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화두로 진중권, 서경식, 박노자, 박상훈, 조국, 고혜경, 정희진, 이강서, 황대권, 문요한 10인의 인문학자들의 강연을 모은 책이다. 철학자, 사회학자, 여성학자, 법학자, 역사가, 꿈분석가, 농부, 정신과 전문의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지금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문제를 그들 전공의 관점에서 분석한 '엑기스'를 강연투의 입말로 쉽게 정리한 책이어서 모든 장이 재미가 있었다. 특히 정희진의 글은 한 구절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우리가 얼마나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하나가 전체적 스토리여서 여기서 발췌는 하지 않았지만, 고혜경의 세월호와 꿈 이야기도 신선한 감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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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과 멘토링이 넘쳐나는 것은 일면 우리 사회가 굉장히 병들어 있다는 징후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문화가 가진 한계도 분명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상처라는 말이 왜 나오는가, 그리고 인간사회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독일 유학하면서 느낀 것인데 그곳은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열성적인 학부모들도 있어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 애를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만큼 극성스럽지도 않고, 공부 못한다고 아이들을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
직업에 따른 차별도 없고, 당연히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을 성적에 따라 줄 세우지 않습니다. 그렇다 보니 공부를 잘 하느니 못하느니 평가하는 말도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동료를 친구로 생각하게 합니다. 반면 우리는 동료든 친구든 모두를 경쟁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문화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는 분위기입니다. 경쟁을 시킨다 하더라도 일단 조별 협력부터 하게 하거든요.
또 하나는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우리나라는 무조건 CEO, 무조건 기업가, 무조건 사장, 무조건 전경련을 추켜세웁니다. 그러면 노동자는 무엇인가요? 경제 발전의 주체가 아니라 경제의 투입요소이고 대상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무조건 회사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말을 안 들으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40대 후반 노동자를 해고시키면 경영합리화, 경영효율화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독일에서 40대 후반 노동자를 해고시키면 '노하우 상실'이라 여깁니다. (...)
이런 얘기를 하면 '독일은 선진국인데 어떻게 우리랑 비교가 되냐'고 말합니다. 사실 독일은 과거에 지금 우리보다 소득 수준이 훨씬 낮을 때에도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잘살았어요. 왜? 평등하니까. 사실 우리도 지금 독일 국민 못지않게 세금 낼 만큼 내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푸대접만 받고 있는 거죠. 독일 얘기를 꺼낸 것은 '인간의 삶을 지금 여기와는 다르게 조직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보다 나은 삶의 방식을 떠올리는 것. 그게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상상력이겠지요. 대한민국에서 금지된 게 바로 그겁니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을 떠올리는 상상력. 왜 그럴까요? 사실상 대한민국은 섬이거든요. 3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위로는 휴전선으로 막혀 있습니다. 그러니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게 공간적으로는 북한밖에 없어요. 다른 나라는 다 바다 건너 멀리 있거든요. 그러니 그저 북한보다 잘살면 잘사는 걸로 아는 거죠. 시간적으로 비교대상이 보릿고개 넘던 시절로 제한됩니다. 그러니 보릿고개 넘던 시절보다 잘살면 진짜 잘사는 걸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박정희 각하를 그렇게 추켜세우는 거죠.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정의롭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지금의 난관들을 헤쳐갈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스스로 그 방법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고도성장만 떠올리며 옛 방식을 예찬할 뿐이죠. 그러다 보니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고, 이 풀리지 않은 문제가 주는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짊어지게 되는 겁니다. pp45-48,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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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학교 폭력의 원인을 지나친 경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생님들의 체벌을 보고 배우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군사문화의 재현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시간이 너무나 긴 부모에게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애정 결핍이 폭력으로 연결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학교 폭력 통계를 보면 유럽의 통계보다 높고 폭력의 형태들이 상당히 악질적입니다. 유럽은 왕따 같은 심리적인 폭력이 있지만 우리 같은 경우에는 신체적인 폭력도 서슴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학교 폭력으로 인한 충격적인 자살사건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학교 폭력 근절 운동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폭력을 문제 삼은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효과가 약간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병리적인 사회는 아주 어려서부터 병리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학교 폭력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pp84-85,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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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측면에서 대한민국은 고도의 소비사회요, 원자화된 소비자들의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물질 소비가 아니라 영상 소비 사회로 이미지 소비, 체험 소비 등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 해도,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영상 소비를 할 수 있고 가끔 가다가 저가 동남아 여행을 즐기는 등 일정 정도 체험 소비도 할 수 있는 거죠. 특히 영상 소비, 상징 소비는 엄청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보면 고도의 영상 소비 사회로 발전되어 가고 있습니다. (...)
