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을 가르치다가 인문계 고등학교 수업을 하게 되면 영혼에 깊은 평화가 찾아온다. 중학교 교실의 소음도, 시간마다 수업을 방해하는 훼방꾼들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불쑥불쑥 교실을 돌아다니는 학생도 없다. 고등학생에게는‘조용하라’고 소리 지를 필요도, 친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윽박지를 필요도 없다. 중학교 남학생들은 말로는 절대 제압되지 않는다. 일정 정도의 위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고등학생들과는 웬만한 건 다 대화로 풀어갈 수 있다. 고등학교 교실의 유일한 단점은 학생들이 자기 몸이 피곤하다보니 자주 조는 경향이 있다는 것 정도다.
교사 1인당 학생 수도 중학교보다 고등학교가 적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교사의 주당 수업 시수도 중학교보다 적다. 중학교가 사춘기 학생들을 상대하느라 진을 빼고, 수업도 생활지도도 더 힘든데 왜 고등학교에 교사 수에 더 여유를 두는지는 모르겠다. 중학교 교실에는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학생과 고교 수준의 학생이 동시에 앉아 있기에 교사가 수업을 이끌어가기가 훨씬 어렵다. 일선 고등학교에서 방과후수업이란 이름의 파행적 보충수업이 지속되는 이유 중에서 정규교과 시간에 다소나마 여유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고등학교에서는 정규수업과 방과후수업 시간을 합해서 중학교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수업을 하면서 방과후수업 수당을 챙겨간다.
하지만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등학교의 일상적인 리듬을 견뎌내지 못했다. 첫 번째 문제는 수업 시간표였다. 인문계 고교에서 수업시간을 편성하는 방식에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행정기관인 학교가 교육적인 것만을 고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교육적인 것이 조금은 더 고려되었으면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신의 공정성이라는 명목하에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행정편의적으로 짜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인문계 고교의 수업은 졸음과의 사투이다. 보충, 야자, 학원으로 피곤에 찌든 학생들은 조금만 맥락을 잃으면 자동적으로 가수면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수업 시간표조차 아이들의 집중을 방해하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공평하게’ 똑같은 교사에게 배우게 하기 위해 시수를 나눌 수 있는 과목은 모두 나누었다. 예컨대 한 반에 일주일에 국어가 4시간이면 네 명의 교사가 국어 A, B, C, D로 단원을 나누어 수업에 들어가는 식이다. 국어 한 과목만 해도 일주일에 4개의 진도가 동시에 진행되니 아이들은 정신이 없다.
소설 같은 것은 길이가 있어서 월, 화, 수, 목 연결하여 죽 읽어나가면 좋은데, 시수를 나누어 한 반에 주당 한 시간 혹은 많아야 두 시간 들어가다 보니 소설 한 편을 끝내는데 한 달 넘게 걸렸다. 교사인 나도 수업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는데 여러 과목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더 그럴 것이다. 한 교사가 몇 개의 반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학 학년 열 개 반을 다 들어가면 학생 이름도 다 익히기 어렵다. 같은 말을 열 번 하는 것도 못할 일이지만, 학생들이 이렇게 교재를 잘게 나누어 교과서 진도 위주로 배우는 것을 과연 교육활동이라 말할 수 있을까.
국어뿐 아니라 대부분 과목이 이렇게 운영되었다. 학생들은 일주일 동안 다양한 선생님들과 다양한 진도를 소화해야 한다. 수업에 몰입할래야 몰입하기가 힘든 구조였다. 학습능력이 부족한 학생일수록 이것저것 산만한 진도를 따라가기 힘들고 그만큼 공부를 포기하기도 쉬웠다.
두 번째 문제는 평가였다. 내신이 곧 대입과 직결되기에 작품을 내가 의도한 방식으로 다루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업은 내 방식대로 진행하고 시험에 나올 만한 지식은 따로 정리해주는 식으로 다른 교사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원하는 만큼 작품에 몰입하지도 못하고 내용을 따로 정리해줄 시간을 확보하느라 늘 바쁘고,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었다.
같은 학년을 서너 명의 교사가 함께 가르치기에 시험 문제를 고치는 것도 일이었다. 교사들이 시험 문제를 함께 검토하지만 문제에 치명적 오류가 있지 않는 이상 모든 문제를 다 내 입맛에 맞게 수정해 달라 할 수는 없다. 내가 수업시간에 언급하지 않은 내용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면, 공정한 평가를 위해 학생들에게 내가 다시 가르쳐주어야 한다. 하지만 시험 직전에는 학생들이 워낙 눈치가 빨라 ‘저 내용이 시험에 나오는구나’ 알아차리기 때문에 학생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선에서 내용을 보충해줘야 하는데 이것이 꽤 골치 아픈 일이었다. 가르침이 아니라 그밖의 것으로 신경을 쓰는 일이 더 많았고, 정기고사를 치를 때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자괴감이 들었다.
