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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이야기/러시아

순결한 자연, 극동의 캄차카 / 러시아 캄차카 반도 '03

by 릴라~ 2004. 7. 26.
 

 

▲ 설원에서 바라본 까략스키


북쪽으로 가고 싶어 택한 곳이 러시아였다. 냉전 시대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동토의 땅이었지만 이제 우리의 시야에 나날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는 곳. 드넓은 러시아 땅 가운데 내가 택한 여행지는 가장 극동에 위치한 캄차카 반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이 아름답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연해주의 중심 도시 하바롭스크까지는 불과 두 시간 반의 거리였다. 블라디보스톡이 외곽에 치우쳐 있어서 구 소련 시절, 극동 지역의 거점 도시로 개발한 곳이 하바롭스크라 했다. 하바롭스크의 저녁은 건물마다 온통 백열등의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독특한 느낌을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형광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날, 하바롭스크 공항에서 만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바이칼 호수를 보러 서쪽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 하바롭스크에서 바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시작된다. 다음 기회엔 이 길을 따라서 바이칼까지 가리라 생각했다.

우리 일행은 그와는 정 반대편, 동쪽의 캄차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캄차카의 중심 도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까지는 약 두 시간이 걸렸다. 로스트월드 투어의 통역 아냐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이번 여행은 난생 처음으로 떠나는 패키지여행이었다. 일행은 가족 세 팀, 60대인 네 사람이 한 팀, 나를 포함해 혼자 온 세 사람과 가이드까지 총 열아홉 명이었다. 늘 배낭을 꾸려 혼자 나섰던 걸음이지만 이번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기 여행은 자신이 없었고 트레킹 위주의 일정이라서 패키지의 편리함을 택했다. 여행 내내 나는 이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캄차카 반도는 백여 개의 화산이 솟아 있고 그 가운데 이십여 개는 활화산이다. 만년설을 볼 수 있는 삼천미터 급의 산들, 곳곳에서 솟아나는 간헐천, 연어가 회귀하는 아름다운 강, 야생 동물, 그리고 바다. 자연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우리나라도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자연을 지니고 있지만 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자연에 늘 매혹되었다. 캄차카는 그런 곳이었다. 캐나다 쪽과 느낌이 약간은 비슷했다. 아마 알래스카도 이와 경관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

그러나 낙후된 경제 사정, 러시아에서도 가장 상황이 좋지 않은 지역에 속하는 이유 때문에 도시는 회색빛의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나즈막한 언덕들이 이어지는 항구 도시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스키는 잘 가꾸기만 하면 무척 예쁜 도시였을 테지만, 도시 전체가 보수를 하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어 안타까울 만큼 퇴락한 모습이었다.

동서 냉전 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했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군대가 철수하고, 인구도 계속 줄기 때문에 경제 사정이 나아질 전망은 별로 없다고 한다. 반도 전체에 사십만 명 정도가 산다고 하는데 주 산업은 어업뿐이며, 천연 자원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아냐의 말에 따르면 여름에는 도시 전체에 난방이 되지 않아서 찬물로 샤워해야 할 정도라고.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레닌 동상이 구 소련 시절의 잔영을 보여준다. 러시아 땅의 레닌 동상이 대부분 철거되었다고 들었기에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을 물어 보았다. 사람들이 그냥 두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 세상 모든 독재자들의 심리, 자기의 동상을 곳곳에 세워두는 그 마음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토록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우리가 흔적을 남겨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사람들의 마음 속 뿐일 진데.

중앙 광장을 지나면 러시아인들의 이주를 기념하는 공원이 나타난다. 이곳에 러시아인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캄차카 대탐험이 시작된 18세기 말부터이다.