각자 자기만의 영상을 소비하는 원자화된 사회는 소비자들 사이에 연결이 잘 안 되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소통이 안 되고, 각자가 아노미화된 사회라고 합니다. 각자가 소통이 안 되는 사회는 남의 아픔에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
어떤 영상을 각자가 조용히 소비한다는 것은 결코 비폭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즐기는 영상들 중에 폭력적 영상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종격투기는 어떤 규칙도 없이 무조건 때려눕히는 게임입니다. (...) 현대판 검투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강력한 폭력적인 영상을 일상적으로 보는 사회를 비폭력화되었다고 하는 것에 저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고도의 소비 사회에서 어떻게 박정희 시대의 군사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걸까요? (...) 군대에 갔다 와야 통제 가능한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도의 소비 사회에 고도의 폭력 사회인 박정희 시대의 군사문화 폭력성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극복하려고 하고, 지양하려 하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pp84-88, 박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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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정치학은 인간이 선하게만 살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시작합니다. 악에 맞서 그 악이 사회로 더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일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악마의 무기를 부여잡아야 하는 것, 비록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더라도 나아가 자기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일 때도 많습니다. 정치를 통해 구원받을 수는 없지만 구원받을 만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회구성원이 많아지게 하는 것, 어쩌면 이를 고민하는 것이 정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개인 삶과 좋은 사회와의 관계를 잘 말해 주는 책으로 미국의 노동변호사 토마스 게이건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소개합니다. 거기 아주 재미난 예시가 나옵니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자기 전공으로 직업 활동을 하며 살 가능성이 10퍼센트도 안 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큰 차이는 없지요. 미국은 산업 내지 제조업이 지극히 약화된 사회가 되었기에 졸업하고 나서도 대개는 서비스업에 취직합니다. 아시겠지만 미국은 의료보험이 공보험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보험혜택을 받을 수 있고, 대학 다니는 동안에도 학자금을 융자 받을 수 있고, 결혼을 하려면 집이 필요한데 그것 역시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대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 학생들은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문제와 관련해 스펙과 같은 배우자의 외적 조건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반면에 유럽에 있는 젊은이들은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가를 살펴보면 좀 다릅니다. 한 앙케이트 기관이, 유럽 여성들에게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은가를 물었는데, 그 응답이 흥미롭습니다. 1위 응답은 키스 잘하는 남자, 2위가 유머 있는 남자였습니다. 입 맞췄을 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고받지 못하는 사람과는 사랑도,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인생은 모두 비극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태어난 사람 없고, 원해서 죽은 사람 없습니다. 다 병들고 죽는 게 인생입니다. 이런 비극적 운명과 싸울 수 있도록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아마 유머일 겁니다. 그러니 유머 없는 남자랑 인생의 우여곡절을 걸어갈 수 있을까요? 어렵다는 겁니다. 3위는 요리 잘하는 남자입니다. 요리는 단순히 분담해야 할 가사노동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기꺼이 차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야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답니다. (...)
그런데 자신이 속한 사회 공동체에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삶의 조건이 어떠냐에 따라 사랑하고 연애하는,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문제 역시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
정치학은 이런 문제를 다룹니다. 개인이 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은 물론 상당 부분은 개인의 책임이지만, 그 개인이 속한 사회의 정치가 얼마나 공정하게 경제를 운영하고 복지나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지에 따라 개인 삶은 아주 크게 영향 받는다는 것, 이 문제를 중시하는 것이 정치이고 정치학입니다. pp100-103,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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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아픈 노모를 모시고 있더라도 군대를 가야 하는 게 지금 우리의 징병제입니다. 누군가는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어 돈이 더 필요하지만 소득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강제되는 게, 민주정치의 현실입니다. 정치는 섬세한 조율의 체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거칠고 조야한 조율의 체계'입니다. 당연히 특정 개인들에게는 혜택을 준다 해도, 다른 개인들에게는 억압적인 기능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한다면, 평균적인 삶의 조건은 많이 달라집니다. (...)
