 '취약국가'로 출발했고 그 때 지닌 사회내부적 약점이 세계 경제 10위 대국에 오른 지금까지 우리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었는데요. 저자의 주장 중 눈에 띄는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큰 약점은 국가공동체 수립의 필수 조건인 민족주의라는 자원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장 강했던 중도파가 분단의 고착을 우려해서 단독수립 정부에 반대하면서 민족주의라는 이념적 자원이 축소되었습니다. 이어진 반민 특위의 좌절과 친일파 청산 실패 등은 국가와 국민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했지요. 특히 공권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했던 각종 사조직(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의 폐해가 매우 심했고 국가를 폭력적이면서도 이중적인 조직에 의해 작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중졸 이상이 나라 전체에 2만 5천 명이었으니 행정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고 미국의 원조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통상 국가 건설에 소요되는 비용의 26분의 1로 세운 나라입니다. 해방 후 소련이 철저하고 치밀하게 북한 정부 수립을 지원하면서 대규모의 원조를 퍼붓던 것과 달리 한반도는 미국의 일차적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전세계에서 소련과 대치해야 했던 미국은 유럽과 그리스, 터키, 일본보다 한반도가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고 남한에 무력을 증강하면 새로운 분쟁이 일어난다고 여겨 최소한의 자원만 투입해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그 반대로 엄청난 지원을 받았죠.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토지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농토를 배분받은 농민들이 국가에 귀속감을 가질 수 있게 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이 민심을 안정시켰고 이것의 출발에는 민주주의적 대의명분을 내세웠던 5.10선거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최초의 선거가 높은 참여율을 기록하며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분단을 반대한 중도파는 이 투표에 불참하지만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음 투표에서부터 참여합니다. 친일파를 만족스럽게 청산하지는 못했지만 초대 정부에는 독립운동 관련 인사들도 상당히 기용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모든 게 물거품이 된 것은 6.25전쟁 때문입니다. 여순 사건 진압에서부터 그나마 명맥을 잇던 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잃고 안보 세력이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6.25전쟁을 치르면서는 안보 세력에게 권력이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간도특설대 출신 장교들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대한민국은 반공 국가로 자리잡아 갑니다. 민족주의 이념 자원이 부족한 국가는 자신의 취약성을 메우기 위해서 반공과 안보라는 이념을 더욱 강조하면서 국민들에게 권위적으로 군림하였고, 국민들은 국가를 압제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가가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 민족주의적 목소리가 운동권 등 국가 밖에서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으로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은 많이 해체되었지만 사회를 이끌어갈 시민사회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건국을 주도한 것은 이승만 세력이었지만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점 등 국민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지 못해서 그들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좌우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경제 성장을 달성한 세력 역시 오랜 독재와 국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으로 그들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 뒤에 정권을 잡은 민주화 세력과 중산층 시민들 또한 한국의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뚜렷한 색깔과 지향점이 있는 세력으로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주인공이 없는' 국가 건설의 유형을 밟게 되었고, 그 내부적 취약성이 세계 경제대국에 이른 지금까지 연속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시작되었던 안보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간의 대결 또한 70년이 지난 지금도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 건설 초기에 부족했던 많은 자원들이 어느 정도 채워졌지만, 그때 결핍되었던 민족주의 문제는 분단 상황과 맞물려 아직 해결이 요원합니다. 저자는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제 문제보다는 내부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민족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지금 우리의 현실을 풀어나갈 열쇠가 있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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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는가? 왜 청산되지 못한 친일 잔재들을 부끄러워하며 급기야 일본과 외교적으로 극한의 갈등을 빚는 것일까? 왜 우리 정치권은 지금도 극한의 대치 정국을 연출하면서 갈등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왜 우리는 높은 경제력과 교육 수준을 갖추고도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헬조선'을 탄식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할 것인데, 가장 큰 이유는 '취약국가'라는 출발에서 찾을 수 있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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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모든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국가 건설 과정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마저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해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이 주인공 없는 국가 건설로 전락하게 되는 과정과 이유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조망해, 우리가 과거를 딛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삼고자 한다.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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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경험한 후 미군정기와 제1공화국 시기를 맞은 한국에는 국가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먼저 미국이 1947년 7월까지만 해도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미군 철수에 집중하느라 적극적으로 국가 건설에 임하지 않아 한국은 미군정 시기부터 모든 자원이 부족하고 원시적 취약성을 지니는 취약국가로 출발했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소련의 지원하에 신속하게 국가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미군정은 방침을 바꾸고 부일 경찰과 관료들을 투입하는 한편 1947년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를 증가시켜 남북한 간의 불균형을 개선하려고 했으나 공산당은 이러한 미군정의 노력들이 반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폭력 투쟁을 전개했다.