캄차카 반도의 원주민인 고시베리아 인종에 속하는 에벤키족은 북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순록을 키우기 때문에 초지가 필요해 북쪽 툰드라 지대에 산다고 한다. 에벤키족 역시 몽골리안 계통일 것이기에 관심이 갔다. 물어보니, 에벤키족 문화의 중심지는 에쏘.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열 시간이나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낙원처럼 아름다운 곳이라고. 속으로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바친스키 트레킹

트레킹을 위해 아바챠 화산 지대로 가는 길, 도로 옆 빈 들판은 노란 색, 분홍색의 갖가지 화려한 야생화들로 그득해서 눈길을 끈다. 우리는 탱크처럼 큰 바퀴가 달린 특수 차량을 타고 갔는데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인 화산 지대에 접어들자 길이 아니라 옛날 강이 흘렀던 자리 즉 물이 마른 강을 따라 갔기 때문이다. 아냐 말고도 산악 가이드, 요리사 등 여러 명이 동행했다.

두 시간 만에 눈 덮인 까략스키와 아바친스키가 바라보이는 넓은 평원 지대에 도착했다. 통나무집 한 채와 작은 오두막 셋이 전부였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는 야생화가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공기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 청량한 공기는 허파 가득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만년설로 뒤덮인 산들의 웅장한 자태도 내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게 해주었다.

▲ 우리가 타고 간 차량
▲ 평원에서 바라본 아바친스키


뜨거운 샤워는 여기선 호사스런 기대에 불과했다. 통나무집 옆으로 눈이 녹아 흐르는 개울이 지나고 있었는데, 물이 너무나 차가워서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간신히 세수를 했다. 오두막이 좁고 불편해서 나는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여름에는 보통 해발 4000미터는 되어야 눈이 있는데, 여기는 위도가 높아서 900미터 정도인데도 음지엔 눈이 쌓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여름은 고작 세 달, 나머지는 겨울, 5월부터 눈이 녹기 시작한다고 한다. 겨울에는 우리가 서 있는 이곳 전체가 눈으로 덮여 있다고. 캄차카의 겨울 여행은 개썰매 타기와 스키 투어가 전부란다.

겨울 파카까지 준비했지만 날씨가 좋아서 가벼운 옷으로도 무난했다. 백야라서 밤 11시까지 환하다. 산책 겸 주위를 둘러보러 갔더니, 바위틈마다 모르모트가 굴을 파고 살고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단 하나, 모기가 너무 극성이어서 저녁 무렵에는 단 1분도 제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다는 것. 얼마나 달려드는지 두 손으로 휘저으며 실내로 쫓겨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오두막


다음 날 아침 6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3500미터의 까략스키는 무척 매혹적이었지만 정상 부근에서 암벽 등반을 해야 하는 등 전문 기술이 필요해서 우리에게는 무리였다. 또한 3000미터 이상을 당일에 오르면 고소 적응에 무리가 온다. 중턱에서 하루를 묵어야 하는데 우리같이 큰 그룹이 이동하기에는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회의 끝에 일행은 까략스키 바로 오른쪽에 버티고 섰는 2750미터의 아바친스키 정상까지 등반하기로 했다. 아바친스키는 활화산으로 지금도 꼭대기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하루 만에 왕복하기에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언덕을 수없이 넘어야 했기에 왕복 10시간이 걸렸다.


▲ 연기가 솟아오르는 아바친스키 정상, 붉은 빛깔이 용암이 흘러 내린 자국이다.


화산 지대에는 나무라곤 볼 수 없었다. 점차 올라갈수록 풀꽃마저 자취를 감추고는 화산재와 검은 자갈밭만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마치 달 표면처럼 황량하면서도 무척 고적한 느낌을 주는 산이었다.