정치가 모든 것이어서가 아니라, 개개인의 삶의 뿌리와 기반을 튼튼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인간 사회의 필수적 기능이어서라는 것,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pp106
정치학자들 누구도 무질서나 무정부를 상찬한 적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그들은 좋은 통치, 좋은 질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말합니다. 공적 권력 없이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공적 권력이 없는 상태는 곧, 사회 속의 강자들이 지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민주주의의 힘은 정치의 방법을 통해 그들도 법 앞에 평등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민 권력을 정치적으로 조직해, 이를 잘 활용하는 것, 그게 민주주의 요체이고 핵심입니다. pp120,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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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을 보면, 링컨이 노예제 폐지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반대하고 나서는 정치 세력이 너무나 많습니다. (...) 링컨은 차선책을 선택합니다. 완전한 해방은 못 이룬다 해도 흑인 노예도 법 앞에서 평등한 권리를 갖게 하는 것, 거기까지만이라도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정헌법 13조는 이런 취지에서 제안되었는데,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반대파 가운데 20석의 의원을 찬성 쪽으로 돌려야 했습니다. 링컨은 국무부 장관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돈을 써도 좋고 협잡을 해도 좋고 폭력을 써도 좋다. 무조건 20석을 가져오라!"고 말입니다.
링컨과 미국 사회는 수정헌법 13조 통과라는 목표를 이루기까지 참으로 지난한 과정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남북전쟁으로 60만 명이 죽기에 이릅니다. 남부에서 휴전협정을 제안했지만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는 대가는 적지 않았습니다. 강경파들은 반대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엔 온건파들이 반대할 딜레마적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링컨은 가지고 있는 포탄을 남부의 전략 지역 한 곳에 쏟아 부으라고 명령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최대 살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휴전협정을 하되 남부의 협상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살인을 지시한 것이지요. 동시에 강경파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워싱턴 밖에서 남부의 협상단을 비밀리에 만납니다. 일종의 음모를 꾸미는 것이지요. 흑인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수정 헌법 조항을 통과시키기 위해 규범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수많은 부도덕한 행위 선택을 감수한 것입니다. '이런 부도덕한 정치는 못하겠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면 정치 안 하겠다' 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변화를 이룰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옹호하시겠습니까? pp121-122,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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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민주주의를 봅시다. 100년 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요, 가장 못 배우고 문화 수준도 가장 낮았습니다. 그런 스웨덴을 오늘날처럼 바꾼 것은 바로 정치이고 정당이었습니다. 사민당이라고 하는 좋은 정당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균형 있는 노사관계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스웨덴의 여러 가지 사민성 관련 조사를 보면 참 놀랍습니다. 그들은 좋은 사민성을 원래부터 타고났던 것이 아니라 그런 스웨덴의 민주정치가 길러낸 변화입니다. 그웨덴은 누군가 배를 곯는 아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고 아무 관계가 없는 아이라 해도 그 아이를 위해서 기꺼이 세금을 더 내겠다는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설령, 그 아이가 스웨덴의 아이가 아니라 저 멀리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세그을 더 걷어 원조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비율도 가장 높습니다. 스웨덴은 인구 규모로는 우리의 6분의 1밖에 안됩니다. 경제 규모도 우리가 훨씬 큽니다. 그런데 스웨덴이 대외 원조에 쓰는 예산의 크기는 우리의 정확히 10배입니다. pp127,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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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강해진다고 해서, '절대 권력'이 되지 않습니다. 왜?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비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치권력과 민주사회에서의 정치권력은 차원이 다릅니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정치권력은 시민권력의 정당한 구현체이자, 민중의 대표자들이 활동하는 공적 세계입니다. 