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어교사의 36년간 교육 인생의 회고록이다. 1981년부터 2017년까지 저자가 경험한 학교 현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전교조 해직 교사이기도 하다.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다가 5년 뒤에 복직되었다. 이 책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써온 교육운동 1세대의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 다만 대부분 인문계 고등학교의 이야기이고, 또 저자와 내가 세대가 달라서 고민하는 지점 또한 달라서 내가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은 없어서 듬성듬성 훝어보았다.
그러다가 반전은 책 마지막에 있었다. 저자의 솔직담백한 고백에 충격과 함께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36년 교단 회고록의 마지막 내용은 저자가 정년퇴임을 한 학기 앞둔 시점에서 학생들로부터 수업 교사 교체 요구를 받은 사건이다. 학생들과 호흡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의연하게 대처한다. 학생들의 불만 중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자신과 관점이 다른 부분에 대해 학생들의 주장에 반박하는 의견을 밝힌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국어교사 협의회에 맡긴다. 교사들은 장시간 논의를 했고, 교장의 의견을 번복하는 결정은 내리지 못한다. 결국 저자는 다른 학반 수업을 맡게 되지만, 저자는 현실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하고자 한다.
나는 이 사건이야말로 교직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해직을 감수하면서까지 교육에 열정이 있던 교사였고 수업에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온 원로 교사가 처한 현실이 이와 같다. 교직의 전문성은 의사나 법조인이 처한 현실과 전혀 다르다. 나는 잡무와 행정 업무가 많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가장 큰 문제지만(행정업무가 없다면, 교사들은 수업 및 학생과 관련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룰 시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교직의 어려움은 교직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서도 기인한다. 교직의 전문성은 학생들의 배움과 성장 과정에서 펼쳐지는 것인데, 교사가 만나는 학생들은 해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학교에서 좋은 수업을 하고 좋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다른 학교에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학생들이 속한 지역이 다르고 계층이 다를 뿐 아니라 학교마다 조직 풍토도 다르다. 4년에 한 번 학교를 옮길 때마다 그간 닦은 전문성과 노하우는 간 데 없고, 신규 교사로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다. 경력이 늘어갈수록 학생들가 거리감이 생기고 소통이 잘 안 되는 것도 문제이다.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교직의 보람과 만족도는 결국 학생들이 수업을 얼마나 잘 따라오냐에 달려 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교사는 없다. 잘게 세분화된 교육과정과 그보다 더 미시적인 지침으로 짜여진 평가 규정이 교사들을 얽어매는 환경에서, 다시 말해 '교권'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에서 교직은 투입하는 시간과 애정에 비해 만족감은 미미할 때가 많다. 자신이 믿고 사랑하는 본연의 가르침을 펼치지 못할 때 이 일은 교과서의 얄팍한 지식을 반복하는 단순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 때면 손으로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작업이 훨씬 숭고해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주체적이고 훌륭한 삶을 살아온 한 평교사의 마지막 학교 이야기를 읽으며, 나 또한 퇴직 무렵에는 저자가 경험한 일들로부터 비켜갈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직'이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숙련되면 될수록 자신의 자아 및 세상에 대한 이해도 확대되고 깊어지는 종류의 일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력이 늘어갈수록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감이 줄어드는 교직은 전문직이라 할 수는 없다. 경력 20년이 다 되어도 해마다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마음 같아서는 55세 정도까지만 하고 싶다. 그 이상 나이가 들면 중고생과의 소통은 무리라고 본다. 하지만 연금 개시가 65세부터여서 58세까지는 해야 할 듯하다. 앞으로 안식년 일 년을 포함하여 13년, 세 학교가 남았다.
저자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어도 교육에 대해 냉소하지 않는데, 나는 앞으로 남은 날들을 전망하며 다소 냉소적이 되었다. 아마 이것도 저자와 나의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가치관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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