길이 특별히 있는 게 아니어서 능선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아바친스키의 2000미터 쯤 되는 곳에 올랐을 때 우리 눈앞에 가깝게 펼쳐진 까략스키의 자태는 웅장함, 아름다움, 늠름함 그 자체였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치솟은 하얀 꼭대기는 아래로 갈수록 치마 자락처럼 넓게 퍼져 땅에 굳건히 뿌리내리며 마침내 땅과 하나가 된다.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삼각의 실루엣이 주는 단순한 위엄에 도취되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이 없다면 쓸쓸한 풍경이었으리라. 그러나 부드럽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만년설이 화산의 황량함을 감추고 순결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까략스키가 사람이라면 한 눈에 반하고 말 것 같았다. 자연이 지닌 순수함처럼 인간도 그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 아바친스키에서 바라본 까략스키


산행을 시작한지 6시간 만에 아바친스키 정상에 닿았다. 마지막 코스는 정말 힘들었다. 경사 급한 자갈밭을 그저 올라가는 것이었기에 발은 자꾸만 뒤로 미끄러졌고 한 발 한 발 옮기는 것이 천근이나 되는 듯 무거웠다.

검은 돌밭을 지나 용암이 흘러내린 붉은 빛깔의 비탈면을 힘겹게 올라 꼭대기에 닿았다. 유황 냄새, 지금도 불타고 있는 연기,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들…. 마지막으로 폭발했던 게 1991년이라 한다.

내려오는 길은 더욱 힘들었지만 능선을 따라 걷는 그 길에는 더할 나위 없는 한적함과 고요함이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으리. 마치 속세의 시간을 벗어나 다른 차원의 시간 속을 홀로 걷는 듯했다. 그 맑은 감각 속에는 세상사에 다친 마음을 치유해 주는 힘이 깃들어 있다.

인간들의 발자취로 더럽혀지지 않은 맑고 깨끗한 자연이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이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때묻지 않은 청정함과 사람의 자취가 느껴지지 않는 고적함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눈보라가 살짝 일어 눈 앞을 가리곤 했는데, 한여름에 맛보는 겨울의 정취는 마음에 생기를 더해 주었다.

산행 중 우리 일행 말고는 오스트리아 사람을 딱 한 명 만났다. 그리 위험한 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눈이 많고 길이 분명하지 않아서 가이드가 필요할 텐데 용기가 대단하다 싶었다. 여행하다 가끔씩 이런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사막도 혼자 건너갈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산 중턱을 지나 아래가 가까워지니 풀꽃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메마른 화산재 위에 피어나는 야생화들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길을 걷는다. 꽃이 특별히 화려한 맛은 없었지만 물기 없는 검은 돌무더기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들의 생명력은 놀랍기만 하다. 우리들 역시 메마르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도 저렇게 새하얀 꽃을 피워내야 하리.


▲ 돌밭에서 피어난 야생화
▲ 메마른 땅에서도 이들처럼




아바챠 만에서의 해프닝


산에서 돌아와서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다음 날은 날씨가 좋지 못했다.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서 갖고 온 파카가 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파라툰가 온천 호텔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아바챠 만에서 바다낚시를 하기 위해 다시 페트로파블롭스크로 향했다. 항구 역시 한때는 위용을 자랑했겠지만 지금은 쇠락을 거듭해서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다의 모습은 동해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떼를 지어 날아가는 새들의 광경이었다.

배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가니 만을 벗어나 태평양 바다가 펼쳐졌다. 그러나 만을 벗어나려니 파도가 너무 세차서 배는 다시 안전한 만 안으로 들어와서 낚시를 했다. 광어 비슷한 물고기가 잡혔고, 즉석에서 회를 맛보았다.

