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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스토리텔링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상상력은 기억이다

by 릴라~ 2018.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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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은-혹은 자기 자신가지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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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조이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을 말합니다.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 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머릿속에는-이라고 할까, 최소한 내 머릿속에는- 그런 큼직한 캐비닛 설비가 있습니다. 그 하나하나의서랍에는 다양한 기억이 정보로서 채워져 있습니다. 큰 서랍도 있고 작은 서랍도 있습니다. 개중에는 감춰진 포켓이 달린 서랍도 있습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필요에 따라 이거다 싶은 서랍을 열고 그 안의 소재를 꺼내 스토리의 일부로 사용합니다. 캐비닛에는 방대한 수의 서랍이 있지만, 소설 쓰기에 의식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어디의 어떤 사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머릿속에 서랍의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떠올라 한순간에 무의식적으로 그 소재를 찾아냅니다. 평소에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저절로 술술 되살아납니다. 머리가 그런 융통무애의 상태가 되면 그건 상당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말을 바꾸면, 상상력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입체적으로 자유자재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소설가인 나에게 그 뇌 내 캐비닛에 담긴 정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하기 어려운 풍성한 자산입니다. pp12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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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의 경험에 따라) 생각하는데,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경우, 시동이 걸리기까지는 상당히 힘이 들지만 일단 비이클이 기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오히려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써야 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당신이 가진 것이 '경량급' 소재고 그 양이 한정적이라고 해도 조합 방식의 매직만 깨친다면 그야말로 얼마든지 스토리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작업에 숙달된다면, 그리고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깜짝 놀랄 만큼 '무겁고 깊은 것'을 구축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처음부터 묵직한  소재를 갖고 출발한 작가들은,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느 시점엔가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체험을 쓰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작가들은 그것에 대해 몇 가지 각도에서 몇 편의 작품을 발표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많든 적든 '다음에는 뭘 써야 하지?'라는 일단 멈춤 상황에 몰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 지점에서 마음먹고 방향 전환을 시도해서 새로운 테마를 잡아 작가로서 다시금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방향 전환이 되지 않아 서서히 힘을 잃는 작가도 있습니다. pp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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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에도 어떤 세대에도 각각 고유의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p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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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쓸 경우,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 맥 화면으로 말하자면 대략 두 화면 반이지만, 옛날부터의 습관으로 200자 원고지로 계산합니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 정도에서 딱 멈추고, 오늘은 뭔가 좀 잘 안 된다 싶어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20매까지는 씁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쓸 수 있을 때는 그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린다, 써지지 않을 때는 쉰다, 라는 것으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임카드를 찍듯이 하루에 거의 정확하게 20매를 씁니다.

 

그런 건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이 아니다. 그래서야 공장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요, 분명 예술가가 할 만한 짓은 아닌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자유인의 정의입니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됩니다. pp15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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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말을 바꾸면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속 어두운 밑바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입니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작가는 좀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도 깊숙이 파 들어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둠은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집니다.

 

