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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시와 소설

그 여름의 끝, 우리는 / 권재원

by 릴라~ 2023. 5. 21.

주말 오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난 후, 여운이 종일 간다. 무언가 찡하고 뭉클하다. 아마도 이 책이 와니와 써니, 두 여교사의 성장기를 다루었기 때문이리라. 두 인물들의 경험 세계가 나와 겹쳐지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들의 고군분투가 내 젊은 날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전혀 다른 성장 배경을 지닌 와니와 써니, 중학교 같은 반 친구인 둘은 교직에서 서로 만난다. 유복했던 와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사가 되었고, 형편이 어려웠던 써니는 기간제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몇 년 늦게 발령을 받는다. 그렇게 교단에서 만난 둘은 서로를 보듬으며 학교와 교실에서 맞닥뜨린 현실을 헤쳐나간다. 각각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면서도 사실적이고, 이들의 중학생 때의 이야기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아주 재미있고 속도감 있게 읽혔다. 

 

하지만 교육 장편소설이라기엔 살짝 의아함이 있다. 이 소설은 교육현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룬다기보다는 교사가 직업인 두 젊은 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에 가깝다. 두 사람의 연애와 남자친구와의 관계, 어릴 때의 가정적 배경, 그로 인해 형성된 삶의 태도 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소설이다. 학생과의 갈등, 학교의 구조적 모순 등도 등장하지만 젊은 여성이 세상을 헤쳐가는 부분에 더 초점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두 젊은 여성의 성장기라고 부를까. 그러기에도 조금 미진한 점이 있긴 하다. 그들이 삶의 문제들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헤쳐가는 점은 잘 그려냈지만, 그들의 정신 세계와 삶을 대하는 방식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변화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가는 구체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학창 시절과 교직에서의 경험, 개인적인 사생활 등이 교차하며 엮어져 있어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와니와 써니는 88년생이라는데, 와니가 겪은 데이트 폭력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고다니는 쿠퍼도 실감이 덜했다. 내가 그들보다 한참 나이가 많고, 나 또한 남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해 무척 애를 먹기도 했지만, 내가 여성이어서 약자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돌이켜보니 나는 나 자신을 약자로 규정한 적이 없으며, 여성이어서 위험을 느끼거나 피해를 봤다는 경험도 많지 않다. 어쩌면 내 개인적인 특성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키가 169여서 덩치 큰 학생들 앞에서 위압감을 느껴본 적도 없는데, 자그마한 체구의 여교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학생의 성희롱 사건에 대한 학교당국의 대처는 지금도 현실이 나아지지 않아서 씁쓸하게 읽었고, 일진 하나가 전학 오니 평소엔 존재감 없던 그 아래급의 양아치들이 모두 기가 살아서 들썩거리는 이야기는 배꼽 잡으며 읽었다. 저자는 천자를 알현하려는 제후들의 행렬이라 표현했는데, 딱 맞는 비유다. 

 

이야기 중간에 와니와 써니의 스승, 오석 샘이 간간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분 말 몇 마디가 촌철살인이 많다. 이 책을 읽노라니 저자인 권재원 쌤의 사회수업을 내가 학생 때 받아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워낙 지적인 분이라 잊을 수 없는 수업이 되었을 듯하다. 물론 이건 사회수업에 한해서이고, 페이스북을 보면 이분의 정치적 판단이 영 이상할 때가 많은지라(미중 갈등에서 미국에 줄 서야 한다고 강력 피력함. 우리가 주체적으로 양국의 중재자가 되면 안 되나.) 역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구나 싶지만. 정치적 판단만 문제되는 게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논리의 비약이나 왜곡이 너무 많음. 

 

오석 샘이 교사를 지사형, 공무원형, 훈장형, 지식인형, 양육자형, 그리고 좀비로 분류한 것도 재밌었다. 이 분류는 학교 뿐 아니라 모든 곳에 다 적용되겠지만. 좀비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다. 

 

책장을 덮으며 기억하고 싶은 오석 샘과 와니 샘의 대사를 남겨본다.

 

"행복은 자격 조건이 아니란다. 행복은 권리이자 의무야.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행복을 누릴 의무가 있어.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는 건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는 거야.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면, 짐승이지." p86

 

"사람은 자연 환경, 사회 환경이라는 두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해. 자연과 대화하고, 사회와 대화하며 살지. 자연의 언어는 수학이고, 사회의 언어는 개념이야. 개념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와의 대화를 독점하면, 거기서부터 불평등이 싹터. 사회와 대화하는 능력을 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게 된다면 민주주의라는 건 그냥 장식에 불과해. 난 아이들이 이 개념을 읽을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도록 할 거야.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거야."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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