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9288킬로미터의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시작되는 블라디보스톡역. 부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분위기의 건물이 이곳에 스민 역사를 느끼게 했어요. 안중근 의사가 여기에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이동했지요. 역 안에는 자매 결연을 맺은 한국철도공사의 작은 표지판도 보였고요. 철로 사이에는 개통 당시 운행되었던 증기기관차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건 2차 세계대전 전에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었어요. 당시 러시아와 미국은 적대국이 아니었지요.
블라디보스톡역에 온 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니라 우수리스크로 가는 로컬 기차를 타기 위해서예요. 역에는 아침부터 한국 관광객들로 미어터졌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패키지 관광은 다 이리로 온 것 같았어요. 우수리스크행 로컬 기차는 패키지여행의 필수 코스인 모양입니다. 결국 기차는 한국인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어요. 러시아 승객은 전체의 20분의 1도 안 되어 보였어요.
관광객들이 내리는 장소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톡 사이에 있는 라즈돌노예역이 스탈린 시대에 17만 명의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해 시베리아 열차에 오른 출발점인데요. 그리로 가는 관광객이 아닐까 했어요.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고려인들은 1990년대 고려인 명예회복법이 통과되면서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우수리스크 도착을 40여 분 남겨두었을 때 모든 관광객들이 사라졌고 그때부터 자리에 편히 앉아 갔어요.
우수리스크는 시골 소도시예요. 블라디보스톡에 비하면 초라한 느낌이 들죠. 여행자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당일 투어로 많이 방문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틀낮밤을 머물렀습니다. 이 이틀은 어떤 도시로의 여행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일대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자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곳까지 오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보다 훨씬 가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우수리스크 호텔에서 북동쪽으로 십여 분 정도 걸으면 ‘고려인 문화센터’가 나옵니다. 러시아 한인 이주 140년을 기념해 2009년에 세워졌어요. 고려인 문화센터 안에는 고려인 역사관이 있습니다. 전시 공간이 그리 크지 않지만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에요. 연해주는 1863년 첫 이주가 시작된 이래 을사늑약 이후에는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이 된 장소입니다. 센터 마당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도 있어요.
호텔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십여 분 걸으면 ‘도라공원’이 나타납니다. 이 공원 바로 근처에 최재형 선생 주거지가 100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아르바트 거리의 선생 주거지에는 표지판 하나만 있지만, 우수리스크의 집은 우리 정부가 사들여 박물관으로 꾸미는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어요. 다음에 우수리스크를 방문한다면 꼭 관람하고 싶은 곳입니다.
최재형 선생은 위대한 인물이죠. 노비와 기생의 자식으로 태어났던 그에게 러시아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어요. 함경도에 살던 그의 가족은 그가 열 살 때 기근을 피해 중국 훈춘을 거쳐 러시아 지신허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도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았고 가출해서 포시예트 항구에 도착한 그를 구해준 건 러시아 상선의 선장 부부였어요. 이들과 동행하며 러시아어를 배우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아시아와 유럽 남부까지 돌아본 그는(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해요)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을 바탕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새로운 인생을 열게 돼요.
선생은 러일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에 군수 물자를 납품하면서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막대한 부를 이룩합니다. 그가 러시아 군대에 납품한 소만 해도 한 달에 150마리였다 해요. 선생은 러시아 장교와 관리들에게 신망이 매우 높아 지방관으로도 추대되죠. 블라디보스톡에 이주한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늘 도움의 손길을 베풀었으며 독립운동에도 막대한 자금을 댑니다.
1907년 대한제국 무관으로 간도관리사로 파견되었다가 국권 상실을 맞은 이범윤 장군은 최재형 선생의 막대한 후원 덕에 의병을 조직하죠. 1908년, 최재형 선생은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결성해요. 안중근 의사를 후원한 것도 그였고, 말 그대로 독립운동의 대부 역할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의 집에는 최재형 선생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해요.
이 지역에 활발한 무장 투쟁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면서 선생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러시아 관리들은 더 이상 그와 거래를 하려 하지 않았죠. 선생은 경제적인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독립운동의 열정을 잃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도 1911년 권업회를 창설하고 이를 토대로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합니다.
우수리스크는 그가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생애 말년을 보낸 곳이에요. 선생은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자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러했듯이 소비에트 즉 적군 편에 섭니다. 일본이 황제파 즉 백군 편에 섰기 때문이에요. 일본은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연해주 공격을 개시하고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킵니다. 이때 신한촌 일대 한인 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어요. 일본은 이어 우수리스크를 공격하자마자 최재형 선생을 체포하고 선생은 이곳에서 총살됩니다. 향년 63세였죠. 선생은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가족이 겪을 고초를 생각해 담담히 체포되었다 합니다.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4월참변 추도비는 우수리스크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다녀왔는데 추도비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요.
최재형 선생 주거지 맞은 편 극장 건물 모퉁이를 돌면 학교 건물이 나오는데요. 여기가 바로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결성된 장소입니다. 건물 벽에 이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붙어 있어요. 최재형 선생이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이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전역에 거주하는 한인 대표들이 우수리스크에 모여 회의를 엽니다. 레닌이 약소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기도 했고, 일본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면 우리 민족이 독립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 전로한족중앙총회의 결정으로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는데,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되기 전, 국내외 최초의 임시정부였어요.