성적 산출도 문제가 많았다. 한 학교에 1등급이 4퍼센트가 넘으면 그 학교의 1등급 자체가 사라져서 대입에 심각한 지장이 생긴다. 그래서 어떻게든 1등급이 그 안으로 나오도록 줄을 세우는 문제를 출제해야 한다. 대구광역시의 경우 수행평가 비중이 40퍼센트, 서술형이 의무가 되면서 지필고사의 비중이 50퍼센트 정도로 낮아졌다. 그런데 학생들이 모두 열심히 하다 보니 수행평가 평균이 90점을 넘는다. 결국 반영 비율이 높지도 않은 지필고사에서 줄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수능이 문제풀이식 교육을 낳기에 비판받지만 교사들이 바쁜 와중에 출제하는 지필평가 문제가 수능보다 낫지도 않다. 학생들이 틀리도록 꼬아놓은, 교사가 보기엔 다소 치사한 함정 문제를 만들어야 줄이 세워진다. 썩 좋지도 않은 문제인데 이걸 한 문제만 더 틀리면 내신 한 등급이 내려가는 현실은 아이들의 피를 말린다. 객관식 선다형 문항은 다 거기서 거기므로 수능 대신 교과내신으로 입시를 치르고자 한다면 선다형이 아니라 서술형, 논술형 등으로 평가할 때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서술형, 논술형, 수행평가 등은 기본적으로 상중하 정도의 평가가 가능하다. 한 줄로 세워 등급을 내야 하는 내신 상대평가가 있는 한 고등학교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상화되기 어렵다.
숨이 막혔다. 이래서야 어떻게 의미 있는 배움이 일어날까 싶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구조화한 시스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배움이라는 복잡다단한 현상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으며 개인마다 다 다르게 배운다. 하지만 배움이 잘 일어나는 보편적인 조건은 생각해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잘 배우기 위해서는 잘게 쪼개진 시간표와 그만큼 잘게 쪼개진 학습 진도가 아니라 ‘경험’이라는 통짜의 사태가 주어져야 한다.
경험이란 무엇인가. 경험의 독일어 어원을 살펴보면 교외를 여행하거나 탐험하면서 저절로 배움의 과정에 진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경험은 사람 혹은 사물과 ‘직접’ 연결되면서 배우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인식한 것들을 자기 것으로 흡수하는 능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겪으면서’ 배운다. 우리가 우리 밖의 다른 세계와 연결되면서 무언가를 겪는 과정에서 그 새로운 사태를 소화하기 위해 우리 내면의 지성과 감성을 평소보다 더 강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는 경험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배움으로 초대하는 것은 낯선 타자와의 마주침이다. 이때의 타자는 단순히 처음 보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지각을 흔들어깨우는 대상을 의미한다. 타자와의 생생한 마주침은 우리 안에서 호기심과 경이로움을 비롯한 다양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서 질문이 솟아나는 것이다. 배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 새로운 만남이 가져온 질문을 소화하기 위해 우리 안의 잠재된 능력을 활용하기 시작할 때 배움은 깊어진다. 국어 교과의 경우 그 마주침의 대상은 텍스트이다.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즉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는 않지만 우리 마음을 움직이며 다가오는 경험을 언어로 해석하는 데는 언제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당장에 일의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를 요구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배움은 이미 아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태가 낳은 모호한 생각과 감정의 덩어리, 그 안에 담긴 질문을 지켜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게 될 때는 분명한 주장과 의견보다 우치다 타츠루가 말한 “아직까지 말이 되지 않은 생각”과 “윤곽이 잡히지 않는 감정의 편린”이 소중하다.
그래서 경험은 언제나 탐구와 실험의 성격을 지닌다. 타자(교과)와의 마주침을 탐구하고 질문하고 해석하는 가운데 학생들의 일상적이고 즉각적인 경험은 인식과 판단이 넓게 통합된 지성적인 경험으로 이행한다. 이것이 듀이가 말한 ‘교육적 경험’이다. 교육은 학생들의 교실 밖 경험을 보완하여 그들의 좁고 피상적인 경험을 넓고 깊은 경험으로 이행하도록 관심과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배움은 언제나 지적 도전이며, 질문과 답이 성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배움은 고유한 리듬이 있다.
