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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기록/유럽, 중동

사그리다 파밀리아 / 스페인 바르셀로나 (2)

by 릴라~ 2018. 12. 31.

"사그리다 파밀리아(성가정 성당)"는 대단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날 수 있는 가우디의 작품, 구엘공원, 구엘저택,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모두 가우디 건축의 독창적이고 특징적인 면모를 두루 보여주었지만, 역시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사그리다 파밀리아였어요. 

사실 19~20세기는 종교가 저무는 시대입니다. '대성당'을 짓는 시대가 아닌 것이죠. 그런데도 사그리다 파밀리아 같은 중세적인 기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우디라는 걸출한 천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 결과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단순히 구시대의 재현이 아니라 생의 아름다움, 예술적 가치, 신에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을 새롭게 조명하는 한 도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순전히 가우디의 천재성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백 년 이상 공들여 짓는 스페인의 건축 문화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몇몇 대형 교회나 성당 건물이 그저 자본의 천박함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유럽에는 규모 면에서건 예술적 가치 면에서건 대단한 성당이 곳곳에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내가 본 성당 중에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바로크 스타일보다 몬세라트 산에서 영감을 얻어 거대한 원통형 첨탑을 세운 가우디의 현대적 미감이 내 감수성에 더 맞아서이기도 하고, 성서 전체를 조각해 넣은 성당 전면 파사드도 고전적이면서도 놀랄 만큼 기품 있고 세련되었어요. 조각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표정이 있었습니다. 성당 후면의 파사드는 가우디의 제자, 수빌라치의 작품입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는 더 깜짝 놀랐어요. 성당 안에 가우디가 숲과 자연과 정글을 새겨넣을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거든요. 늦은 오후라 마침 서쪽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성당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성당 안은 마치 정글 속에서 숲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듯이 자연의 빛으로 가득찼습니다. 성당 기둥은 정글의 고목으로 형상화했고 갖가지 과일과 나뭇잎사귀, 꽃 조각이 주위를 메웠습니다. 깊은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전통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변용할 줄이야! 성당 안은 '이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우디의 감동과 예찬이 그대로 살아 있었습니다. 바로 자연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우디가 태어난 곳은 까탈루냐의 작은 시골 마을인 타라고나 주의 레우스입니다. 언제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살이 넘쳐나는 곳이라 해요. 어린 시절 병약했던 가우디는 학교에 가지 않고 주변의 숲과 강에서 혼자 놀곤 했다고 합니다. 까딸루냐의 자연에 대한 가우디의 깊은 애정은 그 시절부터 싹튼 것이죠. 또한 근처에는 로마 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중세 건축의 잔재가 흩어져 있어 가우디에게 상상력과 영감을 주었다고 해요. 대장장이의 아들로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경험한 기술은 가우디가 재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창조적인 건축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독창성이란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책과 같다."  

가우디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움이라는 자연의 외양에 매혹된 것이 아니었어요.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굉장히 기능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이 항상 기능적인 해결책을 찾아온 결과라는 것을 꿰뚤어본 거죠. 나무 줄기나 인간의 뼈, 산과 언덕, 벌집 등 감탄할 만한 구조가 자연 속에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고 가우디는 자연의 구조와 형태 모두를 건축에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가우디만의 건축 양식이 탄생합니다. 

'어떤 양식으로도 분류하기 힘든 가우디 건축'을 형성한 중요한 원동력으로 까딸루냐 정신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가우디는 언제나 까딸루냐인임을 자랑스러워했고 건축을 통해 까딸루냐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정부가 공식적인 까딸루냐어 교육을 금지하자 까딸루냐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문예부흥운동, 레나센샤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을 통해 되찾으려는 까딸루냐 고유의 정체성에서 종교는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고향 까딸루냐의 대자연, 건축 유적에 깊은 애정을 지녔던 가우디는 레나센샤 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작품에는 까딸루냐의 문화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고향 까딸루냐에 대한 깊은 사랑이 아마도 신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으로 이어졌을 거예요. 그렇게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까딸루냐의 독창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건축물이 되었습니다. 

가우디는 생애 마지막 십 년 동안 사그리다 파밀리아 안에 숙소를 마련하고는 오직 성당 건축에만 몰두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고딕지구 안에 있는 작은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어요. 고딕지구와 사그리다 파밀리아까지는 거리가 좀 있는데, 가우디의 신앙심을 짐작할 만하죠. 가우디는 사그리다 파밀리아에 몰두하는 동안 날마다 이 길을 오가며 수도승처럼 살다가 전차에 치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누추한 모습에 아무도 가우디인 줄 알아보지 못해 택시 승차 거부를 당하다가 빈민 병원에 실려간 일화는 유명합니다. 

성당 지하에 가우디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따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일일투어 시간이 다 되어 보지 못했어요. 구엘공원을 관람할 때 그 옆에 있는 가우디의 집(지금은 기념관)은 잠깐 들렀습니다. 생전 그가 사용한 작고 소박한 침대 옆에 커다란 십자고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이 그가 젊을 때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신앙에 의지했다 해요. 이 집에서 가우디의 아버지가 생을 마쳤습니다. 

훌륭한 건축은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을 가장 깊이 흔드는 것은 종교 건축이 아닌가 해요. 인간의 소망과 바램이 가장 절실한 형태로 투영되어서일 거예요. 사그리다 파밀리아는 예술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가우디가 평생 추구했던 자연과 신에 대한 사랑,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종교적 영감'을 찬란하게 펼쳐놓기에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자기를 초월하고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남는 어떤 영감으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죠. 까딸루냐의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그의 바람은 실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르셀로나는 영원히 가우디의 도시입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자기가 태어난 땅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 그것이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제게 준 메시지였습니다. 


*2018/1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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