정치권력의 민주적 힘이 강해야, 관료제가 가진 위계적인 불평등 구조, 그리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불평등 구조들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관료제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것도 정치권력이 갖는 민주적 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인간을 선하게 만들 일이 아니라, '권력으로 권력을 견제하는 것'을 통해 타인에게 악한이 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정치적으로 조직된 민주적 권력 없이 오늘날의 사회를 공정하고 자유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pp128-129,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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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세력이 즉각 재벌개혁 등 '경제적 민주화'를 추진했더라면 IMF 경제 위기는 닥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 갔지요. (...) IMF 경제 위기 종료 이후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는 더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교육, 주택, 보건, 의료, 경제, 문화, 일자리 등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회권'이 위태로워지는데도 시민들은 크게 분노하지 않고 있습니다. IMF 경제 위기는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경제체제는 여전히 그 당시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동과 복지를 강조하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매도되고 있습니다. pp143-144,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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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대부분의 나라에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지요. 정규직을 채용하면, 월급 외 각종 비용이 지출됩니다. 예컨대 사원아파트를 지어 제공한다거나, 추석 및 설날 상여금을 준다거나, 자녀 등록금 보조금을 준다거나 등등. 그리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는 것도 부담스럽겠지요. 그런데 다른 OECD 나라 비정규직은 우리나라와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명절 상여금, 효도 수당을 못 받지만, 동일한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pp158
대중이 '경제 민주화'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지난 2012년 대선 시기입니다. 경제 민주화를 위한 여정은 이제 시작입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그러했듯이, 경제 민주화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는 경제 성장도 정치적 민주화도 단기간 내에 이루었습니다. 이제 경제 민주화 차례입니다. 내 자신과 가족의 현재 삶, 나의 노후, 내 자식의 미래 등을 위하여 현재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그것이 변화의 출발점입니다. pp162, 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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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상처, 고통은 '감정'이 아니라 '인지' 작용입니다. 감정으로써 분노를 언설하는 것은 감정과 이성을 나누는 이분법의 산물입니다. '분노는 감정이고 대화는 이성이다' 식의 사고방식은 아마도 분노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잘못된 인식일 것입니다. '분노=폭력'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분노'인가가 가장 본질적인 논쟁의 주제가 도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분노를 이성적 판단을 상실하고 생각을 잃은(?) 상태로 본다면, 분노는 '문제적인 개인의 문제 행동'일 뿐이게 됩니다. 분노의 원인에서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탈정치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때 억울한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게 되고 이른바 '한'이라는 '사유'가 몸에 새겨지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면 분노는 인식 과정이고, 그 '해결'(치유)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다르게 해석하기의 과정, 인식의 교정, 새로운 앎의 과정입니다. 치유는 '어루만짐'을 넘는, 새로운 인식입니다.
분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노의 맥락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그 맥락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문화적입니다. 분노할 만한 사건의 기준은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삶에 대한 기대, 자신에 대한 기대, 윤리, 정치적 의식은 사회에 대한 대응, 적응, 살아가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pp201-202
물론 세상에 억울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누구의 억울함인가?' '정당한 억울함인가?'입니다. 분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 해결과 가장 거리가 먼 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가해자의 피해의식이나 권력자의 분노는 규범이고 약자의 억울한 감정은 조절되어야 할 부정적 감정으로 간주합니다. 권력은 다수의 억울한 마음을 두려워합니다. 분노에 대한 부정적 이데올로기는 집요합니다. 분노를 표출해도 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은 대개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이지요. '남성'은 이런 의문 자체가 없습니다. 자기 뜻은 분노가 아니라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생각할 때 함께 떠오르는 문제가 바로 폭력입니다. 분노가 타인에게 전가될 때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폭력은 어떤 경우든 나쁜 것이라고 배웁니다. 폭력의 배경이 되었던 분노는 참거나 조절해야 마땅하고 그래야 성숙한 인간 대접을 받습니다. 참 비현실적인 규범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거듭 말하지만, 분노 표현을 조절하거나 참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부차적입니다. 누구의 어떤 분노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갖지 못해 분해하는 것 이외의 모든 분노 표현을 우리는 격려해야 합니다. 분노는 자연스러운 자기 존중과 정의의 표현이며, 폭력은 마틴 루터 킹의 표현대로 가장 지적인 행위입니다. (...)
