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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뉴질랜드

[뉴질랜드] 자연의 침묵 속에 머물고 싶어라 - 마운트 쿡(Mount Cook)

by 릴라~ 2005. 2. 16.
 
자연의 침묵 속에 머물고 싶어라~
[여행기] 뉴질랜드 최고봉 '마운트 쿡'에 가다
 
 
 
 

▲ 후커 밸리 트렉에서
 
 
 

야생의 세계, 그 자체로 충만한 자연의 존재 없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을까. <모래군의 열두 달>의 저자 알도 레오폴드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었다. 야생 세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그는 계속 이야기한다. 더 높은 생활 수준을 위해 자연의, 야생의, 그 자유로운 무수한 것들을 희생시켜도 되는가라고. 텔레비전보다 기러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더 고귀하며, 할미꽃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언론의 자유만큼 소중한 권리라고.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편리한 생활의 대가로 많은 것이 멀어졌다.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 바람과 일몰,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소중한 선물들이 이젠 사치가 되어버린 건 아닌지.

몇 날 며칠 동안 원없이 숲 속을 걸을 수 있다는 기대로 뉴질랜드 여행을 계획했다. 뉴질랜드에는 'Great walks'라 불리는 아홉 개의 주요 트렉을 비롯해서 하루에서 수일이 걸리는 수많은 트렉이 있다. 여행 기간은 20일,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북섬을 제외한다면 여유로운 일정이 가능해 보여서 남섬 일대만 찬찬히 돌아보기로 했다.

1월 2일, 열한 시간 반을 날아온 비행기는 짙게 깔린 구름을 뚫고 인구 34만, 남섬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크라이스처치(Christchurch)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처음 본 이 땅은 구름 너머로 짙푸른 산맥이 가득한 모습. '아오테아로아'를 떠올렸다. 최초의 마오리인들은 이곳을 아오테아로아(Aotearoa), 즉 '길고 흰 구름의 나라'라고 불렀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불과 15분의 거리였다. 잔뜩 흐린 데다가 기온은 15도에 불과해서 여름이라곤 믿기지 않는 날씨였다. 그래서인지 도시는 다소 우울하게 보였다. 나의 감각이 이젠 다소 녹슨 것일까. 예전엔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있던 병도 사라질 만큼 생기에 넘쳤는데, 그런 설렘 대신에 근래엔 익숙한 것이 자꾸 편하게 느껴지곤 한다.

크라이스처치의 YHA(유스호스텔)는 만원이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마운트 쿡(Mount Cook)도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대강의 스케줄은 머리 속에 넣고 왔지만, 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선택하며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라서 아무 것도 예약하지 않고 그냥 날아왔다. 책에서 읽은 것과 현지 사정이 다른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날 숙소 정도는 예약해둘 걸 하는 후회를 잠시 하며, 가까운 백패커에서 짐을 풀었다. 필요한 몇 가지도 살 겸 해서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날씨가 왜 이렇게 춥냐고 물으니 요즘 이상저온 현상이 잦다고 한다. 크라이스처치에 더 머물 가치는 없어 보였다. 박물관은 돌아올 때 보기로 하고, 다음 날 마운트 쿡행 버스표를 예매했다.

나는 미리 예약해둔 밀포드 트레킹 때문에 6일까지는 퀸즈타운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숙소를 구하지 못했어도 일단 그 중간쯤에 있는 마운트 쿡 국립공원까지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해발 3754m의 마운트 쿡은 뉴질랜드의 최고봉으로 YHA와 글렌코에 롯지, 호텔 헤미티지와 헤미티지 소속의 모텔이 숙박 시설의 전부이다.

흐린 날씨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홀로 있음이 낯설어서인지 첫 날은 다소 가라앉은 마음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여행에 적응하는 데는 하루로 충분했다. 다음 날, 새벽 샤워를 마치고 짐을 꾸려 시가지로 나설 때부터 가벼운 발걸음만큼 마음도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평일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시내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을 만큼 한적하다. 나는 이곳의 '느림'에 몸을 한 번 맡겨보기로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목초지와 양떼들 사이를 오전 내내 달리던 버스는 정오 무렵 테카포 호수에 닿았고 잠시 정차했다.


 
▲ 테카포 호수, 주위에 루펀 꽃이 만발해 있다.
 
 
 

레이크 테카포(Lake Tekkapo). 뉴질랜드에서 처음 만난 호수의 물빛은 내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흐린 날씨도 이 호수가 뿜어내는 짙은 에메랄드 빛을 가로막진 못했다. 태고적 모습 그대로의 깊은 고요를 간직한 곳.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 버스는 거기서 한 시간쯤 더 걸리는 마운트 쿡으로 향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또 다른 호수 푸카키의 맑은 빛이 차창을 메운다.


마운트 쿡 빌리지가 가까워 와서야 비로소 약간의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200달러나 주고 헤미티지에서 자야 하나 염려하는 사이에 버스는 YHA 앞에 정차했다.

