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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교육 관련

학교지식의 정치학 | 마이클 애플 ㅡ 표준화된 교육과정과 교직에서 '노동의 가치 하락'

by 릴라~ 2018. 8. 19.

번역투 문장이 쉬운 내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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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뿐 아니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및 그 외 지역에서도 공공정책에서의 강조는 불이익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쟁점에 두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평등 문제를 보자. 평등 개념은 넓은 의미로 보든 좁은 의미로 보든 재규정되었다. 이제 평등은 더 이상 과거에 그러했듯이 집단 알력과 불이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평등은 단순히 '자유 시장'의 조건 아래 개인의 선택을 보장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사회적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수월성'이 강조되는 현재 추세는 교육적 담론의 성격을 바꾸었고, 그 결과 학업 부진은 또다시 학생의 잘못으로 인식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되었다. 학생의 학업 실패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부분적이지만 잘못된 교육 정책과 시행 탓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소위 생물학적, 경제적 시장 체제의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교육과 공공정책에서 사회 다위니즘 사상이 확산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p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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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집단에게 학교교육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엔진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고 사회 이동을 보장하는 등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학교교육의 실재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그것을 사회 통제의 형식으로, 혹은 아마도 문화적 위험물, 제도의 구현체로 본다. 여기에서 교육과정과 교수 실천은 학교에 들어오는 학생의 도덕적 세계를 위협한다.


우리 모두가 학교가 하는 일을 이렇게 진단하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은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스펜서의 유명한 질문, "어떤 지식이 가장 가치로운가?"의 배후에 이보다 훨씬 더 논쟁적인 질문, 즉 "누구의 지식이 가장 가치로운가?"라는 질문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교과서에 대한 우파 연합의 집중적 관심에서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처럼 교과서는 단순히 '사실'의 '전달 체계'가 아니다. 교과서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활동, 투쟁, 타협의 산물이다. 교과서는 실제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실제 사람들에 의해 구상되고 설계되고 저술된 것이다. 교과서는 시장, 자원, 권력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제약 속에서 출판된다. 그리고 텍스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놓고 현저하게 다른 신념을 가진 공동체간에, 교사와 학생 간에 격론이 벌어진다. 


내가 이전 저서에서 주장해온 것처럼 학교교육과정을 중립적인 지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정당한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은 오히려 확인 가능한 계급, 인종, 성, 종교 집단간의 복잡한 권력 관계와 투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교육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pp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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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본래의 사회적, 학문적 맥락에서 선정되어 새로운 환경을 지배하는 정치적 규칙에 따라 '재맥락화되고' 변화된다. 이러한 변환 과정은 번스타인에 의하여 훨씬 더 이론적으로 상세화되고 정교화되고 있다. 교과서 출판사, 내용 자문가, 주와 지역 교육 당국 같은 이들-이 모든 사람의 과업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하는 것이다-은 모두 재맥락화하는 대리인으로서 행동한다. 학문 분야로부터, 서로 다른 사회집단 등으로부터 온 본래적 지식은 새로운 맥락에서 권력을 잡은 집단 사람들에 의하여 전유된다. 번스타인에 따르면 '텍스트'는 새로운 맥락에 "재위치화하기 전에 먼저 변환한다." 텍스트가 본래의 위치로부터 '탈위치화'하여 새로운 교육적 상황으로 '재위치화' 할 때, 재맥락화하는 대리인의 논리와 권력 관계가 보장하는 것은 "그 텍스트는 더 이상 전과 동일한 텍스트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협정과 교육적 요구는 지식의 형태와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 p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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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과 전문가주의, 교사의 권력 향상, 임금 및 사회적 지위 향상에 관한 모든 유려한 말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사들의 삶의 실재는 이러한 보수 승리주의 시기 동안의 미사여구와는 유사한 점이 거의 없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많은 국가에서 가르치는 교사의 일상적 삶은 자율성이 증진되기보다는 더욱 더 통제되고 있으며, 교수와 교육과정의 진행 과정을 바짝 죄려드는 행정적 논리에 점점 더 속박당하고 있다. 교사 개발, 협동, '권력 이양'이 좌담거리가 되기도 하고, 매스컴은 상화, 시장화, 지방분권화에 초점을 맞추어 떠들어대기도 하지만, 실상은 중앙집권화, 표준화, 합리화가 대세ㅐ를 이루고 있다. (단지 두 예만 든다면) 영국과 미국에서 환원적 책무성, 교사 평가 체제, 중앙집권화 증가 현상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되어,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는 교육에서 (지역간, 학교간)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교사가 인정받은 교과서 내용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규정하는 지역이 있다. 이 지역의 경우 '인정받은' 내용을 벗어나면 교사는 행정적 제재를 받을 위험에 빠지게 된다. p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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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방식으로 교직을 생각하고, 교직을 소위 복잡한 노동 과정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교직은 생산라인에서,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노동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재 일반적인 직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압력이 점차 교직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사회학에서는 이 현상을 '노동의 가치 하락'이라고 부른다. 노동의 가치 하락은 지배적인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협정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