분노는 인식입니다.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힐링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 분노는 분노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인지 반응입니다. 참거나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pp201-208,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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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몸은 당대 사회의 체현입니다. 개인의 상처나 고통은 당연히 사회의 영향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사회적이지 않은 것, 언어 밖의 인식, 관계 영역을 떠난 문제는 없습니다. 개인의 상처든 집단 트라우마든 정치적인 이슈인 것이지요. 그러나 유난히 상처나 분노, 감정과 같은 단어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것으로 간주당하고 민주주의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왔습니다.
이성의 허상과 관념성, 정치 개념의 협소함, 공사 구분 이데올로기의 성별화, 개인과 사회의 대립적 사고는 고통과 치유를 지성의 영역에서 추방했습니다. 기능주의와 구조주의는 대립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공통 분모를 형성해왔습니다. 그들이 세운 정치와 구조의 개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인간사, 특히 사적 영역이라고 구획해 놓은 부분을 탈정치화, 비가시화한 결과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성과 감정의 대립은 근대의 대표적 통념입니다. 스테판 메스트로비치의 '탈감정' 개념은 감정이 없는 메마른 사회가 아니라 감정이 조작되고 변형된 사회를 말합니다. 탈감정은 이성적 태도가 아니라 부정의라는 것입니다. 부정의에 대한 정상적인 인식이 왜 분노와 증오와 같은 감정 차원으로 격하되는지, 그리고 그 인식이 왜 저항적으로 연결되지 않는지는 이 시대 중요한 정치적 과제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감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다양한 문화 장치(미디어)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타자 지향적인 개인들에게는 희생할 만한 초월적 가치가 없습니다. 남아 있는 유일한 가치는 생존입니다. 외부 세계와 자신의 관계는 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의 흐름에 의해 매개됩니다. 삶은 변화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는 신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뿐입니다. 도처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발신지는 여러 곳이며 변화도 무척 빠릅니다. 필요한 것은 행동 규범이 아니라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고 메시지를 유포하는 일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정교한 장치입니다.
이러한 과정, 다시 말해 감정의 기계화와 매개화 과정을 통해 감정은 전통적인 의미의 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재현representation이 되었습니다. 문화산업은 석화된 방식으로 추상화된 감정을 사용합니다. 추상적 감정의 대표적 예는 연대가 아니라 연민, 동정입니다. 동정하지만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탈가정 사회는 대립 없는 사회입니다.
현대의 문제는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인데, 문화는 넘치고 그 대가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됩니다. 탈감정은 직접적인 감정이 아니라 재생된 감정입니다. 느끼고 생각하지 않고 상품으로 전달됩니다. 감정이 감정 자체가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된 시대, '사회운동' '연대' '공감', 이 모든 개념을 재구성해야 할 상황입니다. pp208-211,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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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복수는 정의였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보복과 형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복수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감을 위한 언어입니다. (...)
공통된 요지는 같은 상처 입히기, 인과응보의 소박한 형태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의 '오른 뺨 대 주기'가 고상해 보이지만, 레위기의 율법이 더 공정하다고 해석합니다. 이 원칙은 '지나친 정의감', 즉 복수의 한계를 정한 것입니다. 당한 것 이상을 보복하려는 사태를 막기 위한 법입니다. 받은 대로만 돌려주어야지 그 이상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서의 원뜻은 정의 실현에 이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보복과 전쟁을 부추기는 잔인한 의미로 변했습니다. 신체형에 대한 묘사가 현대인에게 거부감을 주지만 이는 근대 사법제도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
어짜피 복수는 불가능합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사는 양식은 개체입니다. 가해는 개별적으로 가해집니다. 세월호는 한국 사회의 문제지만 그 고통은 각자의 몫입니다. 고통을 공감하는 최선의 방법은 똑같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인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개별성으로 인해 고통은 '절대로' 타인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서로 도울 수 있지만 공감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외로움입니다.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감의 불가능성은 공감에 대한 무수한 성찰을 낳았습니다. 상처는 그 부위를 열어버리는 것, 재해석되는 것이지 회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몸은 재구성됩니다. 물론 어려운 일이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이들의 연대와 투쟁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른바 진보 진영의 근대의 생산주의, 발전주의와도 싸워야 합니다. 이들은 상처 받은 이를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과정보다 목적 달성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보다 '빨리 거기'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한국 사회처럼 고통에 대한 연구가 희소한 사회도 드물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어두운 세계 dark emotions'에 대한 금정이 있어야 하고 악, 고통, 폭력의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
