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뒤에 실린, 박학모 "5.18민주화운동의 왜곡과 '기억의 형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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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캠프는 과거를 짐으로 바라보는 문화는 역사를 단절과 망각과 경멸로 대하기 때문에 반역사적이며, 결국 역사의 비인간화와 기억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 반면 역사를 사회적 기억으로 유지하는 문화에서 역사는 사회적 기억의 논리적 귀결을 따르게 하는 기능을 한다.
제노사이드 연구자 허버트 허시에 따르면, 역사와 시간을 대하는 단절적 패러다임만이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무엇보다 정치권력에 기여하도록 조작되며,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권력의 수단이 된다. p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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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는 최근 홀로코스트 부인 금지의 정당화 근거는 기존의 형법적 법익론의 카테고리 너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들이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홀로코스트 부인 금지는 "정치적 합의를 토대로 한 독일인의 전후정체성"의 표현이며, 따라서 명예나 공공안녕이 아닌 희생자의 정체성과 독일의 정체성에서 이 규정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들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홀로코스트와 그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기념의 의미에서 "역사적 진실" 또는 "자행된 범죄에 대한 수치심"이 홀로코스트 부인 금지의 보호이익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알바쉬의 '집단기억이론'에 따르면 집단기억과 정체성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이러한 기억연구에 힘입어 프랑스에서 '부인주의'는 '홀로코스트 기억의 침해'라는 관점에 1990년에 입법된 프랑스의 홀로코스트 부인 금지법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기소법에 의해 개정된 프랑스 언론법 제24조의2 홀로코스트 부인 금지 규정의 정당화와 관련하여 비록 통일된 견해는 아니지만 학자들은 "기억의 보존", "기억의 방어", 심지어 "역사적 진실의 보존" 등 (집단)기억과의 맥락에서 고찰하여 기억을 확고한 법률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판례도 마찬가지다. 집단기억은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서 사회는 긍정적 측면에서는 그 존속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부정적 측면에서는 법규범을 통해 안정시켜야 하는 가치라는 것이다. pp17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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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근대 형법학자 리스트는 형법과 형사정책의 관계에 대하여 "형법은 형사정책이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라는 명제로써 규정한 바 있다. 쉽게 얘기하면 형사정책적 고려가 형법에 반영되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법치국가적 형법의 틀 내에서 형사정책은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와 원칙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공허함을 넘어 형해화될 때가 많았다. 예컨대 "부인. 왜곡의 금지"를 형법적으로 규정하여 처벌하도록 하더라도 형사소추기관인 경찰과 검찰이 미온적으로 대처할 경우, 나아가 사법부가 이른바 솜방망이처벌을 일삼을 경우, 해당 규정이 사문화될 위험이 다분하여 이러한 법집행행태는 도리어 해당 보호법익의 희화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이러한 우려는 적나라하게 현실화되었으며, 심지어 공권력이 이러한 불법을 방조하고 심지어 조장한 정황마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억의 형법으로서 형사정책의 길잡이가 되어야 할 형법마저 망각의 형사정책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의의 여신은 두 눈을 다 감거나 두 눈을 다 뜨고 정의의 저울, 정의의 검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부인.왜곡을 처벌하는 기억의 형법을 창출해 내는 단초는 결국은 5.18민주화운동의 기억 그 자체에 답이 있다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법이 지켜서 유지되는 기억, 하물며 법이 만들어내는 기억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보다 더 절실한 것은 '기억이 힘이다'는 명제일 것이며, 그렇게 '기억의 형법'은 '기억이 만드는 형법'이기도 할 것이다. pp179-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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