교직에는 현재 이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첫째는 교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술과 권력을 획득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학교 체제에서 실제로 교사는 자신이 사용하는 텍스트와 다른 교과 자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 제한적인 권리만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교육사 초기, 곧 교과서와 교육과정 선택이 행정적 책임 아래 있을 때보다는, 또는 제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 교과서 채택 정책의 산물이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이다. 교사가 이룩해 온 성과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전국에 걸친 수백 개 학교구에서 수천의 교사가 자신의 교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을 결정하는 권한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해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교육과정에 대한 전체적 행정적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작은 발걸음을 떼어놓은 것이다. (...)


현재 대부분의 교육과정 영역에서 교육과정 계획과 결정은 형식상으로는 보다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선택을 거의 무의미하게 만드는 세력이 여전히 학교에 작용하고 있다. 지역, 주, 국가 수준에서 엄격한 책무성 증진 운동, 수행능력 기초교육과 검사, 목표에 의한 관리, '기초'에 대한 일부 편협한 시각, 강제된 교육과정 내용과 목적 등은 명백하며 더욱 증가하고 있다. 교수 방법, 텍스트, 평가와 산출물은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만 하는 사람의 손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대신 그것들은 국가 및 주 교육부 또는 주 입법부에서 입법화되고 있으며 '위기에 처한 국가' 및 그 후 나온 상당수 국가 보고서에 의하여 지지되고 고무되고 있다. 이러한 보고서는 우리의 공적 담론에서 보수 이데올로기의 힘이 증가함을 보여주는 교육문제에 대한 단순한 평가이자 반응이다. pp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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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업에서와 매우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교사의 탈기술화를 목격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 있듯이 개인이 자신의 일의 상당 부분을 계획하고 통제하지 못할 때, 이러한 과업을 자기 반성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은 곧잘 쇠퇴하고 잊혀진다. 교사가 오랜 세월 어렵게 구축해 온 기술은 상실된다. 그 기술이란 곧 타당한 교육과정 목적 설정, 내용 확립, 수업 및 교수 설계, 교실 '공동체 구축', 학생의 다양한 문화, 욕구 및 필요에 정통한 지식을 기초로 한 교수 및 학습의 개별화 등이다. 여러 방면에서 권위와 통제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수를 (자신의 전문성과 시간을 관리하는) 전문적 활동으로 만드는 일 또한 무산되고 있다. 개인이 노동 통제를 상실하는 것보다 더 소외적이며 속타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교육과정이 점차 중앙 수준에서 계획되고, 체계화, 표준화되고, (가장 철저하게 중앙집권적으로 통제되고 있어 최대 시장을 보장하는 주를 위하여 특별히 씌어진 상업적으로 미리 설계된 교재와 텍스트에 크게 의존하는) 표준화 검사에 의해 측정된 수행 능력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은 많은 전문가가 의도하는 것과 정확하게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그것을 하는가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교사는 없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계획을 집행할 뿐인 소외된 교사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일반적인 임금 노동 과정뿐 아니라 특별히 여성의 임금 노동에 관련된 문헌들은, 엄격한 관리와 통제체제가 갖는 부정적인 효과와 함께 그로 인한 기술, 자율, 장인 기능과 자부심의 상실 수반을 입증하는 사례를 수없이 제시하고 있다. 자주 발견되는 사례로 교육 관료는 산업적 관리의 이데올로기와 기술을 도입하고 있지만, 그들은 서비스 부문과 산업 부분 자체에서 대다수 고용인에게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개입주의 운동은 교사가 자신의 일을 통제하는 능력을 결코 중요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은 명백히 교육과정에서 강조되고 있는 일부 교육 내용 측면에서 상당히 문제성 있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에 대한 단순한 사고방식은 학생이 배웠으면 하는 지식의 종류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명제적 지식, 방법적 지식, 가치적 지식이 바로 그것이다. 명제적 지식은 사실적 정보이다. 예를 들면 매디슨은 위스콘신 주의 수도이다. (...) 방법적 지식은 기술적 지식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 사용 방법, 또는 미국에서 여성이나 역사를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지식이다. '가치적 지식'은 성향적 지식이다. 곧 우리의 미래 행위를 인도하는 규범, 가치, 성향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정직, 자신의 인종적 유산에 대한 자부심, 형식적 학교교육이 끝난 후 더 배우고자 하는 것, 지성적으로 마음을 개방하기, 자신을 민주주의 공동체의 일부로 간주하기, 협동적으로 행위하기 등이다. 이들 각각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어떤 종류의 위계상에 놓는다면 우리 대부분은 사실을 분류할 줄 아는 것이 고등 정신 능력과 비판적 탐구 기술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후자의 지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의의 있게 사용하도록 준비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이 받아야 하는 평가보다 덜 중요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그 결합이 앞에서 비판적 문해라고 명명한 것이다.