잔뜩 흐린 날씨 때문에 크루즈 여행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히려 배에서부터 본격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60대인 네 명의 남자 분들은 첫날부터 차만 타면 보드카 파티를 일삼아서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게 했는데, 배에서는 아예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저녁 식사 중에는 물론이고 파라툰가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계속 주정을 일삼아 참다못한 다른 사람들과 결국은 말다툼이 벌어졌다. 특히 초등생 자녀들을 데리고 온 가족은 이런 법이 어디 있냐고 거세게 항의했고, 큰 고함 소리가 오갔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들과 대화가 될 리 만무하다. 멀쩡한 사람들이 참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각자 제 몫의 돈을 내고 왔으므로 모두가 즐길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자신들만 있는 양 마음대로 행동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접해주기를 바랐다. 그 뿐 아니라 러시아 여자들만 보면 얼마나 추근대는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 여행 온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록 지금의 경제 사정이 열악하다고 해도 러시아는 분명 유럽 문화권이다. 사람들의 태도와 생활 방식에서 오랜 역사와 고급문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적어도 여기 캄차카에는 아직 자본주의의 물결이 덜 밀려들어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참 순수했다. 우리 가이드는 동행한 현지 인솔자들이 옵션 관광 개념을 모르는 데에 놀랐다고 한다. 돈이 좀 있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한국인들을 러시아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주위 사람들로 해서 여행을 망칠 수 있음을, 특히 기억에 남는 여행은 경관이 좋은 곳일 뿐 아니라 멋진 만남이 있었던 곳임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들로 인해서 내가 여행을 온 건지 인내력을 시험하러 온 건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잠시 들렀다. 나는 동방 교회의 독특한 성화인 이콘(icon)을 무척 좋아하는데, 작고 소박한 성당이었지만 성당 안은 신비로운 이콘들로 가득차 있었다. 공산주의 정권 하의 종교 금지도 러시아의 이 오랜 전통을 없앨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었다. 일행을 피해 거기서 쉬어 갔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 성화(이콘)



놓치고 만 비경, 비스트라야 강

산과 바다 다음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유명한 캄차카의 강이었다. 연어 떼가 회귀하며 야생 불곰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캄차카 반도에는 크고 아름다운 강이 많이 흐르는데 우리 일행이 갈 곳은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가까운 비사트라야 강이었다. 강을 따라 보트 여행을 하며,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전날 이미 여행 기분을 잡쳤던 나는 술파티를 벌이는 말썽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이드와 아냐에게 말해서 호텔에 남게 되었다. 여행하다 보면 성격이 다 드러나는데, 역시나 나는 ‘회피형’의 성격을 어김없이 드러내어 원치 않는 상황에서 멀찌감치 물러서는 것으로 대처한 것. 여행에서 돌아와서 나는 이 일을 다시 돌아보았는데, 나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침 일찍 출발하려니 몸이 따라주지 않은 이유도 컸던 것 같다. 오랜만의 산행으로 인한 피로가 다 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오리듬을 무시하고 일정대로 움직이는 것이 내게는 무척 힘이 들었는데 아마 패키지여행에 익숙치않아서 일 것이다.

파라툰가 호텔은 야외 온천 풀장이 잘 갖추어져 있어 러시아인들도 주말을 이용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캄차카에서는 대체로 영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젊은이들은 영어를 꽤 잘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캄차카에서는 꼭 헬리콥터 투어를 해야 한다고, 정말 장관이라고 추천해 주었다. 간헐천이 멋지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서울보다 오히려 부산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에 다녀왔다는 사람도 많았다. 멋진 도시라고 입을 모았다. 물고기를 실은 배가 캄차카에서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매일 부산으로 오가는 모양이었다. 매점에 가면 한국제 컵라면, 초코파이 등이 널려 있다. 그 뿐 아니라 시내 버스정류장에서도 '아름다운 제주' 등의 글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버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일행이 돌아왔다. 비사트라야 강은 이번 여행의 꽃이라 할 만큼 비경이었다고들 했다. 물살 없이 고요하면서도 넓게 펼쳐진 강의 풍경은 카메라로는 담지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사람 키 만한 연어를 잡았으며 연어가 산란하고 난 다음에 떼지어 죽어 있는 광경을 보았노라고, 곰발자국을 따라 야생곰을 찾으러 갔노라고도 했다. 그리고 뗏목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간헐천을 만나서 뜨거운 온천욕도 했다 한다. 다만 그 네 사람은 거기서도 술주정을 부려서 캠프파이어가 물거품이 되었다고.