미군정기에 시작된 취약국가의 현실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여전히 물적. 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 갑작스럽게 국가 건설이 결정되고 1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의 건설이 진행되자, 분단국가로의 고착을 우려한 중도파 세력들이 국가 건설을 반대하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라는 이념 자원을 초대 정부 탄생 단계에서부터 충분히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친일파 청산을 시도했던 반민특위의 좌절, 그리고 국가의 허약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공무원들과 우익 청년단원들이 휘두른 폭력 때문에 국민들의 원성이 커지면서 국가와 국민 사이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국가 건설 초기 단계에 다음과 같은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취약국가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은 이승만이라는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미국이라는 선진국의 후원을 획득했으며, 사법 체게와 헌법, 국회, 선거와 민주주의 등 근대국가의 핵심 요건을 제도적으로 갖추었다. 아울러 국민들을 대내외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는 치안과 국방 조직, 그리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관료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제헌헌법 등 임시정부의 상징과 제도를 계승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상징적 정통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와 함께 토지개혁과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해 평등을 추구하는 민족사회와 근대국가의 조건을 갖추어나갔다.
이를 통해 붕괴를 면한 대한민국은 중도파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균형재정을 달성해 점차 근대국가로서의 성격을 획득해갔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각 시기마다 새로운 자원들의 조건이 훼손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전 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자원을 개선하면 다음 단계에서는 다른 자원의 조건이 손상되어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발생해 취약국가의 상태가 지속된 것이다. 특히 국가안보의 과제를 중시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민족주의의 문제가 반복해 나타나,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p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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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미 국무부 극동국 과장이었던 존 빈센트가 1957년 6월 30일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편지를 인용해 "한국전쟁 때까지 미국의 대한 원조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불충분했으며 간헐적으로 행해졌다"고 지적한 헨더슨의 주장은 타당하다. 실제로 미군정의 곡물 수집과 배급, 적산 불하 등을 둘러싸고 공무원의 부정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목격한 좌익 세력들은 이를 다음에 기술할 노동쟁의와 파업의 가장 큰 대의명분 중 하나로 제시했기 때문에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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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제헌의회 선거가 성공을 거둔 데에는 향보단의 역할이 컸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선거사무소 습격 사건이 80건이나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3만 5천여 명의 경관만으로는 도저히 모든 투표소를 지켜낼 수 없어서 향보단을 조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원칙적으로 향보단원들은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일부 향보단원들은 기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과잉 행동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향보단은 선거 이후 민보단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
그러나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 폭력의 일부가 되면서 부작용 역시 심화됐다. 우선 국가 예산의 부족으로 이들은 비합법적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모금한 강제적 내지 자발적 기부금이 국가 세입의 거의 절반에 달했다. 또한 국가기구 역시 공식 조직과 비공식 조직으로 분리되어 국가가 이중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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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당시 공직에 입문한 사람들이 대부분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운동에 참여해 민족공동체 의식의 고조와 국민 단결에는 공헌했지만, 전문적 행정 능력을 갖춘 경우는 드물었다는 점이었다. 초대 주한 중화민국 대사 사오위린은 3천만 한국인 가운데에서 2~3천 명의 행정 간부조차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은 한국인의 재간과 지혜를 모욕하는 일이라고 진술했지만, 사실 그의 판단보다 상황은 훨씬 더 복잡했다.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가 판단한 것보다 수십 배가 넘는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실무를 알든 모르든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통틀어 2만 5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같은 인재 빈곤 현상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한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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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생하기 직전에 국가는 균형재정을 달성하고 빨치산 등의 내부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1950년 4월 28일 미 정부 관리는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대한민국이 정치, 경제상의 위기를 모면했으며 앞으로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지만 국가의 존립과 민주주의적 발전의 기초가 확립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이승만 정부가 무력 통일을 시도할 것을 우려했던 미국 정부의 우려와는 달리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인민해방군 출신 3개 사단 병력이 1949년 하반기부터 중국에서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1950년 4~5월에는 소련이 북한에 군용 트럭과 탱크, 항공기, 중화기 등을 대량 공급했다. 이로써 남북한 간의 군사력 대결에서 북한이 병력 수와 병기 모두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
