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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고난의 영성, 부활의 영성

by 릴라~ 2006. 2. 14.

명색이 가톨릭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난 십자가의 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는 내게 어려운 주제였다. 난 오랫동안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좋아하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내가 좋아했던 건 산상수훈, 그 아름다운 말씀을 가르친, 제자들과 먹고 마시며 기적을 베푼 수난 전의 아름다운 예수였지 십자가 위에서 죽은 힘없는 예수가 아니었다. 나는 예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 그분이 선포한 진리를 사랑했지만, 십자가 위에서 죽어버린 예수, 그 처참한 고통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에 초라하게 입성할 때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의 그 무력함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어쩌면 내가 유다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원한 건 힘있는 신, ‘해결사 예수’였기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싹 없애 버리는. 하느님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세상의 고통을 없애고, 인간 악의 문제를 해결해야지 거기서 죽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내 무의식은 말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나 자신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시오’라고 조롱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아프리카의 비극, 전쟁, 폭력, 이 모든 것들의 끔찍한 반복. 세상의 고통은 나를 질리게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지만 나 또한 ‘무력한 나 자신’과 마주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무력함을 깊이 슬퍼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힘없이 가버린 예수가 싫었던 것 같다. 세상의 고통을 없애지 않는 예수, ‘고난받는 종’인 예수, 그 예수의 길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그분의 전모와 대면한 적이 없었는데 그건 내 삶의 전부와도 맞서본 적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예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방해한 것은 바로 고통의 문제였다.

세상의 고통을 싹 없애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일어나서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 고통을 나누기를, 인간 스스로 운명과 인생을 헤쳐나가기를 원하신다. 그렇다고 하느님은 두 손 놓고 그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 고통 받는 영혼과 함께 걸으신다. 나는 그 하느님, 인간과 함께 울고 계신 하느님을 내심 믿지 못했다. 나의 자아는 하느님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이 빠진 영성, 고통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영성은 다 가짜다.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 진리는 온전하지 않다. 고통이 없다고, 고통 없이 즐거울 수 있다고 말하는 영성은 가짜다. 고통을 껴안고 가는 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내가 작년에 내적으로 그토록 메마름을 느낀 까닭은 고통을 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달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께서는 이 고통을 없애주시되 제가 마셔야 하는 잔이라면 거절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그것은 고통 앞에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기도임을 왜 진작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하신다. 고통을 나누는 것, 친구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 복수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하느님이 초대하는 사랑의 길.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크나큰 상처를 겪은 제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던가. 어쩌면 난, 예수의 죽음 이후로 절망해서 뿔뿔이 흩어져간 그런 제자였던 것 같다. 세상의 권력이 사랑을 죽게 했다. 십자가 위에서 사랑은 힘없이 패배했다.  꿈은 사라지고, 팀은 해산되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울었다.

겉으로는 부활을 믿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에수를 잃은 제자들처럼 하느님이 이 세상을 버렸고 희망은 사라졌다는 생각이 한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제자들은 한번쯤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이다. 율법학자와 대사제와 군중들처럼 처음부터 하느님이 어딨냐며 냉소했던 사람들이 아니다. 이제 그들은 사랑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몸을 떤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예수는 죽지 않았다. 살아서 다시 나타난 예수를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를 알아차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간다. 그들은 깨달았다. 하느님이 죽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음을. 다만 우리 자신들의 눈이 어두워 볼 수 없었을 뿐임을.

한번쯤 희망을 품었던 사람들은 그 희망이 사라지는 걸 봐야 했다. 세상이 사랑을 죽이는 것을 보고 울며 떠났다. 어쩌면 나는 한동안 그 상태에 고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서른 넘어서 인생에 실망하고 사람들에게 환멸을 느끼면서. 그러나 성서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죽음 이후에 뭔가가 다시 살아났고, 그건 우리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스토리의 시작을 알린다. 성서를 묵상하면서, 나 자신 말로만 다시 시작이라고 외치고는 여지껏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세상 속에서도 사랑은 패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내 눈이 어두워서이리라. 부활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함을 나는 잊고 살았다. 예수의 부활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만 보았고 그 고통을 허락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했다.

부활은 마음의 눈으로, 영혼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도 하느님이 살아서 곳곳에서 출현하심을 우리의 온 존재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느새 하느님의 눈으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
그래도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다. 그러자 그분이 대답하신다. 세상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고. 이 세상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인간이 만든 그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아프리카의 비극도 영원한 건 아니라고. 그러니 힘을 내라고. 힘을 내어 친구의 짐을 져주라고. 나머지는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께 맡기라고. 최종적인 것은 부활이라고.

사실 예수를 죽게 한 것은, 예수를 고통에 몰아넣은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의 죄와 탐욕이었다. 지금 아프리카를 내전과 빈곤과 에이즈의 헤아릴 길 없는 수렁으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원인도 유럽의 식민정책이었다. 이라크의 비극 역시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고 나 자신의 삶 역시 깊이 통찰하지 못했다. 바쁜 일에 치여 나는 그런 것들을 들여다볼 힘이 없었다. 나는 고통의 표피만 보고 그 시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고 함께 울고 계심을 믿지 못했다. 이제는 그 모든 시간에 예수께서 함께 아파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리고 고통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또 흘려보내며 하느님 나라를 살고 싶다.

고통을 피하려고 할 수록 삶이 겉돌고, 메마르고 피상적으로 흘러간다. 삶의 전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고통은 피하는 게 아니라 관통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이젠, 고통 중에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와 함께 울고 있다는 걸 믿는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이웃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이냐시오 침묵 피정은 나로 하여금 내 삶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 시간 안에서 내가 도저히 질 수 없을 것 같았던, 두려워 마지 않았던 십자가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 몫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리라 마음먹으니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리고 고통을 짊어질 수 있는 더 큰 힘이 내게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고난의 영성과 부활의 영성은 한 몸이다. 과거의 고통과 상처에만 천착하는 것은 의미 없다. 중요한 것은 부활이다. 고통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떨치고 일어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 그것이 십자가가 지닌 의미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한 주기가 끝나야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 부활이란 고통의 바닥을 딛고 일어서 저 높은 창공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다.

혼자 걷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임을 알아볼 때 삶의 고통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희망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최종적인 것은 부활이며 그것은 언제나 기쁨의 편에 서 있기에.

우리 삶의 매 순간이 새로운 부활의 순간을 잉태하고 있음을 안다면, 축제는 끝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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