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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야기/schooling

뜻밖의 선물

by 릴라~ 2017. 5. 20.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사상은 이렇다. 십년 만에 졸업생을 만나도 뛰어난 기억력을 자랑하며 '누구야' 하고 우아하고 멋지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러나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 현실의 나는 언제나 조금쯤 버벅거리며 '이름이 뭐였지?' 하고 되묻게 된다. 수업할 당시엔 알았지만 몇 년 지나고 나면 서로 엇비슷한 이름들이 내 기억 속에서 비빔밥처럼 한데 섞여서 우리 반이 아니고서는 그 중에서 정확한 이름을 골라내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한 번은 수성못 근처의 까페에 갔을 때다. 친구와 별 생각 없이 테이블에 앉았는데 서빙을 하던 청년이 '김비아 선생님이시죠?' 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우리 반이 아니어서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훤칠한 이십대 청년의 얼굴 속에서 중학생 소년의 앳된 흔적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친구는 센스가 있었다.  '선생님, 저 원희예요.' 라고 먼저 이름을 밝히면서 2004년도에 배웠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2004년? 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인데?" 라는 말이 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도 궁합이 있어서 어떤 해는 일 년 내내 안 풀릴 때가 있다. 내게는 2004년이 그러한 해였다. 원희도 이해한다는 듯이 빙긋 웃으면서 "아, 저는 그때 선생님 수업을 좋아했는데요. 애들이 너무 떠들어서 그때 선생님이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한다. 까페에 머무는 동안 원희는 계속 커피 무료 리필을 해주었다. 고맙다고 하니 "아이, 뭐 이런 걸 갖고 그러세요." 하며 씨잇 웃는다.

동네 미용실에서도 "어머머, 선생님 아니세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다른 곳은 앞머리 자르는 데 삼천 원을 받는데 이 집은 천 원을 받아서 가끔 들르는 대로변에 있는 큰 미용실이었다.  별 생각 없이 자리에 앉는데 하얀 상의에 검정 미니스커트를 입은 직원 두 명이 아는 척을 해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근처 N중학교 졸업생이었다. 노란 빛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 때문에 처음엔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분명 그때의 아이들이었다. 이름은 서진이와 수현이였다.

둘 다 우리 반이 아니어서 특별히 생각나는 일은 없었는데, 서진이와 수현이는 "선생님, 그때 최선아 선생님이랑 우리 치마 짧다고 막 잡으러 다니셨는데요." 하며 자기들끼리 깔깔거린다. 내 머리를 곱게 잘라준 서현이는 천 원을 받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해서 결국 그냥 나왔다. 

수업 시간에 그저 스쳐간 사이에 불과했는데도 이렇게 반갑게 정을 내는 아이들을 볼 때면, 아, 내가 선생이구나, 하고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에 부족했던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적 교류였다는 깨달음도 뒤늦게 찾아온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은 주유소에서 일어났다. 그 날 따라 별 것 아닌 일로 흥분해서 싸운 아이들을 훈계하고 퇴근하는 날, 피로와 배고픔이 겹쳐 '아, 학교 다니기 싫다' 한껏 불평을 하며 운전을 하는데 마침 계기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아침 출근길에는 바쁠 것 같아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주유하려고 집 근처 주유소에 들렀다. 차창을 열고, ‘얼마 넣을까요?’라는 알바생의 물음에 습관적으로 '5만원이요' 라고 대답하는데 갑자기 알바생이 아는 체를 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

김비아 선생님 맞으시죠?”

나는 그제서야 알바생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 반이 아니어서 순간적으로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그 녀석의 이름은 내가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때가 되어서야 내 기억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명호였다. 이 녀석과는 N중학교 2학년 수업을 같이 했다. 수업 시간에 장난을 많이 쳐서 내 잔소리를 꽤 들었던 녀석이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반갑네. 대학교 2, 3학년은 되었겠다.”

, 군대 가기 전이에요, 선생님. 군대 가기 전에 미리 용돈 좀 많이 벌어두려구요.”

명호는 덩치에 걸맞는 굵직한 목소리로 활기차게 이야기했다. 철없던 개구쟁이가 이렇게 든든하게 자라 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제 몫을 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조금은 안쓰러웠다. 이 젊은이들이 앞으로 헤쳐갈 시간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주유가 끝나서 출발하려는데, 명호가 갑자기 멀리서 뛰어오더니 차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차창을 내리니 명호가 휴지와 물 티슈 한 아름을 내 옆자리에 놓으며 말한다.

선생님, 제가 드릴 것도 없고 해서요. 이거라도 쓰세요.”

한 달을 써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나는 이렇게나 많이 주냐고,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집으로 향했다. 그 날의 피로가 순식간에 가셨다. 티슈를 쓸 때마다 마음은 녀석이 전해준 온기로 훈훈했다.

다음에 들렀을 때 명호는 또 물티슈를 듬뿍 주었다.

"선생님, 자주 안 오시네요."

"자를 가끔 몰아서 그래."

고마운 마음에 다음엔 책 한 권 선물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주유소에 들른 날, 명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알바를 마치고 군대에 간 모양이었다. 나는 전해주지 못한 책을 들여다보며 잠깐의 만남을 아쉬워했다.

아이들은 참 빨리 자란다. 천방지축 중학생이 어느새 대학생이 되고 졸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도 그만큼 나이를 먹어가는 중이겠지만 내가 점점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들고 있는데 반해,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아이들의 변화는 경이롭다. 학생과 교사 사이였다가 어느 순간 길 위에서 동등한 성인으로 마주하게 된다.

교직 경력 20년에 근접해가는 지금 내 바람은 소박하다. 무엇을 얼마나 잘 가르칠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하는 등의 질문은 내게서 사라졌다. 어떤 길목에서 아이들을 우연히 맞닥뜨리더라도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으면 족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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