나는 무척 운이 좋았다. 마침 딱 한 명이 취소했다고 한다. 비바람 때문일 것이다. 여기 이틀 머물 예정이지만, 하루는 해결이 되었다. 값싸고 편안한 통나무집에서 쉴 수 있게 되어 날씨 걱정을 비롯한 다른 모든 걱정이 날아가 버렸다.

산행 지도를 구하러 관광 안내소에 들르니 1달러에 판매하고 있었다. 헤미티지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공짜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늦은 점심을 준비하려는 차에 같은 버스를 타고 도착했던 룸메이트, 프랑스 여성인 무리가 짧은 산행을 가자고 한다. 자기는 배가 안 고프다며,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단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어 혼자보다는 둘이 안전할 것 같았다. 내일 본격적인 트레킹에 대비해서 몸도 풀 겸 가까운 언덕길 '레드 탄즈 트렉(Red tarns treck)'으로 함께 나섰다. 왕복 두 시간 코스였다. 시간은 이미 오후 세 시가 가까운지라 나는 다녀와서 점심 겸 저녁을 들기로 했다.


 
▲ 레드 탄즈 트렉에서
 
 
 

레드 탄즈 트렉에는 계단이 많았다. 우산을 받쳐쓰고 계속되는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빗줄기가 워낙 거세서 바지는 금세 젖어들었지만 이곳의 비는 깨끗해서 맘껏 맞아도 된다. 그 사실이 내게 자유를 주었다. 안개와 구름이 끊임 없이 오고 갔고 마을은 저 멀리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반환점에는 레드 탄즈(붉은 연못)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붉은 풀이 자라는 작은 연못이 둘 있다. 청량한 공기 속에서 마음은 그저 신이 났다. 구름이 점차 걷히자 3000미터급 고봉들을 덮은 거대한 빙하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빙하가 흘러내린 산들의 자태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 레드 탄즈 트렉에서 바라본 마운트 쿡 빌리지와 산을 덮은 거대한 빙하들
 
 
 

돌아오니 배가 고파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무리는 비스킷으로 그냥 때우겠다고 한다. 중국에서 호주를 거쳐 6개월째 여행 중이라 극도로 절약하는 모양이었다. 같이 먹자니까 괜찮다고 해서 식당에서 혼자 햇반을 데우는 데 도저히 혼자 먹을 수가 없었다. 그 빗속에 오르막길을 그렇게 올라갔는데 얼마나 시장할까 싶었다. 다시 부르러 가서 네 밥도 이미 해놓았으니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자 반갑게 웃으며 따라나선다.


식당에 앉으니 비가 그쳐 창 밖에 무지개가 걸렸다. 사진기를 가지러 갔다 오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잠깐 내 영혼에 살짝 다가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진 아름다움. 내일 날이 밝을 것 같아서 무척 기대되었다.

아침, 하늘은 청명하다. 다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이곳에서 맑은 날을 보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마운트 쿡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후커 밸리 트렉(Hooker Valley Treck)으로 출발했다. 안내서에는 왕복 네 시간 코스라고 적혀 있지만 그건 헤미티지 앞에서 출발했을 때의 경우이고, YHA 앞에서 출발하면 다섯 시간은 잡아야 한다.


 
▲ 마운트 쿡 빌리지 주변의 풍경
 
 
 

트렉 초반에 알파인 메모리얼을 만났다. 초원 사이로 이어지는 트렉을 걷다보면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추모탑을 보게 된다. 마운트 쿡은 매우 위험한 산으로 이 일대의 산들을 오르다 죽은 등반가들이 무려 200명이나 된다. 지금도 해마다 한두 명씩 목숨을 잃는다고 들었다.


언덕에 서니 드넓은 초원이 끝나는 곳에서 푸카키 호수의 연푸른 빛이 반짝이고 있다. 셀파 텐징 노르게이와 함께 1953년에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도 뉴질랜드 출신이다. 마운트 쿡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산이라고 한다.

추모탑에 붙어 있는 동판들을 읽으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대부분이 불과 이십대 초반의 나이로 이 산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가족과 친구들이 사랑과 그리움으로 새겨둔 글귀들이 가슴을 잔잔하게 파고들었다.


 
▲ 알파인 메모리얼
 
 
 

'Forever in the mountains'

산과 함께 영원히.

'The mountains were your passion and now you rest among them.'
산은 너의 열정이었지. 이제 너는 그 가운데 쉬고 있네.

'Our beloved son will always be in our hearts. Sadly missed by all his family and friends.'
사랑하는 우리 아들은 항상 우리 가슴 속에 있을 거야. 슬픔과 그리움으로, 그의 모든 가족과 친구들이.

'I am in the mountains, I am in the stars, I am all around you, always near, not far.'
나는 멀리 있지 않아. 산 속에, 별들 속에, 언제나 너 주위에 가까이 있어.