이에 반해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전쟁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미국은 중국 내 상황이 악화되어 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자 한국에 이전보다 큰 규모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경제적, 이념적 봉쇄 차원에서 행해졌을 뿐이며, 전략적 가치가 그리스, 터키, 일본 등에 비해 떨어져 직접적인 군사력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없이 살아남아야 했다. 만일 이렇게 해서 계속 살아남는다면 한국을 트로먼독트린의 하나의 성공 모델로 삼아 계속 지원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방침이었다. (...)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소련과 맞서고 있던 미국은 한반도의 공산화가 미국의 위신 추락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가능한 한 세력 균형 상태가 유지되어 더 이상의 자원을 투입하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에 반해 소련과 중국은 중국 대륙을 포기한 미국의 태도가 한반도에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해 북한의 침략을 용인했기에 마침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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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석은 국회 초기에 미군정과 일제강점기 관리들을 가급적 내각과 정부에 등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최대한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기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대중들의 열망을 국회에서 대변했다. 하지만 민족주의 이념을 국가 건설 과정에서 극대화할 것을 주장했던 그조차도 국가안보가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자 행정상의 필요성 때문에 경찰들의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듯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부터 부일 경찰들의 처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여수.순천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의 전쟁 상태가 전개되자 점차 국가안보가 최우선시되면서 차츰 그 목소리를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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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는 2차대전이 막 종결되어 아르헨티나에 단돈 1달러에 전투기를 인도하면서도 한국에는 전투기를 공급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주한 미군을 철수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30대의 경폭격기를 한구군에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고철로 분해해서 판매했다. 김정렬은 고육지책으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추진해 1950년 5월 14일경 캐나다로부터 연습기 10대를 들여올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미국은 군사력을 증강하려는 한국의 시도를 최대한 억제하고, 미국의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가시적 성과를 보일 수 있도록 경제개혁에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만일 한국의 재정 위기가 계속된다면 중국에서 그랬듯 미국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반증이 되어 야당인 공화당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9년에 급증했던 국방비 비율이 한국전쟁이 발생했던 1950년에는 오히려 1948년보다 감소했던 것이다. 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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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존재는 남북의 충돌이 전쟁 수준으로 격화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정병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일본군과 만주군 경력을 지닌 서북 출신들이 38선 부근의 주요 지휘관들로 배치되면서 남과 북이 서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대결을 펼쳐 긴장이 고조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김일성과 최현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은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자신들을 토벌했던 개성의 제1사단장 김석원과 옹진 지구 전투사령관 김백일 등에게 크나큰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초반부터 미군 철수가 본격화되고 북한에 대한 소련의 군사 지원이 증가하자 한국 정부는 미국의 개입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당시 한국의 지도부는 미국이 한국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데 회의적이었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영국이 공산화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것은 북한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미국 역시 영국의 뒤를 따라 대만을 버릴 것이고 한국 역시 똑같은 운명에 놓일 것을 에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승만 역시 애초에 한국만을 위해 전쟁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국제 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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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를 주도했던 이기택 역시 이승만이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의 가장 큰 죄과 중 하나가 정부 수립 초기에 일제 부역자를 등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나아가 김동춘은 식민지 청산의 시대적 과제가 좌절되면서 형식적으로는 일제 부역 세력이 친미 정권의 주역으로 옷을 갈아입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자주독립 국가 건설의 법적, 도덕적 초석이 될 수 있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원칙,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본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분노를 이용한 공산 세력들이 이를 자신들의 반란에 대한 주된 명분으로 삼아, 좌익 사상을 추종하지 않았던 많은 양민들까지도 좌익의 반란에 동조하거나 이를 방조하는 과정들이 반복되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여수.