가장 멋진 광경을 놓쳤다니,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여행의 일부이다. 마음이 넓어지는 기쁜 순간 뿐 아니라 후회와 아쉬움, 안타까움도 여행의 일부이다. 여행은 삶의 축소판과 같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순간도 존재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모든 경험을 가슴에 담고 또 다른 순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사샤의 작은 낙원

마지막 밤은 특별했다. 혼자 사는 특별한 남자를 따라가서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할 거라는 아냐의 이야기에 의아해했는데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사샤라는 이름을 가진 중년의 캄차카 사람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곳은 그의 작은 낙원이었다.

통나무집과 그가 꾸며 놓은 정원 사이를 그의 설명을 들으며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그는 식물에 관심이 많아서 캄차카의 야생 식물을 많이 기르고 있었는데 각각의 효능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그가 그 자신과 같다고 소개한 작은 소나무였다. 나무 둥치가 지그재그 모양으로 휘어 있었는데, 겨울이면 눈이 하도 많이 와서 눈의 무게로 그렇게 굽었다고 한다. 사샤는 자기 인생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삶의 무게에 짓눌렸지만 늘 다시 일어섰다고 이야기했다. 아무 것도 없던 상태에서 지금과 같은 공간을 창조했다고, 숱한 좌절을 뛰어넘었노라고. 여름 한 시즌에 500명의 관광객들이 그의 집을 찾는다고 한다. 내년 목표는 1000명이란다.

그 후에 우리는 아름다운 호숫가로 안내되었고 인디언 티피를 닮은 멋진 오두막에 들어갔다. 티피 안에서 캄차카의 야생 식물들로만 요리한 음식과 술, 차를 맛보았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산채 비빔밥 비슷한 것이어서 나는 별다른 새로움을 못 느꼈는데, 서양 사람들은 그런 음식에 익숙치 않아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사샤의 악기 실력, 노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전직이 뭐냐고 물으니 음악 교사와 배우란다. 그가 기타를 치며 불러주는 러시아 민요는 흥겨우면서도 집시적인 애달픈 분위기를 자아냈고 그 소리에 맞춰 꿈결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긍정적인 에너지와 활력이 티피 안을 채워갔고 그간 사람들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 사샤


그의 삶이 궁금해진 나는 질문을 했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한참을 생각한 뒤 대답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나는 그의 밝음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그가 견디고 이겨내었을 고독과 절망 뒤에 찾아온 것임을 느끼며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삶도 어려운 문제로 가득 차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오롯이 즐긴다고 했다. 다른 나라 여행자들은 자기들의 문제는 고국에 놔두고 기쁘게 여행을 즐기는 데 반해서 한국 사람들은 자기 삶의 짐을 여행지에까지 갖고 와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그룹에 문제가 있었다고, 술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해명을 했다.

호텔에 있을 때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닌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한국 사람들은 대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하도 잘 웃어서라고 한다. 십 년 전도 아니고, 아직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표정이 굳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사샤는 캄차카의 자연이 여러분을 그리워한다고, 자기 음식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맛본 사람은 반드시 여기에 다시 오게 된다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나는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 했다. 사샤는 다음번에는 한국 노래의 악보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캄차카라고 했다. 그러나 내게 있어 더 아름다운 것은 자기 땅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풍요롭건 척박하건 세상 모든 땅은 그곳에 터박아 사는 사람들의 땀과 애정으로 인해 다 아름답고 성스럽기에. 여행을 하며 모든 땅이 성지임을 깨닫는다.

짧은 만남일수록 아쉬움이 큰 법, 다음엔 넉넉한 시간을 내어서 바이칼 호수와 그 아래 몽골의 고비 사막까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상트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까지 가야겠다. 그 길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자신과 꼭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얼굴들. 그 모든 얼굴들 속에서 나 자신을 본다.


 

2003년 여름, 캄차카 여행의 기록입니다.
  2004-07-26 12:11
ⓒ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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