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선생의 글을 많이 인용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었다. 평전에서 내가 특히 눈여겨본 부분은 3.1운동 직후 임시정부를 둘러싼 갈등이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이승만이 추대되는데,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국을 위임통치해줄 것을 건의하는 문서를 보낸 것을 재미동포의 편지로 알게 된 신채호 선생과 김창숙 선생은 대노하여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애를 쓴다. 이승만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면서도 상해에 오지 않고 미국 현지에서 머물며 대통령 직함만 사용하고 있었다(당시 임시정부는 내각제여서 국무총리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신채호 는 이승만을 몰아내는데 실패한다. 과반 이상의 사람들이 반대를 표했고, 성격이 불 같은 당시 경무국장이던 김구 선생도 임시정부가 막 결성된 상태여서 임시정부 자체가 와해될 수 있다면서 중립을 표시했기 때문이었다.
신채호와 김원봉의 의열단이 무장투쟁을 주장했다면, 임정은 외교론에 치우치고 있었고 테러 같은 방법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서 노선이 갈리게 된다. 결국 신채호 선생은 임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별도로 '신대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데 이는 임정의 방해로 중단되고 만다.
신채호 선생의 철학과 사관을 생각했을 때 그가 위임통치를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주장한 점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당시 임시정부가 국무총리로 이승만 대신에 정통성 있는 이회영 선생 같은 이를 왜 추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당시 윌슨이 미국 대통령이고 그가 프린스턴대에 있을 때 그 아래에서 수학했던 인물이 이승만이므로 이승만이 일정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했을 법도 하다.
결국 노선의 차이로 신채호 선생은 임정을 탈퇴한다. 이 부분에 대해 D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D는 선생이 임정과 맞지 않다 하더라도 계속 임정에 남아 임정에서 활동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이 자기와 조금만 다르면 나가서 또 단체를 만들고 단체를 만들고, 그런 식으로 분열하는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런 식으로 단체를 만들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고. 그것이 우리 독립운동의 한계이고, 독립운동가들이 아무리 달라도 임정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D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임정 조직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신채호 선생(뿐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들도)이 그곳에 끝까지 남아 개혁하고 바꾸어나갔다면, 해방 후 선생에 대한 평가와 대접도 훨씬 후했을 것이다. 임정을 끝까지 지킨 김구 선생은 현실 정치에서 이승만에게 패했지만 그의 가치는 살아남았다. 독립투쟁과 한글 연구에서 지도자급으로 공적이 큰 김두봉이 북한 정권 수립에서 큰 역할을 하다가 결국 숙청되어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 다시 묻게 된다. 김두봉 선생이 해방 후 남과 북 어디에서건 한글 연구에만 매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사대주의와 기회주의를 미워하는 면에 있어서라면 신채호 선생을 따를 사람이 없다. '주체' 철학은 김일성이 아니라 신채호 선생이 제대로 된 원조가 아닐까 싶다. 신채호 선생의 눈으로 보면 조선사 전체를 사대주의로 매도하게 된다는 사학계의 비판도 있지만, 조선에서 한글의 위상과 명이 망한 후에도 명의 연호를 계속 쓴 것만 보아도 사대주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해방 후 70년 한국 사회는 많은 것을 극복해왔지만, 정신사의 측면에서 아직 선생이 비판한 그 지점에서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것도 같다. 사회의 많은 부문에서 강자에게 붙는 기회주의자들이 승리해왔기 때문이다. 선생의 소설 '꿈하늘'에 나오는 여러 '지옥'을 보면 선생은 기회주의를 당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독립운동방법론에서 외교론과 준비론도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꿈하늘'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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