순천 사건 당시 반란군들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하고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분쇄되어야 하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충성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나아가 이들은 부당한 적산 가옥 접수 등을 통해 경제력을 독점한 친일 세력이 식량을 밀거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김구의 남북협상을 통한 통일 정부의 수립 방침에 찬성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에게 반대하고 있었던 사람들과 배급 식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당시의 경제 상황과 경찰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주민들이 이들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사건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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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사건 당시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당하고 개인적인 원한 관계 때문에 처형이 자행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폭력을 담당하는 공권력의 취약성이 있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제주 4.3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당시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후 전라북도 지역의 5사단장을 역임했던 백선엽은 군 장교가 예전에 당한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 마을을 방화하는 등 개인적인 복수를 자행해 주민들의 민심이 악화되었다고 지적했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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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순.사건 이후) 국정 혼란의 이면에는 여전히 행정기관에서 복무하는 부일 협력 관리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여론 역시 군과 경찰 분야의 좌익 동조자 정리를 해결책으로 요구하면서도 친일 잔재 청산을 통해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따라서 민심 수습 차원에서라도 일부 부일 관리의 제거가 필요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범석이 김구와 한국독립당 인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범석이 김구와 한국독립당 인사를 거론한 것은, 우파 청년단체 등으로부터 좌파 세력을 비호한다는 이념적 의심을 받고 있던 그가 임시정부 측과 공모해 정권을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세간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즉 생존에 급급해진 국가가 민족주의적인 흐름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이를 적대시한 것이다. p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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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6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농지개혁 법안에 따라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귀속감은 증대되었다. 즉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농지개혁 실시를 계기로 단초가 마련되었고, 국가에 대한 귀속감과 국민적 정체성에 공감한 농민들에 대해 국가 차원의 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국민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초대 국회의 산업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서상일은 농지개혁 법안을 합법적 사회혁명과 경제혁명의 표현이라고까지 주장했다. (...)
이렇게 제1공화국 수립 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농지개혁을 통해 반봉건적인 지주의 토지 소유가 타파되고, 농민에 의한 토지 소유가 확립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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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개혁 성공의 이면에는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조봉암의 공로가 매우 컸다. 물론 조봉암을 발탁한 것은 이승만이었으므로 이 역시 이승만의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 출신의 조봉암이 국회의 소장파들과 친이승만 세력들의 후원을 바탕 삼아, 지주 출신들로 구성된 한민당을 견제하고 과감한 정책들을 추진했기 때문에 이승만 역시 좌파의 공세를 차단하고 한민당의 경제 기반도 약화시키며 농민의 지지도 확보하는 1석 3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p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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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와 제1공화국 초기의 국가는 국가 건설을 위한 거의 모든 자원이 부족했고, 정치적 정통성과 부르주아라는 정치적.사회적 메커니즘 역시 갖추지 못해 전제적 권력과 하부구조적 권력 모두가 낮았던 취약국가였다. 하지만 이념 자원을 극대화한 국가 건설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지닐 수 있는 제헌헌법 등의 이념 자원을 앞세워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증가시켜 국가의 자율성을 확대시킴으로써 파탄국가나 붕괴된 국가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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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에서 취약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탄생할 때부터 민족주의를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위기가 한국전쟁 이후 본격화되었다. 스스로 민족주의를 흡수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국가는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항상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의도적으로 감추기 위해 과도하게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국 국가권력의 피해자가 된 국민들에게 국가는 전제적이고 억압적인 존재로 비치게 되었다. 국가 폭력에 대해 공포와 피해의식을 갖게 된 국민들은 민족주의를 주장했다. 국가 역시 국가 밖에서의 민족주의 요구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극단적인 국가주의를 부르짖는 제도권과 국가 밖에서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권 사이의 대결이 심화되었다. 결국 한 국가 안에 민족주의적 성격과 반민족적 성격이 혼재하면서 국가의 민족과 국민에 대한 태도, 그리고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태도 역시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혼란이 지속되었다. 국가가 국민의 불신 속에 민족주의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적.경제적.물적 자원의 부족 때문에 이념 자원을 국가 건설 과정의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역시 벌어졌다. p272-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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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모든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재연되어 반공, 반일 등과 같은 이념 자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됨으로써 국민들이 지치기 시작하고 이념 자원의 가치가 하락했다. 