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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뉴질랜드

[뉴질랜드] 한 번은 사고를 칠 줄 알았어! - 히피 트렉(Heaphy Trek)

by 릴라~ 2005. 10. 21.


한 번은 사고를 칠 줄 알았어!
- 뉴질랜드 히피 트렉 (Heaphy treck)


 


배낭여행의 매력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르리라. 내 경우 그것은 예기치 못한, 우연한 만남이 주는 놀라움 및 기쁨과 결부되어 있다. 모든 것이 꽉 짜여진 일정대로 전개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 아닐까. 시간표를 철저히 지켜야 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여행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요소는 '우연성'이다.

일상에서는 비가 쏟아지거나 흰 눈이 폴폴 쌓여도 해야 할 일은 변함 없다. 꽃이 피고 낙엽이 져도 주어진 일은 마쳐야 하고 퇴근 시간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여행은 다르다. 소낙비가 내리면 모든 일정을 접고 까페에서 오전 내내 커피를 마시며 빈둥거려도 좋고,  햇살이 찬란하다면 박물관 대신에 숲길을 오후 내내 헤매고 다녀도 좋다.

그러다보면 일정이 꼬이고, 길을 잃어버리고, 뜻밖의 상황들로 인해 여행이 힘들게 혹은 짜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알게 된다. 그런 우연적인 요소가 우리의 직선적인 시간을 몇 겹의 향기를 지닌 우아한 곡선으로 만들어주고 있음을. 그래서 나는 가끔 생각한다. 선물처럼 주어지는 이런 새로운 마주침의 순간들이 없다면 우리가 낯선 길 위를 헤매고 서성일 이유도 없을 것이라고.

뉴질랜드는 여행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나라라서 별다른 사건 없이 순조롭게 여행이 진행되었다. 한편으로는 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모험적인 요소가 다소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을 무렵, 아니나 다를까 일은 터졌다.

남섬 북서부에 위치한 카후랑기(kahuranggi) 국립공원. 뉴질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국립공원이다. 피오르드랜드와는 풍광은 물론이고 수종이 전혀 다르다. 개인적으로는 그림 같이 예쁜 피오르드랜드보다 숲만 끝없이 펼쳐진 카후랑기가 훤씬 마음에 들었다. 우리 나라 강원도와 약간은 느낌이 비슷하다.

마오리 말로 '카후'는 보물, '랑기'는 마오리 신을 가리킨다 한다. '신의 보물', 카후랑기. 총구간 82km의 히피 트렉이 바로 카후랑기 국립공원을 통과한다.  종주하는 데 닷새가 걸리며 뉴질랜드의  아홉 개 'Great walks' 중 하나다.

원래 히피 트렉을 이삼일 정도 걸을 예정이었다. 헌데 산장을 알아보니 이미 예약은 다 차 있어서 당일만 걷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카후랑기 국립공원은 모투에카에서 세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런데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지프 운전사가 자기는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우긴다. 숙소를 통해 차를 예약했는데, 나는 하루 걷겠다는 뜻이었으나 여행사는 가면서 경치 구경하고 바로 돌아오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제 서툰 영어가 드디어 막판에 문제를 일으켰던 거다. -.-;

함께 차를 타고 왔던 뉴질랜드의 두 가족은 히피트렉을 종주할 예정이라 저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곧 헤어졌다. 문제는 나였다. 힘들게 비포장 도로를 몇 시간이나 달려왔는데, 예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히피 트렉의 숲길을 보자마자 반하고 말았다. 내 앞으로 난 길들이, 그 길 위에 늘어선 나무들이, 바스락거리며 어서 오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물어보니 버스는 다음날 오전에나 온다고 한다. 잠시 고민하다가 정 안 되면 산에서 하룻밤 자도 별 문제 없을 것 같았다. 트렉 입구에 고맙게도 작은 대피소가 있었다. 트레킹 장비를 숙소에 두고 온 것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트렉을 걷기 시작하자 숲의 아름다움이 모든 걱정을 저 멀리 쫓아주었다.  날이 흐려 약간 어둑어둑한 숲길을 걷는 기분, 내 몸 구석구석을 채우고 내 정신에 생기를 주는 이 느낌을 제가 가진 언어로는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 이끼와 작은 낙엽 부스러기 하나까지도 저마다 속닥속닥거리면서 그 존재를 내게 알려왔다.  그 모든 것에 살아있는 정령이 깃든 듯이 내 영혼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한 30-40분 쯤 홀로 걸었을 무렵, 맞은 편에서 오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국립공원 직원, 그레이엄이다. 이 은발의 마음씨 좋아보이는 할아버지는 내 얘기를 듣더니, 원하면 트렉 입구의 대피소에서 자도 되지만, 오늘 밤에 비가 쏟아질 거라고, 비가 많이 오면 버스가 여기까지 못 올라온다고 했다. 혼자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고, 자기가 타카카에 나가는 길이니 같이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나를 설득했다. 고민하다가 트렉을 포기하고 그레이엄과 함께 걸어나왔다.