작가는 그 지하의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즉 소설에 필요한 양분-을 찾아내 손에 들고 의식의 상부 영역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태와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전환해나갑니다. 그 어둠 속에는 때로 위험한 것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서식하는 것은 때때로 다양한 형상을 취하며 사람을 미혹시키려 합니다. 또한 표지판도 지도도 없습니다. 미로 같은 곳도 있습니다. 지하 동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길을 잃고 헤매고 맙니다. 그대로 지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어둠 속에는 집합적 무의식과 개인적 무의식 등이 뒤섞여 있습니다. 태고와 현대가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부하는 일 없이 그대로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경우에 그 패키지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깊은 어둠의 힘에 대항하려면, 그리고 다양한 위험과 일상적으로 마주하려면 반드시 피지컬한 강함이 필요합니다. (...) 나는 매일매일 소설을 계속 써나가는 작업ㅇ르 통해 그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차츰차츰 깨달았습니다. 마음은 가능한 한 강인하지 않으면 안 되고 장기간에 걸쳐 그 마음의 강인함을 유지하려면 그것을 담는 용기인 체력을 증강하고 관리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p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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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원래 소설을 쓰는 재능이 다소나마 있었다고 해도 그건 유전이나 금광 같아서 만일 발굴되지 않았다면 깊고 깊은 땅속에 하염없이 잠들어 있었겠지요. '강력하고 풍성한 재능이 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꽃피는 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실감으로는-나는 내가 느낀 실감에 대해 약간의 자신감을 갖고 있는데-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재능이 땅속의 비교적 얕은 곳에 묻힌 것이라면 그대로 놔둬도 자연스럽게 분출할 가능성이 있겠지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상당히 깊은 곳에  묻힌 것이라면 그리 쉽게는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풍성하고 뛰어난 재능이라고 해도, 만일 마음먹고 '좋아, 이곳을 파보자'라고 실제로 삽을 들고 파내지 않는다면 땅속에 묻힌 채 영원히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절절히 그렇게 실감합니다.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행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p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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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말씀드렷듯이, 내가 어렸을 때는 사회 자체에 '발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인과 제도가 서로 다투는 듯한 문제도 그 공간에 쭉쭉 흡수되어 그다지 큰 사회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 전체가 둥글둥글 굴러갔기 때문에 그 동력이 다양한 모순이나 욕구불만을 삼켜 들였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난처할 때 도망칠 수 있는 여지나 틈새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도성장 시대도 끝나고 거품경제 시대도 끝나벌니 지금은 그런 피난 공간을 찾아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큰 흐름에 내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대략적인 해결 방법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도망칠 곳이 부족한' 사회가 몰고 온 교육 현장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아니, 순서대로 말하자면 그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만한 장소를 우선 어딘가에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건 어떠한 장소인가. 개인과 시스템이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온건하게 협의하면서 각자에게 갖아 유효한 접점을 찾아나가는 것이 가능한 장소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그곳에서 자유롭게 팔다리를 쭉쭉 펴고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도, 엄격한 상하 관계, 효율, 따돌림,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따스한 일시적 피난 장소입니다. 누구라도 그곳에 자유롭게 들어가고, 거기서 자유롭게 나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곳은 말하잠녀 '개인'과 '공동체'의 완만한 중간 지역에 속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우선 나는 그곳을 '개인 회복 공간'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공간이라도 괜찮습니다. 딱히 대규모적인 것이 아니어도 됩니다. 수작업처럼 조촐한 장소에서 아무튼 다양한 가능성을 실제로 시험해보고, 만일 뭔가 잘될 것 같으면 그것을 하나의 모델=발판으로 삼아 좀 더 발전시켜나가면 됩니다. 그런 공간을 점점 확대해나가면 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간은 좀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가장 올바르고 이치에 맞는 방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 장소가 여러 곳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났으면 합니다. 

 

최악의 경우는, 문부과학성 같은  상위 관청에서 하나의 제도로서 그런 것을 현장에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개인 회복'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그것을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해결하려고 들다가는 그야말로 본말전도라고 할까, 일종의 코미디가 될 수 있습니다. pp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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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튼 실로 다양한 종류의 책을 불타는 가마에 삽으로 푹푹 퍼 넣듯이 닥치는 대로 허겁지겁 읽었습니다. 책을 한 권 한 권 맛보고 소화해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 그것 이외의 일에 대해 머리를 굴릴 만한 여유는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그게 오히려 좋았는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합니다. 내 주위의 상황을 둘러보고 그곳에 있는 부자연스러움이나 모순이나 기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정면으로 따지고 들어갔다면 아마 막다른 곳에 내몰려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와 동시에, 다양한 종류의 책을 샅샅이 읽으면서 시야가 어느 정도 내추럴하게 '상대화'된 것도 십 대의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가합니다. 책에 묘사된 온갖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의 것으로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에 통과시키는 것으로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즉 현재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듭니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바꿔 말해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계는 좀 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그것을 배운 것은 나에게는 큰 수확이었습니다. pp22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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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대에나 어떤 세상에나 상상력이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상력과 대척점에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효율'입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후쿠시마 사람들을 고향 땅에서 몰아낸 것도 애초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 '효율'입니다. '원자력발전은 효율성이 높은 에너지고 따라서 선이다'라는 발상이, 그런 발상에서부터 결과적으로 날조되어진 '안전 신화'라는 허구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회복하기 어려운 참사를, 이 나라에 몰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패배, 라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효율'이라는 성급하고 위험한 가치관에 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발상의 축을 개개인속에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축을 공동체=커뮤니티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학교교육에 바라는 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이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아니고 교육 설비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정부나 지자체의 교육 방침 같은 건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고 그 한편에는 달리기를 별로 잘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 있고 그 한편에는 상상력이 별로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하지만 아마도 다른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 아이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이 사회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라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일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나하나의 개성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학교는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 사회 자체도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p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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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소설가의 역할은 단 한 가지, 조금이라도 뛰어난 텍스트를 대중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라는 것은 하나의 '총체', 영어로 말하면 whole입니다. 말하자면 '블랙박스'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덩어리의 텍스트로서 기능합니다. 텍스트의 역할은 각각의 독자에게 저작되는 데 있습니다. 독자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풀어서 저작할 권리가 있습니다. p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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