특히 일민주의의 경우 국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던 이승만 역시 점차 추락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자원이 부족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가운데 국가 건설의 주체가 모호해졌다. 그라마 이승만과 조선민족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 등이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나, 이들도 무리하게 이념 자원을 통해 자원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취약성을 깊이 인식한 나머지 조급해하며 국민들에게 전제 권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국가 운영, 유지 방식 때문에 이들은 국민들에게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은 주인공이 없는 국가 건설이라는 유형으로 진행되었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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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다른 곳의 자원을 투입해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임기응변 방식은 군사령관들이 직접 국가를 통치한 군부 통치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악순환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국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해 부르주아를 육성하고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과제에 매진한 결과 경제적.물적 자원의 취약성을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부르주아지가 자체적으로 형성되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육성되었기 때문에 헤게모니를 지닐 수 없었고, 시민사회의 등장 역시 지체되었다. 한국의 지도자가 된 부르주아지는 미군정과 제1공화국 시기에 일본이 남기고 간 적산 불하 등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이후 출현한 권위주의 정부들이 추진한 노동 탄압 정책, 특혜 금융 및 세금제도 등의 친자본적 정책의 최대 수혜자들이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이렇게 한국의 부르주아지는 물적.경제적 자원은 확보했지만 이념적 권력 자원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군부 통치가 장기화되면서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자 이념 자원은 저하되었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한 중산층이 이들을 대신해 시민사회를 주도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로 중산층이 중심이 된 민주화 혁명을 통해 권위주의 통치가 종식됨으로써 정치적 정당성이 제고되고 이념적 권력 자원 또한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신속한 국가 수립 일정과 짧은 자본주의 도입 역사로 인해 스스로의 뚜렷한 문화와 윤리, 정체성 등을 가질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국가가 자원 동원의 대가로 국민들에게 제공하던 분배의 규칙이 1997년 IMF 경제 위기로 무너져, 협상을 통한 시민사회로부터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라는 측면이 줄어들었고 국가의 이념 자원 역시 감소했다. 이와 함께 중산층의 경제적.물적 기반이 침식되어 한국의 시민사회는 여전히 서구에 비해 확고한 지향점을 지니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p278-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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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정치적 정당성이 감소한 상황에서, 국가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이후에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나아갈 지향점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이념 자원의 취약성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수립 초기에 직면했던 각종 자원들의 취약성을 상당 부분 극복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국가 건설이 진행 중인 미완의 국민국가에 머무르고 있다.
한편 국제정치적 자원 부족의 문제 역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거나 미군 철수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그 모습을 달리해 재연되어 취약국가의 현실을 제약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이념 자원의 취약성이 군부 통치 시기보다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국가가 흡수하지 못한 민족주의가 중시했던 남북 분단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
오히려 경제발전과 함께 진행된 민주화로 인해 운동권을 중심으로 국가 밖에서 머무르고 있던 민족주의적 목소리가 국가 내부의 제도권으로 진입해 국가 중심주의와 충돌했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 한국 내부에서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을 부르짖는 집단과 여전히 국가 중심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국가안보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집단 사이의 갈등이 심화됨으로써 이념 자원이 저하되었다.
한편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과제를 중시하는 이들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한 국민들은 통일의 과제와 정치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집단들에게 기대를 품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건강보험이나 노인에 대한 사회복지, 직접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여권 신장이 선물로 주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의 기대는 흡족할 정도로 충족되지 못했고, 오히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과제를 중시하는 이들의 정치적 정당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이념 자원과 국제정치 자원의 훼손 문제가 모습을 달리해 나타나 취약국가의 현실이 여전히 반복되고 지속되는 가운데, 비슷한 국력을 보유한 다른 국가들과 달리 우리는 남북 분단의 현실로 인해 민족주의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함으로써 이념 자원과 군비확장 취약성의 문제를 계속 안고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p28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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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국제정치의 문제보다는 상대적으로 우리가 내재적 노력을 기울여 개선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느냐가 매우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는 항상 모습을 달리해 살아남아왔고 지금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이념인 민족주의가 쥐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대에 어쩔 수 없이 가장 중시되었던 이념 자원인 민족주의가 또다시 중요해지는 취약국가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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