교실 밖에서 교육 내용, 교수 및 평가에 대한 통제가 변화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포트폴리오와 수행평가 검사를 아무리 이상화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표준화 검사로 용이하게 측정할 수 있는 사회, 읽기, 과학 등이다. '명제적' 지식과 종종 낮은 수준의 '방법적' 지식이 우선적으로 중시되고, 그밖에 다른 것은 점차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명제적 지식은 '더 안전한' 것으로, 논쟁이 적은 것으로, 그리고 덜 비판적인 것으로 가르쳐진다. 이는 탈기술화를 위한 공식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사회적 지식의 세계를 축소하여 여성, 유색인, 노동자의 지식을 지속적으로 박탈한다. pp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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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는 교사의 노동 조건이 침식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의 하나이다. 격무의 징후는 다양하다. 그것은 사소한 일상사에서부터 보다 복잡한 전문성을 심화하는 일에까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화장실에 가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휴식을 취할 시간이 없는 것에서부터 촌각의 시간도 자신의 분야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노력에 바칠 수 없는 양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심화되고 있는 만성적인 업무 과다 현상 속에서 그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해야 할 일은 점점 늘어나는 반면 필요한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파생한 결과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격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절약하여'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데 '필수적인' 것만을 수행하도록 한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차 전문가에게 의존하여 자신이 필요한 것을 그가 말해주기를 기대하고, 자신이 수년에 걸쳐 개발해온 전문성을 불신하도록 강요한다. 그 과정에서 질은 양을 위하여 희생된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체된다. 시간 자체가 구하기 어려운 희소한 '상품'이 됨에 따라 교사가 고립될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참여자들이 상호작용을 통하여 비판할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재고와 동교교육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한되고 있다. '관리 기술'이 승리함에 따라 집단적 기술이 패배한 것이다. 한 교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일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다른 사람이 결정하고, 하는 일이 타인의 생각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사가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란 대단히 어렵다. pp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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