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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뉴질랜드, 기타

[뉴질랜드] 세상의 첫 일주일을 보았으니... - 밀포드 트렉(Milford Trek) 3

by 릴라~ 2005. 3. 31.
세상의 첫 일주일을 보았으니…
[뉴질랜드 밀포드 트렉 3] 54km를 완주하다

 
트레킹 넷째 날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했다. 건너편 산봉우리에 구름 한 자락이 걸려 있는 은은한 아침, 맑은 날씨가 참 반갑다. 오늘 걸을 구간은 퀸틴 롯지에서 밀포드 트렉의 종점 샌드플라이 포인트까지 21km이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제 본 서덜랜드 폭포가 멀리서 보였다. 산 전체를 향해 시원스레 내리떨어지고 있는 모습이 신선하다. 바로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와는 달리 길게 떨어지는 폭포의 윗 부분이 드러나서 580m라는 높이가 실감이 났다.


▲ 서덜랜드 폭포

사람들이 지구를 차지하기 전의 자연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곳에서 인간과 자연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만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절벽과 호수와 폭포…. 신이 빚은, 거대한 빙하가 빚은 작품.


이처럼 풍요롭고 완전하며 스스로 충만한 자연은 내게 약간의 외로운 감마저 들게 했다. 인간의 고뇌의 흔적이 없는 자연, 인간과 호흡해온 역사가 없는 자연이 내게 주는 느낌이었다. 뉴질랜드는 폴리네시아인들이 정착하기 전까지 약 8000만년 동안 완벽하게 고립된 채 유지되었다. 천지창조 후 일주일 쯤 지난 곳 같지 않더냐고 친구는 물었다. 시간을 거슬러가면 초창기 지구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겠냐고.

처음의 순수를 간직한 곳, 상처 입지 않은 온전한 자연. 이미 순수의 시대를 지난 나는 이 해맑음과 싱싱함이 그리워진다. 태초의 온전함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가슴이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느껴질 때면 삶에 부서지기 전, 푸르고 싱싱한 나를 꿈꾼다. 이미 먼 길을 떠나왔으나, 돌아가는 방법이 없지는 않으리라.

트렉은 우림을 지나 절벽을 따라 이어졌는데 곳곳에 많은 비로 나무들이 휩쓸려 떠내려 와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눈과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바위산이 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 밀포드 트렉

▲ 아서 강

약 두 시간쯤 지나자 길은 아서 강(Arthur River)에 이르렀다. 강을 가로지르는 긴 흔들다리를 건넌다. 걷다가 푸른 하늘을 담고 흐르는 강의 고요한 정취에 녹아들어 멈추어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깊고 느린 강의 숨결을 따라 내 호흡도 차분해졌다.


강을 건너서는 숲길에 접어들었다. 이끼 가득한 초록의 숲에서는 맥케이 폭포(Mackay Falls)가 흰 물보라를 뿜어내며 신나게 우리를 맞이했다. 숲의 맑은 기운과 폭포로 만들어진 샘의 청아한 물빛이 주위를 싱그러움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숲을 벗어나자 탁 트인 길이 나왔고, 주변 경치가 눈에 환히 들어왔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길을 즐겁게 걷노라니 길은 다시 숲속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른편에서 아다 호수(Lake Ada)가 나타났다. 물이 얼마나 투명한지 호수 바닥에는 잔물결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까지 그대로 비쳐 보였다.


▲ 밀포드 트렉

▲ 아다 호수

출발한 지 약 다섯 시간 쯤 지났을 무렵 자이언트 게이트 폭포(Giant's Gate Falls)에 도착했다. 점심 샌드위치를 들기에는 멋진 장소였다. 시원한 폭포수 아래에서 마지막 휴식을 즐겼다.


트렉은 강과 호수를 따라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전날까지 느끼지 못했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배낭을 맨 어깨가 부담스러울 만큼 아파왔고, 오른쪽 발뒤꿈치에도 말썽이 생겨서 걸을 때마다 조금씩 따끔거렸다.


▲ 밀포드 트렉

길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남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길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샌드플라이 포인트(Sandfly point)가 거짓말처럼 눈 앞에 나타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일곱 시간의 트레킹 끝에 드디어 54km 밀포드 트렉의 종착점에 도착한 것이다. 샌드플라이 포인트는 샌드플라이라는 자그마한 파리들이 들끓고 있어 붙은 이름이다.


우리는 완주를 축하하며 처음 출발했을 때처럼 다시 배로 옮겨탔다. 아쉬운 마음으로 나흘을 머문 밀포드 트렉과 작별하고 밀포드 사운드로 향했다. 숙소는 바닷가에 면한 미트르 피크 롯지였다. 호텔방에서 내다보는 전망이 근사했다. 푸른 바다 그리고 그 뒤로 버티고 있는 미트르 피크(Mitre Peak)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밀린 빨래를 하며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일은 그때 터졌다.