'For solitude sometimes in best society. -milton'
가장 훌륭한 사회에서도 때로 고독을 위하여. -밀튼


 
▲ 뮬러 전망대에서 바라본 후커 강
 
 
 

알파인 메모리얼을 지나자 후커 강이 나타났다. 세찬 물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우윳빛이 도는 강물을 보며, 테카포와 푸카키가 왜 그처럼 아름다운 빛깔, 흰 물감을 살짝 풀어놓은 듯한 푸른 빛을 띠고 있는지를 짐작한다. 주위로는 3157m의 마운트 세프턴(Sefton)과 세프턴으로 흘러내리는 뮬러 빙하가 황량하면서도 웅대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후커 강을 건너서 얼마쯤 더 가면 세프턴 산 바로 아래, 뮬러 빙하가 녹아 이루어진 호수에 이르게 된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떠 있는 회색 호수와 빙하가 할퀴고 잘라낸 거친 산세가 자연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눈과 얼음이 박힌 바위산의 경사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 호숫가 언덕에서 바라본 바위산
 
 
 

호수를 벗어난 트렉은 다시 가파른 절벽 아래로 이어졌고 두번째 흔들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가자 비로소 마운트 쿡의 전모가 눈 앞에 환히 펼쳐졌다. 정면에서 마주선 그는 당당하고 굳건한 자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산의 마오리 이름은 아오라키(Aoraki). '구름을 자르다', 혹은 '구름을 뚫고 지나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뾰족한 삼각의 꼭대기가 늘 구름 위로 솟아 있기에 붙여진 이름. 18세기 말에 뉴질랜드를 탐험했던 영국 선장, 제임스 쿡의 이름을 딴 마운트 쿡보다 몇 배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꼭대기 주변에 머무는 정적이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수천 만년 구름과 바람만이 오간 아오라키의 꼭대기에는 하얗게 빛나는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침묵을 통해서 그가 간직한 신비의 한 자락이 내게 전해져왔다.


 
▲ 아오라키 마운트 쿡
 
 
 

계곡을 따라 걸을수록 아오라키는 점점 가깝게 다가온다.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넘게 지났을 때 드디어 후커 밸리의 종점, 빙하가 만들어낸 터미널 호수에 도착했다. 물은 석회질 때문에 하류보다 더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군데군데 얼음이 남아 있었다.


자연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생생한 몸짓이 곳곳에서 보였다. 빙하는 녹아 폭포가 되어 쏟아져내리고, 주변 나즈막한 언덕에는 야생화가 노랗게 피어 흩날린다. 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부는지 더 머물지 못하고 곧 돌아나왔다.


 
▲ 터미널 호수에서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는 완만한 트렉이 조금 아쉽게 느껴진 까닭은 우리 나라 산에 익숙해서이리라. 그리 높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오르락 내리락, 길이 주는 온갖 매력을 다 갖춘 것이 우리 산. 모롱이를 돌 때의 정겨움과 능선을 타고 걷는 길의 즐거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꼭대기에 올랐을 때의 신명이 여기엔 없다. 우리의 산은 사람을 쉽게 환영한다.


대신에 이곳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시사철 눈으로 휘감긴 산, 빙하가 할퀴어낸 절벽, 안개와 구름, 그리고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대자연의 침묵. 그 어떤 경치보다도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자연의 그 침묵이다.

자연의 신성한 침묵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 곳은 네팔의 히말라야였다. 그 산을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해버릴 만큼 존재의 숭고한 기운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는 곳. 그곳에 서면 마치 시간과 공간의 경계 밖, 이 세계의 끝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이후로 히말라야는 어느 곳에 가든지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 어떤 곳도 그 산만큼 경이로운 침묵으로 나를 부르지는 않았다.

도시 속 침묵은 때로 질식할 것 같지만, 자연 속 침묵은 우리에게 고독과 동시에 깊은 평화를 안겨 준다. 삼라만상은 동일한 근원을 향해 움직인다. 그 사실을 알아볼 때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열리고 우리를 내리눌렀던 무거운 짐이 사라져버린다. 인생의 비참함은 잊혀지고 삶은 자신이 지닌 고유한 빛과 향기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돌아와서도 행운은 계속되었다. 아침에만 해도 숙소에 자리가 없었는데, 산행을 마치고 체크해보니 또 한 자리가 생겼다. 직원이 너 참 운이 좋다며 웃는다. 나는 앞으로 숙소를 찾느라 수고할 필요 없이 가능하면 YHA를 이용하기로 하고, 다음 날 퀸즈타운 YHA를 예약했다.

마운트 쿡에서의 마지막 한때. 차 한 잔과 함께 보낸 저녁 나절의 휴식은 참으로 감미로웠다. 몸은 나른했지만 마음은 평온함과 온기로 차올랐다. 산행은 늘 그렇다. 무언가 비워지고 무언가가 채워진다. 내 허파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충분한 산소가 공급된 것 같았다.
 
 
 
이 기사는 2005년 1월 다녀온 뉴질랜드 여행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005-02-16 14:50
ⓒ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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