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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다큐

길 위에서 | 이창재 감독 — “다음 생에는요?"

by 릴라~ 2013. 7. 4.

 

 

 

 

영화 <길 위에서>는 백흥암에서 수행하는 비구니 스님들의 일상을 스케치한 다큐입니다. 300일의 촬영이 끝나고 주지 스님은 감독에게 묻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보았냐고.

 

100여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영화는 제게 같은 질문을 던져왔어요. 제가 <길 위에서>에서 본 것은 사람들이예요. 상욱 스님, 선우 스님, 민재 행자, 그리고 영운 선원장 스님, 주지 스님.....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지는, 그들의 얼굴을 닮은 자연의 풍경.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어떤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고요함 속에 깊은 내면의 출렁임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수행자로 살아가는 노고의 흔적이 배어 있는 그 얼굴들은 백흥암의 사계를 닮았고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의 풍경을 닮았습니다.

 

그 같은 진실한 표정을 얻기 위해 수행이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의 문명과 사회는 그러한 '인간의 표정'을, 삶과 생명에 대한 폭넓은 감수성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의 몸은 우리가 걷고 있고 보고 있는 길의 풍경을 닮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세속의 삶이냐 출가냐의 문제보다는 우리가 그런 인간의 표정을 잃고 있다는 생각, 그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그분들의 출가는 그와 같은 '인간'의 얼굴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명상이나 수행을 이야기하면, 삶에 특별한 상처나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와 같은 편견이 횡행하는 것은 '고통'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범인들이 느끼는 고통과 수행자들이 느끼는 고통은 고통의 종류가 같지 않습니다. 후자의 고통은 무언가를 가지지 못하거나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이유를,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정신적 고통이라고 볼 수 있어요. 돌아보면, 십대에서 이십대에 오히려 이러한 형이상학적 고통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통의 원인은 점점 물질적이고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음이란 다름 아닌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 임용 대신 출가를 선택한 상욱 행자. 마흔이 되고 쉰이 되어도 출가에 대한 어떤 미련이 있을 것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 합니다. 젠 센터에서 불교를 처음 접해서 출가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말에 선원장 스님은 이상만을 좇아서는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는 조언을 줍니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계를 받은 상욱 스님의 고요한 얼굴에는 나무 뿌리가 튼튼하게 땅으로 뻗어가는 듯한 그런 단단함이 조금씩 배어나오기 시작했어요.

 

부모를 잃고 어려서부터 절에서 자라다가 '동진 출가'를 하게 된 선우 스님. 깊은 산속 샘물처럼 깨끗한 우수가 살풋 어려 있는 얼굴이예요. 다시 태어나면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대학까지 마치고 출가하고 싶다고 합니다. 선우 스님이 '만행'을 떠나는 길에서 만난 우리 땅의 가을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절에서 공부한 것을 세상에서 직접 점검해보기 위해 떠나는 만행. 만행이야말로 '여행'의 참뜻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길에서 주지 스님과 은사 스님은 선우 스님에게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그녀의 길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한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의 아름다운 선택에 따른 결과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어여쁜 신세대 아가씨 민재 행자. 종교에 대한 사전지식 전혀 없이, 절 하는 법도 모른 채 그저 자신을 찾고 싶다는 일념에 출가한 그 용기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머리를 깎을 때 잠시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출가 후 너무나 행복한 일 년을 보내고 있었어요.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내내 짓던 그녀가 보수적인 교단의 틀에 갇히지 않고 그의 내면에서 더 크고 풍성한 꽃들을 활짝 피워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무문관' 수행이예요. 영화에서 잠깐 소개된 무문관 수행은 지나친 자기 학대로 느껴졌습니다. 3년간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골방에 갇혀 한 끼 식사를 하며 자기 자신과만 마주하는 시간. 자기와의 싸움은 세상에 맞서 자기를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인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대결 상황을 만들 필요가 있을지. 이 과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해 보였고요. 그리스도교가 '신' 개념에 집착하면서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듯이, 불교 또한 '자아'에 지나치게 몰두할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물론 이는 무문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저의 주관적인 인상 비평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제게는 무문관 같은 종류의 수행법이 철저하게 남성적인 성격의 것으로 여겨졌고, 여성의 신체에 적합한 수행 방식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서 그것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보였어요.

 

3년의 무문관 수행을 마친 한 비구니 스님이 수행으로 얻은 병이 다 낫기도 전에 다시 무문관 수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은 그 길이 '아득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제게는 그 뒷모습이 '죽음'으로 가는 길로 여겨져서 슬픔이 밀려왔어요. 얼핏 눈으로 봐도 쇠약해보이는 그 비구니 스님은 왜 자신을 6년이나 그 좁은 공간 속에 가두어두려는 것일까요. 속인인 저로서는 그 뜻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분이 그분의 '원'을 이루기를, 그의 가녀린 몸에 배인 슬픔이 기쁨으로 화할 날이 오기를 빌 수 밖에요.

 

눈빛이 형형한 영운 선원장 스님. 그는 수행의 목적을 '밥값'을 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대로 공부해서 밥값을 해야 한다고. 저는 그 말을 '인간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그것은 이 우주에서 인간 종족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의 넓이와 깊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해는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자각을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자각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찾는 것이 세상을 찾는 과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주지 스님이 지나가듯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에 대한 이해는 세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됩니다.

 

사회가 규정한 '이름-자리'가 아니라 더 본질적이며 더 포괄적인 '나'를 찾으려는 사람들. 세상이 부여한 모든 이름을 떨쳐버리고 이름 없는 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자기 안에 들어있는 무언가를 기존 삶의 관계들이 아니라 출가자의 삶의 형식을 통해서 표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스님은 감독에게 묻습니다. "감독님은 출가하실 건가요?" 대답을 못하는 그에게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다음 생에는요?"

 

저는 '다음 생'이 우리가 죽고 난 뒤에 다시 맞이하는 생이 아니라 현재와 '다른 시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 뒤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시간이예요. 모든 순간들은 무수한 다음 생의 잠재성을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백흥암의 스님과 행자들이 보여준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다음 생을, 다른 시간을 시작하는 용기였어요. 다음으로 삶을 미루지 않고 이 순간 치열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민재 행자는 너무 행복하다고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바람처럼 가볍게, 내리는 눈처럼 깨끗하게, 바위 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고독하고 정직하게 자기 '시간'을 살고 겪어내는 것. 자연처럼 쉼없이, 그러나 또한 자연처럼 넉넉하게.

 

영화 <길 위에서>는 우리가 우리 삶의 시간을 살아내고 겪어내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삶이 아니라, 외부의 힘이 끌고 가는 대로 스스로를 방치하는 시간이 아니라, 정직하게, 온 마음을 다해서 자기 시간을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며 제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무의식중에 흘려보내고 소비하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내일 날이 밝으면, 오늘보다 한층 새로워지는 날들을 살 수 있기를. 그 본질적인 시간을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단호함에 의해서 순간순간마다 새롭게 열어갈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의 풍경이, 우리가 살고 겪은 시간의 향기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과 영혼을 풍요롭게 하기를.

 

 

 

 


길위에서 (2013)

On the Road 
9.2
감독
이창재
출연
민재, 선우, 상욱, 영운
정보
다큐멘터리 | 한국 | 104 분 | 201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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