타카카까지 가는 동안 그레이엄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근처에 유명한 온천이 있어서 제가 좋냐고 물어보니 온천물은 옛날에 다 쓰고 지금은 그냥 물을 데워쓰니까 기대 말라고도 하고, 한국에도 여성 대통령이 있냐고 물으면서, 여성 수상인 헬렌 클락을 자기는 무척 지지하는데 이라크 전쟁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또 자기가 어렸을 때만 해도 살인 사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청소년들이 미국 문화에 젖으면서 뉴질랜드에도 해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고 불평했다.  어른들의 걱정은 나라마다 별 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뉴질랜드의 산업이라고는 농업과 축산업, 관광업이 전부다. 지금 뉴질랜드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 부모 세대와 달리 더 이상 농사를 짓거나 양털을 깎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신 도시가 발달한 호주에서 일자리를 얻기를 원한다(뉴질랜드 사람들은 호주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갖추었다고 부러워하는 나라, 역설적이게도 그 나라의 젊은이들은 그곳을 답답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반지의 제왕> 촬영팀이 타카카에 머물 때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아래 사진)을 가리키며 겨울에 여기서 촬영을 했다 한다. 사실 영화 반지의 제왕이 뉴질랜드 관광 산업에 끼친 영향은 말로 다 하기 어렵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뉴질랜드 달러가 엄청 올랐으니 여행자인 내겐 퍽 불리해진 셈이다. ^^;


 

자그만 마을 타카카에 도착했을 땐 이미 모투에카까지 가는 버스가 끊어졌다. 제게는 서너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다. 타카카에 하루 머무는 것, 아니면 90달러나 주고 택시를 이용하는 것, 그리고 모투에카까지 걸어가는 것.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기에 혹시 걸어갈 수 있을까 해서 근처 수퍼에 물어보니 밤새도록 걸어도 안 되는 거리라 해서 고민하다가 일단 히치하이크를 시도했다. 뉴질랜드는 히치하이크를 해도 좋을 만큼 안전한 나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길에서 차를 향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십분 가량 지났을 때, 운좋게도 내 앞에 차 한 대가 멈추어 섰다. 캐나다 청년 마크. 뉴질랜드에 일하러 왔다가 차를 빌려서 이주째 여행중이라 한다. 차 뒷자석은 짐으로 가득했다. 좀 전에 다른 여행객을 만났는데 그 사람 짐이 워낙 많아서 차에 태워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좋은 대화 상대였다. 뉴질랜드 사람보다 매우 천천히 말하고 발음도 분명했기 때문에.^^; 차에 타자마자 대뜸 뉴질랜드 날씨가 어떠냐고 묻는다. 자신은 퀸즈타운에서부터 내내 비만 봤다는 거다. 여행 루트를 물어보니 나와 비슷한데, 그에 비하면 난 굉장히 날씨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이메일 주소라도 적어 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모투에카가 나타나는 바람에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서둘러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마크는 한국에 꼭 한번 와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의 친절을 갚을 길은 이제 없을 것 같다. 그러고보니 여행하면서 낯모를 사람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좋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무채색이었던 삶의 빛깔이 생생한 칼라를 지니며 내 마음을 밝혀준다.

긴 하루였다. 모투에카 YHA에서 잠을 청하는데 히피 트렉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비가 오든 말든 대피소에서 하루 잘 걸 하는 아쉬움과 함께. 다시 뉴질랜드에 가게 된다면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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