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차지한 곳과 사람이 차지한 곳
- 아벨 태즈만 코스털 트렉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만나고 싶다면 뉴질랜드로 오시기를. 만년설로 덮힌 산과 바위, 폭포와 빙하, 에메랄드빛 호수와 숲, 그리고 열대 바다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길이 다 있다. '트레킹의 천국'이라는 말이 그냥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아벨 태즈만 코스털 트렉', 뉴질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이 국립공원은 남섬 북부 골든 베이에 있다. 이 길의 매력은 한적한 바닷길이라는 점이다. 완주하는 데 2박 3일이 걸리며, 밀포드, 케플러, 루트번 트렉과 마찬가지로 뉴질랜드의 아홉 개 'Great walks' 중 하나다.
굳이 종주하지 않아도 좋다. 코스는 다양하며 각자 원하는 구간을 걸을 수 있도록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트레킹은 공원 사무소가 있는 카이테리테리(Kaiteriteri) 해변에서 시작되는데, 바다에서 운행되는 워터 택시가 트레킹 출발 지점까지 데려다주고 예약한 시간에 맞춰 픽업하러 온다. 카약을 타고 해안을 돌아볼 수도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은 통가 베이(Tongga Bay)에서 바크 베이(Bark Bay)를 거쳐 토런트 베이(Torent bay)까지, 약 네 시간이 걸리는 길. 워터택시를 타고 출발하며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물개와 돌고래들......^^;
워터택시에 내려 천천히 두 발을 내딛으며 마주한 통가 베이는 고요와 정적, 그 자체였다. 세상 모든 소란이 사라져버린 그 한적함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 한여름에 이처럼 인적이 드문 비치를 만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 고요가 내 마음에 차분히 내려앉음을 느끼며 숲으로 난 길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했다. 트렉은 해변에서 시작해 인접한 언덕 위로 이어진다. 걸으면서 숲 사이로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트렉에서 내려다 본 통가베이)
하늘빛 바다빛에 취해 하염없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눈앞에 '폴즈 리버 마우스(Falls River Mouth)'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산 아래로 향하는 오솔길이 보였다. 급경사를 보건데 이 길을 따라내려가면 해안에 이를 것 같았다. 메인 트렉을 벗어나 잠깐 다녀오자 싶었다.
가파른 길을 한 십여 분 정도 내려갔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빈 해변이 내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마치 무인도에 혼자 불시착한 여행자처럼 미지의 어떤 곳에 다다른 것 같았다.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정적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 소리도 없는 곳, 아니 바람과 파도의 음률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곳. 백사장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오직 새들 뿐이었다. 그들은 내게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한없이 느긋한 자세로 그 오후의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나는 이 세상밖에 있는 어떤 장소에 갑자기 끼어들어온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새들은 나를 피해 달아나지 않았다. 내 움직임에는 무심한 채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무심함, 초연함, 자연스러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 방식, 어떤 원초적인 생명력 같은 것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들은 똑딱똑딱 흘러가는 시계의 시간 너머에 있는 어떤 영원한 시간 속에 자리잡은 생명체의 모습이었다. 그 고요와 정적이 주는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나 또한 그고에 언제까지라도 가만히 머물고 싶었다. 워터택시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결국 떠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드디어 트레킹의 도착지, 토런트 베이에 다달았을 때는 실망감이 컸다. 호텔과 숙소가 있고, 수상스키를 비롯한 각종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토런트베이의 소란스러움과 좀 전에 떠나온 폴즈 리버 마우스의 고적함이 대조되었기 때문에...
새들이 차지한 곳과 사람이 차지한 곳은 이처럼 다른 것일까. 아벨 태즈만에서 제 마음에 잊지 못할 흔적을 남겨준 것은 폴즈 리버 마우스의 이름 모를 새들이다. 그들은 이 세계 속에서 내가 우연히 발견한, 부서지지 않은, 원초적 충만함의 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한 아름다움이었고 아벨 태즈만이 내게 선물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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