마지막으로 이 글 처음에 인용한 북미 원주민의 말에 내 방식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말의 매끄러움, 나는 이것이 혹세무민, 식자연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사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거나 상품화된 치유의 언어들은 대개 '부드럽습니다'. 치유가 매끄러운 과정일 리 없기 때문입니다. pp212-215, 정희진
백인들의 말은 대단히 매끄럽다
옳은 것을 그르게 보이도록 만들 수도 있고
그른 것을 옳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을 보면 pp199,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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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개의 시대를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의 시대를 삽니다. 그것이 각자의 현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이 지나서 역사가들이 볼 때에는 상대적으로 그래도 안정적인 시대가 있었고, 역사를 기술 할 때, 하루, 일주일 단위로 얘기하는 격동의 시대가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전후기가 그렇습니다. 그런가 하면, 200~300년인데 그저 몇 줄로 넘어가도 되는 시대가 있고. 그것은 지나가서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태평성대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시대를 부르는 말이 될 수 없고, 오로지 상당히 세월이 지나서 그 시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회고적으로 말할 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역사 속에서 서양에서, 역사가들이 위험천만한 시대, 한 개인이 삶을 꾸려가기 어려웠던 시대라고 부르는 두 시대가 있습니다.
보통 역사가들은 고대, 중세, 근대, 현대 이렇게 네 시기로 표현하는데, 고대로부터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도기가 있었고, 중세로부터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과도기가 있습니다. 과도기가 왜 위험천만한 시대일까요? 과도기는 두 개의 질서가 나란히 공존합니다. 고대는 천년, 중세도 천년입니다. 무려 천년에 걸쳐 고대를 지배했던 중추적인 질서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중세 천년을 지배할 새로운 질서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이고요. 허공에 떠 있는 것이지요. 때문에 고대로부터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 중세로부터 근대로 넘어가는 이 과도기가 역사가들이 볼 때에는 개인, 한 인간이 살아내기에 가장 위험천만한 시대라는 겁니다. (...)
바로 이 위험천만한 시대를 한 개인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그저 지금과 아주 먼 과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그들의 삶 전체가 현대 한국 사회 우리 모두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위험천만합니다. pp226-228,이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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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와 관련해서 헤도네를 쾌락으로 번역하는 순간, 에피쿠로스학파를 이해하는 길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들은 헤도네를 세 쌍으로 구분했습니다. 정적 헤도네와 동적 헤도네, 정신적 헤도네와 육체적 헤도네, 지속적 헤도네와 순간적 헤도네. 이렇게 세 쌍의 헤도네를 구분하고는 동적 헤도네, 육체적 헤도네, 순간적 헤도네는 철저하게 없애고, 오로지 정적 헤도네와 정신적 헤도네, 지속적 헤도네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것이 참 에피쿠로스학파입니다. 그러니 '헤도네'는 곧 '쾌락'이라고 연결지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pp243, 이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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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성인이 돼 학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어려서부터 일상화되어야 합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일 때면 종교 이야기, 정치 이야기는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으니 되도록 피하라고 언론에서까지 안내를 합니다. 즐거운 날에 밥상 엎는 일이 일어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한두 번 엎어지기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왜 토론다운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회의학파의 에포케 정신을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포케 정신은 이런 겁니다. 최종적 진리에 대한 판단 유보.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요, 무한한 존재 또한 아닙니다. 또 인간이 알고 있는 '앎' 또한 굉장히 편협합니다. 그러므로 최종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쉽사리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다' '~하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때면 백번 물러서서 또다시 생각해보고 '~일는지도 모른다' '~할지도 모른다'라고 고쳐 말해야 합니다. pp251, 이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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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 역시 자연입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향이란 각자가 태어난 지명을 말하는 좁은 의미의 고향도 있지만, 좀 더 넓게는 인류 보편의 고향이 있습니다. 바로 자연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향수병은 사는 곳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갈 때 느끼는 마음이 아니라, 영원한 고향인 자연과 단절된 채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갈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pp283,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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