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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일상의 기록

우리가 마주쳤던 잠깐

by 릴라~ 2013. 6. 12.

 

 

 

4월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소처럼 지하철역에서 내려 십여 분을 걸어 교정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햇살은 딱 알맞게 찬란했고,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은, 말 그대로 화사하고 상쾌한 봄날 아침이었습니다. 구름 낀 날이 며칠 이어졌기에 제 발 아래를 비추는 그 화사한 햇살의 촉감에 감탄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습니다. 날씨 덕분에 일과가 시작되기 전 그 십여 분은 '축복 받은' 시간이었고 학교 로비 앞 보도 블럭 위에도 햇살은 다정하게 내려앉았어요.

 

그러다 제 시선에 저보다 조금 앞에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는 한 생명체가 포착되었습니다. 회색과 갈색이 섞인 빛깔에 연두색 점들이 나 있는 생전 처음보는 벌레였어요. 크기는 배추흰나비 애벌레만했습니다. 그 녀석도 이 봄날 아침이 좋았는지 화단을 벗어나 보도블럭 위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처음 딱 마주쳤을 땐 살짝 징그럽다는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금새 사라지고 이 봄날 햇살을 함께 느끼고 있는 녀석의 몸짓이 사랑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모든 것이 그저 빛나게 보이던 순간이었어요.

 

녀석에게 안녕을 고하고 저는 학교 로비로 막 들어서려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곧 몰려올 학생들이 생각난 거지요. 뒤돌아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네다섯 명이 재잘거리며 제 뒤를 따라 있었고 제 시선은 다급하게 학생들의 운동화 뒤편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녀석은 정확하게 몸의 반이 인간의 발에 눌려서 사라지고 없었어요. 저는 급히 달려갔지만 남은 절반의 몸체만 보도블럭 위에 미동도 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은 그저 웃으면서 로비로 들어서고 있었고 저만 망연자실한 채로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습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쉽게 공감하는 대상은 우리와 닮은 것들, 개나 고양이 같은 포유류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그 날 아침 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작은 것의 생명이 저와 같은 무게를 지녔다고 느꼈어요. 그 즈음 논문 심사를 받고 있어서 제 시선이 온통 내면에 쏠려서 그렇게 섬세하게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그 날 아침 제 몸의 모든 감각을 일깨우던 햇살의 따사로움을 함께 만끽한 존재가 바로 그 녀석이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환한 햇살을 받으며 보도블럭 위를 기어가는 녀석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자기 본성에 충실한 완전한 존재였습니다. 논문 몇 구절을 생각하며 걷고 있던 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 아침을 공유하던 그 녀석은 영영 사라졌고, 저는 그 '사라짐'이 못내 마음 아팠습니다.

 

7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이규보가 이미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과서에서 접하게 되는 '슬견설'에서 그는 이와 개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큰 짐승이 죽는 것은 슬픈 것이 당연하지만 이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는 손님의 이야기에 이규보는 생명의 본질은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되받아치지요. 개와 이의 죽음을 함께 놓고 바라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그 날 아침은 그것이 제게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재의 느낌으로 쿵 하니 다가왔던 순간이었습니다. 벌레의 죽음은 그의 죄 때문도 아니고 운명이나 법칙 때문도 아니며, 그저 신체와 신체의 충돌이 빚어낸 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냉혹한 자연의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그 어떤 원한이나 폭력, 야만을 품고 있지는 않았어요. 살짝 제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우리를 좌절이나 절망에 빠트리는 그런 아픔은 아니었습니다. 순순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연의 폭력이었어요. 그는 그냥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참으로 짧았습니다. 그 포근한 아침을 그가 좀 더 오래 누릴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저의 아침은 그 녀석보다는 좀 더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지속'의 의미를 가만가만 생각하게 됩니다. 저 또한 언젠가는 자연의 폭력에 순순히 저를 내맡겨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겠지요. 중요한 건 그 '사이'에 놓인 저의 시간일 것입니다. 녀석처럼 저 또한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제게 심어준 본래면목에 따라서 조금씩 움직여가고 싶네요. 스피노자가 맞다면 만물이 저마다 지닌 그 본성(본능이 아니라)의 '펼쳐짐'이 신의 움직임일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움직임의 한가운데에 저를 놓고 싶고, 그것은 물질이건 지식이건 무언가를 소유함에 의해 존재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고유한 누군가가 되는 것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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