‘교육적 경험’이 지닌 이런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교과교육은 지식의 파편을 습득하는데 머물 염려가 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만나는 각 교과는 그 교과 나름의 논리적 체계로 짜여 있어 타자와의 마주침이라는 경험이 주는 생생한 느낌이 희석되어 있을 때가 많다. 듀이에 따르면 원래는 교과 역시 인류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경험을 일정한 관점에 따라 조직한 것이 교과이다. 하지만 교과지식은 경험 자체가 아니라 인류가 세계와 만난 경험을 언어로 정리해 놓은 결과물이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알맹이가 빠진 죽은 언어로 다가가기가 쉽다.
그래서 교사의 개입이 필요하다. 교사는 교과의 딱딱한 논리 체계에 감춰진 인류의 경험을 복원하여 학생들이 심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시하는 사람이다. 듀이는 이를 ‘교과의 심리화’라 불렀다. 교사는 매끈한 언어로 정리되고 다듬어진 교과지식 속에서 그 지식을 탐구했던 사람들이 처음에 지녔던 의문과 혼란과 사고 과정을 복원하여 학생들이 인류의 경험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지식이 어떤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산되었는지 이해시키고 학생들 또한 자기 삶의 맥락 안에서 지식을 소화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교과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을 조직해온 인간의 관점과 전망이다. 지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중립적인 것도 아니며 한 가지밖에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류가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여 체계화한 것으로서 언제나 역사적 산물이며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러한 인식이 없다면 우리는 과거의 지식에 갇히게 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새학기 교과서를 배부하던 날, 교과서를 가지러 온 학생 중 한 명이 역사 교과서를 힐끗 보더니 혼잣말로 “아, 역사가 제일 싫어” 한다. 깜짝 놀라서 왜냐고 물으니 “과거는 배워서 뭣 해요” 하고 대답한다. 나는 교과서 배부로 바빠서 긴 이야기를 할 짬은 없었지만 현재의 모든 문제는 다 과거에서 비롯되었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모든 면에서 얽혀 있으면서 현재에 영향을 주는 과거를 공부하는 거라고 한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 녀석은 “그래도 완전 재미 없어요” 한다.
그 학생은 교육을 통해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다. 역사가 재미없다는 사실, 역사 공부는 쓸 데 없다는 사실, 과거의 사실이 자신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이 그가 학교교육을 통해 얻은 배움의 내용이다. 이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적 도전을 경험하지 못한 이는 지식을 고정된 것으로 여기거나 맹목적으로 권위에 순응하기가 쉽다. 역사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며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관점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에게 적극적이고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지식을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지 않을 때 교과교육은 현실과의 풍부한 연관성을 놓치고 학생들을 배움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역사교과라면 낱낱의 역사적 사실에서 더 나아가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배워야 한다. 인류가 지식을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탐구할 때 학생들은 비로소 지적으로 사고하게 되고 추상적 개념을 자기 것으로 습득할 수 있다. 듀이는 탐구정신이 시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배움은 과거의 사실을 다루지만 배우는 이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실험과 창조로 뻗어나간다. 그것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배움의 여정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스토리가 생성된다. 교육학자들은 이를 “이야기적 지식”이라 부른다. 교사는 학생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배움의 과정의 안내자이다. 따라서 진정한 배움의 결과는 수량화될 수 없고 단편적으로 측정될 수도 없다.
교육적 경험은 우리 마음의 편협함을 제거하지만, 암기는 그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적 지식은 타자(교과)와의 만남이라는 경험과 그 만남이 야기하는 질문이라는 사태, 그 속에서 자신의 관점이 변화하는 여정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과 답이 연결되는 과정이 바로 ‘이야기’이다. 배우고 나서 이야기가 없는 것은 배움이 아니다. 우리 마음에 오래 남는 것도 이야기이다. 일주일에 네 시간을 각기 다른 교사가 다른 진도표에 따라 진행하는 수업은 이야기를 낳을 수 없다. 얄팍한 배움에 머물 뿐이다.
교사는 배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꾸려가는 사람이지 매끈하게 정리된 지식을 주입하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배움의 촉진자이며 배움의 진정한 깊이는 학생의 자유로운 생각과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교사 본연의 임무는 교육과정 재구성이다. 교과수업을 교육적 경험의 차원에서, 학생들의 생활 리듬을 고려하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인류의 경험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교육과정을 재구성할 때 교사에게 요청되는 것은 교사 자신의 배움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가 어떨 때 잘 배웠는지 돌아보면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교육적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인류가 가꾸어온 문학과 예술에 깃든 참된 정신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과거와의 의미 있는 접속은 우리를 현재와 미래를 향한 책임 있는 의식으로 이끈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교양’이라 말할 수 있다. 폴 페어필드의 말을 빌자면 이는 교육의 심장이자 영혼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