열 명쯤 둘러 앉은 우리 테이블에서 수석 가이드 안젤라가 일본 관광객들의 우스운 행동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독특한 발음을 흉내내며 폭소를 터뜨렸다. 주위 사람들이 다 웃고 난리가 났는데 나는 그 반대로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그들과 함께 웃을 수가 없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당사국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것인지. 안젤라는 나를 의식했는지 평소보다 두 배나 빠른 속도로 이야기했지만, 대화 속에 끊임 없이 등장하는 저패니즈라는 단어와 내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본인들의 행동거지에 대한 묘사로 인해 나는 대화의 내용을 거진 다 이해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어색해하며 내 눈길을 피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 테이블은 정말 썰렁해졌다. 나도 기분이 완전히 상했다. 자신이 그렇게 바보같이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대체 영어가 뭔지, 영어 못하는 서러움을 단단히 맛보았다. 속상해서 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도저히 파티에 참석할 기분이 아니어서 롯지에서 나와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돌이켜 보면 사소한 일에 왜 그리 예민하게 굴었을까 싶다. 무례한 사람들은 그러라 하고, 오롯한 내 시간을 즐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면 더 좋은 기분으로 일정을 끝마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나는 나 자신 얼마나 서툴고 세련되지 못한지를 확인했을 뿐이다.


▲ 밀포드 사운드

트렉에서 보낸 멋진 시간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그 아름다운 밀포드 사운드의 일몰도 별 감흥 없이 지나가고, 다음날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를 위해 배에 승선했다. 밀포드 트렉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밀포드 사운드의 경치는 오히려 평범하게 느껴졌다.


많은 여행자들이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를 위해서 퀸즈타운에서 밀포드 사운드까지 왕복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버스로 오가는데, 크루즈 하나를 위해서 그 먼 길을 오갈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밀포드나 케플러, 혹은 루트번 트렉을 걸은 뒤에 밀포드 사운드에서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피오르드랜드를 제대로 맛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 밀포드 사운드의 물개

배는 피오르드의 끝에 이르렀고 드넓은 태평양과 마주했다. 그리고는 방향을 바꾸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갑판에서 선실로 내려왔다. 커피를 한 잔 받아서 앉을 자리를 찾는데 우리 그룹의 일본인 청년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챙기느라 나와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내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니까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으면서 어디서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체념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한국이 부럽다고, 한국인들은 그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데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서양을 마냥 부러워한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산 적이 있어서 다른 일본 사람과는 달리 능숙한 영어를 구사했다. 일본의 한류 열풍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직업을 구하는데 평균 3년 정도 걸린다고, 그래서 아예 포기하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많다고도 했다.

내가 줄곧 인상을 쓰고 있었는지 가이드 앨런이 한글로 된 크루즈 안내서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한국에도 산이 있느냐며 관심을 표시한다. 나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아주 멋진 산들이 많다고, 그리고 우리는 멀리 떠날 필요 없이 도시 가까이에 그런 산이 널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퀸즈타운으로 돌아가는 길. 밀포드 사운드에서 티아나우까지 버스로 가며 본 경치는 다이나믹했다. 빙글빙글 산을 돌아가며 본 깎아지를 듯한 바위산들의 웅장한 모습은 창문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절경이었다. 우리 그룹 중 몇 명은 비행기 투어를 했는데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정말 굉장했을 것 같다.

피오르드랜드를 떠나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호숫길을 지나서 퀸즈타운에 도착했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특히 내게 사진을 찍어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뉴질랜드 할아버지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들러 매니저를 만났고 가이드에 대한 불만을 전하고는 YHA로 돌아왔다.

산, 강, 빙하, 만년설, 폭포, 계곡, 호수, 온갖 종류의 꽃과 나무, 온 산에 가득한 이끼…. 밀포드 트렉은 자연이 선사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고, 날마다 색다른 경치를 보여주었다. 좋은 여행이었다.

찬탄할 만한 자연이었다. 나는 신의 손길에 감탄했다. 자연은 그의 작품이므로. 그러나 뉴질랜드라는 나라에 대한 이 일주일의 인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이 땅과의 깊은 연결을 찾아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자연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자세는 물론 배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태도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들이 이 땅을 그들의 훌륭한 재산으로 여기고 가꾸고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전해지지 않았고, 그 점이 내겐 아쉬웠다. 이 나라만이 지닌 독특한 향기가 없었다.

인간의 깊이는 역사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도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운트 쿡만큼 높은 산이 없지만, 피오르드랜드만큼 순수한 자연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반도 땅에는 수천년 역사의 질곡을 이겨낸 민족과 고유한 문화가 있음을 생각했다. 그것은 참으로 값진 유산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은 친구가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히말라야에 가서 이미 세상의 지붕을 보았고, 밀포드 트렉에 가서 세상의 첫 일주일도 봤으니 이제는 세상이 만만해져야지.'


▲ 미트르 피크의 일몰, 사진은 밀포드 사운드 레드 보트 크루즈가 승객들에게 제공한 기념 CD에서 빌어왔습니다.
ⓒ2005 레드 보트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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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7일부터 11일까지 뉴질랜드 '밀포드 트렉 가이디드 워크'에 참가했습니다.

-뉴질랜드 여행기 네 번째입니다.
2005-03-31 15:32
ⓒ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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