이 두 장소를 확인하고 나서 우리는 도라공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도라공원은 평범한 근린공원이지만 그 안에는 ‘발해거북’이라 불리는 거북상이 있습니다. 비석은 사라지고 받침돌인 거북상만 남아 있어요. 우리는 이를 발해거북이라 부르지만 발해 이후 이 땅을 차지했던 여진족(금나라)의 유물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비석이 사라져서 정확한 건 알 수 없죠. 다만 받침돌의 규모를 봐선 어느 쪽이 되었든 굉장히 강성한 문명이었음을 짐작하게 돼요. 거북상은 두 개인데 하나는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에 있다 해요.
우수리스크 교외에도 발해 유적이 있어요. 우수리스크는 발해 솔빈부가 있던 곳이죠. 우수리스크 시내를 벗어나 라즈돌노예강(수이푼강)을 건너면 나타나는 대평원 지대가 발해 성터라고 해요. 정확한 장소를 찾지 못해 우리는 그 일대를 그냥 택시를 타고 한 바퀴 둘러보았어요. 끝없는 평원 위로 거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한 단체에서 유물 발굴 중이었는지 표지석도 보였어요. 거기 놓인 커다란 불상이 중국식인 것이 안타까웠지요.
발해 유적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우리는 라즈돌노예강가에 잠시 내렸어요.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대한제국이 망한 후 연해주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던 이상설 선생은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유해를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고 유언해요. 선생의 유해를 화장하고 재를 뿌린 장소가 라즈돌노예강이고 2000년대 그 장소에 기념비가 세워집니다. 이상설 선생은 유해는 물론 자신의 유품도 다 태워 없애라 유언했기에 그분의 흔적이라곤 이 유유히 흐르는 라즈돌노예강밖에 없었습니다. 타국의 강물 앞에서 그분의 고혼을 생각하며 숙연해졌어요.
마지막으로 간 곳은 고려사범학교 건물이에요. 구글맵으로 주소를 찍어서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우수리스크 문화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어요.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8년 한인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해 이 학교를 세웁니다.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 정식 개교하여 1937년 한인 강제 이주로 폐교될 때까지 이백 명이 넘는 교사를 양성했어요.
우수리스크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고대 발해의 영토여서라기보다는 우리 독립지사들의 뜨거운 혼이 살아 있는 곳, 그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어서예요. 많은 독립지사들이 이곳을 거쳐 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최재형 선생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했다 해도 그들이 꿈꾼 나라는 서로 달랐으리라 생각해요.
이범윤 장군만 해도 최재형 선생의 후원으로 의병을 조직하면서도 자신은 황족 출신이고 최재형 선생은 노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합니다. 의견 충돌로 최재형 선생이 이범윤 장군의 경제적 편의를 더 이상 봐주지 않자 이범윤 장군 일파는 1909년엔 그를 저격하는 사건을 일으키죠. 다행히 목숨을 건진 최재형 선생은 이후 이범윤 장군과 결별합니다. 나라가 망한 마당에 양반과 황족이 무엇이며, 신분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뿐더러 한 사람의 인재도 귀한 그 엄중한 시기에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족을 제거하려는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죠.
제가 주목한 건 그럼에도 끝까지 독립투쟁에 열정을 쏟았던 최재형 선생의 애국심이에요. 노비 출신이었던 그에게 조선은 따뜻한 나라가 아니었을 거에요.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그런 나라도 아니었으리라 생각해요. 오히려 러시아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 제2의 조국이었죠. 그리고 커다란 성공을 거두죠.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나라 잃은 사람들에게 그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수 있는 최대의 무기는 재산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지키며 러시아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최재형 선생은 자신이 러시아에서 일군 그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며 독립투쟁에 뛰어들죠. 양반 출신 독립운동가들에게 인격적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열정을 잃지 않아요. 그에게 조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그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짐작할 수 있는 건 그가 자기 정체성을 지닌 훌륭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 인간에게 있어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독립을 소망했습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건국의 주역이 될 수 있는 진정한 자격을 지닌 분이죠. 실제 역사에서는 다른 욕망을 지닌 이들이 건국의 주역이 되고 말았지만요.
우수리스크는 한밤중에 떠났습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간 때문이었죠. 우수리스크역에 도착해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한 무리의 동양인이 있었습니다. 한국말을 쓰고 있었어요. 키가 작고 왜소한 몸집, 까맣게 그을린 얼굴, 하얀 와이셔츠 위에 붙은 조선노동당 뱃지. 바로 북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선조들의 아픔과 소망이 서린 땅에서 만난 국적이 다른 동포들. 말을 걸어볼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컬 기차를 타는지 우리보다 앞서 떠났어요. 뒤이어 우리도 하바롭스크행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수리스크가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에 이틀은 짧은 시간이었어요. 많은 감회와 질문, 아쉬움을 남겨둔 채로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밤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2018/7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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